•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2) 녹읍

(2) 녹읍

 祿邑은 관직에 취임한 자의 보수로서 지급되는 고을을 말한다. 이 녹읍은 통일신라기에 한때는 폐지되었다가 수십년 뒤에 다시 부활되었다. 귀족관료의 경제기반으로 크게 기능하였을 이 녹읍의 변천과정은 통일신라기 왕실과 귀족사이의 역학관계를 반영해 주는 요소로서 크게 주목되어 왔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관료전이 지급된 2년 뒤인 신문왕 9년(689) 춘정월에 “下敎하여 內外官의 祿邑을 파하고 해에 따라 租를 차등있게 내림을 영원한 법식으로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여기서 통일신라 초기에는 있었던 관료들에 대한 보수방식의 하나인 녹읍지급이 없어지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인용한 기사를 통해서 녹읍은 통일신라초 적어도 신문왕 9년 정월 직전에는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언제부터 확립된 것인지는 자료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로는 중고기 율령통치가 행하여지고 관제가 어느 정도 정비되는 상황에서 녹읍이 대체로 귀족관료를 중심으로 그들의 연고지에 지급된 것으로 보고 있다.0372)金哲埈,<新羅 貴族勢力의 基盤>(≪人文科學≫ 7,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236쪽).
姜晋哲,<新羅의 祿邑에 대하여>(≪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69), 64∼70쪽.

 이 같이 녹읍제의 시초는 자세하지 않으나,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작업의 장애가 되고 있었던 唐軍을 물리치고 난 후 만들어진 左司祿館(677)·右司祿館(681)의 설치가 녹읍제의 정비에 큰 관련이 있으리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전쟁 후의 논공행상과 일단의 체제정비과정에서 귀족들의 祿에 관한 재정비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녹읍의 성격은 신라 하대의 녹읍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그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겠지만 녹읍이 폐지되고 있던 신문왕대의 주요 정치적 흐름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삼국통일전쟁의 공로자들이며 국가권력의 핵심세력인 진골귀족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그 대상에는 자신의 장인인 金欽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國學을 설치하고 각종 정부기구를 설치하였다. 또한 9州 5小京制를 마련하여 지방에 대한 행정권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재위 7년(687)에 문무관료전을 지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2년 후에 녹읍을 폐지하였다. 여기서 녹읍제의 폐지는 진골귀족 등의 거세와 유관한 정치적 맥락위에서 나온 사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녹읍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관료제와 더불어 나오게 된 관료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과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을 알 수 있다.

 녹읍주는 녹읍에 대하여 법제상으로 田租에 관한 수조권만을 가졌었는지 아니면 노동력의 징발권까지를 가졌던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현실적으로 귀족인 녹읍주는 해당 녹읍의 인적·물적자원에 대한 거의 완전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0373)위와 같음. 전쟁을 치룬 상황에서 지방제도도 아직 미비되어 지방관에 의한 밀도있는 통치가 실시되지 않았던 현실에서 핵심권력층이 주류를 이루었을 녹읍주들이 율령의 규정을 넘어선 약탈적인 수취를 하였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국가는 진골귀족세력을 제거하고 유교이념을 적극 원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귀족관료들의 거대한 경제기반을 분쇄하고자 했을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런데 비록 강력한 왕권에 의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한 신문왕의 정권이라 하여도 귀족들의 경제기반을 일시에 없애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특권적 수혜자들인 귀족들로 하여금 이 변화를 수용케 할 만한 조치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법제상의 녹읍의 收租額 등을 참작하여 歲租를 주도록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억압적인 정치적 상황이었지만 대용방식이 있었기에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같이 폐지된 녹읍이 景德王 16년(757) 3월에 다시 부활되었다. 녹읍의 부활은, 신문왕대 녹읍의 폐지가 전제왕권 확립을 위한 진골귀족세력에 대한 억압책의 하나였다는 이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에서 자연히 귀족세력의 전제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0374)金哲埈, 앞의 책, 237쪽.
姜晋哲, 앞의 책, 80∼81쪽.
경덕왕의 뒤를 이은 惠恭王은 귀족들의 반란 끝에 결국 살해되고 下代의 혼란상이 이어졌던 만큼 이러한 이해는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도 일면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이해는 전체적인 정황에서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이지만 지나치게 대세론을 따름으로써 녹읍제가 폐지되었던 67년간의 역사를 간과해 버린 채 녹읍의 부활을 단순히 제도의 복고라고 보는 해석을 내린 감이 있다.

 전근대사회 역사에서 60여 년이란 큰 의미없는 기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신문왕대에서 경덕왕대에 이르는 이 시기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였다. 녹읍이 폐지된 이후 성덕왕 21년(722)에는 일반백성들에게 처음으로 丁田이 지급되는 등 획기적인 체제의 정비가 지속되었다. 경덕왕 16년 녹읍이 부활된 시기의 전후를 보아도 흉년이 지속되는 등의 재난이 적지 않았지만, 군현제를 정비하고 율령박사를 두며 관직명을 바꾸는 등 제도의 정비에 여전히 진력하고 있었다.0375)≪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6년·17년·18년. 또한 우리 나라 불교예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이 만들어지고 불국사가 중건된 것도 이 경덕왕대의 일이었다. 따라서 귀족세력의 확대와 왕권의 상대적인 위축에 의하여 귀족들의 인적·물적 수탈기반인 녹읍제가 복고되었다는 해석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이렇게 보면 부활된 소위「後期祿邑」은 이전의「前期祿邑」과는 달리 국가의 행정제도의 정비선상에서 나올 수도 있었다는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게 된다.「후기녹읍」은 국가의 행정력에 의하여「전기녹읍」과는 다른 운영과 관리가 가능하다는 국가의 판단하에서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현재「후기녹읍」의 유일한 예인 國學의 학생들에 지급된 學生祿邑을 보아도,0376)≪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소성왕 원년 3월. 한 지역을 학생들에게 공동으로 지급하고 있음에서 귀족들에게 거의 단독으로 지급되었을「전기녹읍」과는 다른 내용과 성격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게 된다.

 「전기녹읍」→歲租(月俸)→「후기녹읍」으로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후기녹읍」에서의 녹읍주의 권한은 제한적이어서 주로 收租權과 관련을 가진 정도였다고 보인다.0377)浜中昇,≪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法政大學出版局, 1986), 85쪽.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녹읍의 부활은 국가의 민과 토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 특히 경제력을 간단한 수치로 환산한 計烟의 數를 파악할 정도로 국가 행정력이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음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력에 대한 파악이 가능한 만큼 세조를 다시 정확하게 지역의 수조액과 연계하여 제도를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도를 개혁하는 데는 이 같은 계량화와 전국에 대한 치밀한 행정체계에 의하여 녹읍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가능한 데서 국가는 다소 부담이 따르는 녹읍을 부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0378)金基興, 앞의 글, 31∼32쪽.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內省 직속의 촌락들은 녹읍과 유사한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0379)金基興, 위의 글, 32∼34쪽. 내성이라는 막강한 국가기관의 직속촌에도 군현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는 사실들을 보면「후기녹읍」을 제도화할 수 있었던 신라 중대 왕권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 세조를 녹읍으로 재전환하는 것은 이 같은 행정적 자신감에서 가능했겠지만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을 것이다. 현물로 된 조세를 모으고 보관하며 관료들에게 분급하는 것은 많은 행정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는 파악된 경제력을 관료들에게 연결하여 번거로움을 덜고자 하였을 것이다. 귀족들을 위시한 관료들로서는 녹읍을 받게 될 때 예상되는 규정 이외의 이익들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은 물론이다.

 녹읍에서의 녹읍주와 국가권력 그리고 녹읍농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녹읍주의 녹읍민에 대한 수취를 중심으로 한 지배는 家臣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한편 국가권력이 녹읍내에 미치는 영향력은「전기녹읍」과「후기녹읍」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전기녹읍」이 있었던 시기는 전란기이거나 전쟁의 후유증이 크게 남아 있었던 시기이고 지방제도도 미비된 상황이었던 만큼,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귀족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성한 시기였다. 따라서 녹읍에 대한 율령상의 녹읍주의 권한이나 지방관리의 행정권이 녹읍내에서 제대로 지켜지거나 수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녹읍주는 자신의 권력과 경제력의 기반이었던 녹읍내의 인적·물적인 요소에 대하여 가혹하게 수탈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법제적으로도 녹읍에 대한 일체의 지배가 녹읍주에게 주어지고, 지방관의 통제가 배제되었었다면 그 지배의 자의성은 더욱 컸을 것이다.

 소위「후기녹읍」을 국가의 행정이 체계화된 가운데 부활되었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녹읍에 대한 지배양상은「전기녹읍」과 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녹읍주는 가신을 통하여 녹읍민들에 대하여 주어진 수조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체계화된 국가의 행정력은 녹읍내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부역이나 군역의 징발 그리고 각종 잡세는 여전히 지방관을 통해 국가에 의해 징발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녹읍주의 자의적인 권한행사는 국가의 지방관들에 의하여 제약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후기녹읍」은, 국학의 학생들에 대한 녹읍 지급이 있었던 점을 볼 때, 대다수의 내외관료들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이「전기녹읍」이 귀족중심으로 주어진 데 비하여「후기녹읍」이 권력의 크기가 보다 다양했던 관료들 일반에게 광범위하게 주어지게 됨으로써 녹읍주의 녹읍민에 대한 지배력이 크게 제약될 가능성을 볼 수 있겠다. 하급관료들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녹읍이 지급되거나 일정지역의 부분적인 戶에 대한 수조권이 주어지게 되는 상황이 있었을텐데, 이 경우 녹읍주의 지배력은 국가의 행정력에 의해 통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전쟁의 공로자이며 公民인 일반민들이 갖게 된 사회경제적 지위나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각성도「후기녹읍」에서의 녹읍주의 자의적 수탈을 막아주는 힘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후기녹읍」에서 녹읍주는 원칙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수조권에 의하여 주로 田租를 수취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그 수조율은 일반민이 국가에 내는 전조의 수조율과 같았을 것이다. 부활된 녹읍은 관료전과 더불어 주로 현직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 같은 경제적 기반을 얻기 위해 증가된 귀족들과 두품층은 관료가 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혜공왕대의 이른바「96각간의 相戰」도0380)≪三國遺事≫권 2, 紀異 2, 惠恭王. 경제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진골귀족간의 상쟁이었다고 보인다.

 진골귀족간의 상쟁이 격화되어 국가의 행정력이 이완·마비되는 현상이 생기면서 녹읍은 또다시 녹읍주의 자의적 수탈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농민층의 반란도 격화되어갔다. 이에 따라 녹읍은 지방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호족들의 경제기반으로 쉽게 전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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