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1) 토지제도
  • (3) 정전·연수유전답

(3) 정전·연수유전답

 문무관료전이 지급되고 녹읍이 폐지되는 토지제도의 변천과정 위에서 성덕왕 21년(722)에 드디어 백성들에 대한 토지의 지급이 실시되었다.≪三國史記≫新羅本紀 聖德王 21년 8월조에는 “始給百姓丁田”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보이는 백성은 학계에서 대개 일반백성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8세기초 통일신라에는 귀족이나 관료가 아닌 일반백성에게도 토지가 지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전은 丁을 매개로 하여 지급되는 토지인데서 나온 명칭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반백성에 대한 토지의 지급은 그 규모면에서나 사회의 계급관계 등에서 크게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전근대 왕정체제에서 백성 일반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백성 일반에 대한 정전의 지급은 관료전의 지급 등에서 시작된 국가적 양전사업의 확대실시 나아가 사업의 완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성일반에게 토지가 지급된다는 것은 국가행정력의 국가내 田土에 대한 파악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丁田制가 백성 일반에 대한 토지의 분급이라고 본다면, 이 제도는 전혀 새롭게 마련된 제도일 가능성은 적다고 여겨지는 면이 있다. 일반민의 토지보유·경작의 관행이 지속되어 왔었고 주민의 다수가 여전히 같은 터전위에 살고 있는 이상, 국가에 의한 토지소유권의 완전한 재편 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란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無主地나 陳田이 늘어났다고 하여도 土着농민 등의 토지에 대한 보유·경작관계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전사업을 통하여 일반민의 토지보유상태가 검출되면서 무주지나 진전에 대한 국가적 조치가 단행된 것이 정전의 실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정전이 지급되는 단계에는 이미 民의 기존의 보유토지에 대한 국가로부터 소유권의 인정이 선결되어 있었을 것은 물론이다. 새롭게 지급되는 형태의 토지가 있다는 것은 기존 보유지에 대한 권리의 인정이 전제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전이 본래의 보유토지와 새롭게 지급된 토지를 다 지칭하는 것이든 혹은 무주지나 진전의 경작을 명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만을 가리키든 간에, 정전의 지급은 한국사에 있어서 일반민의 토지소유권의 공인이라는 큰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丁田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해서는 그와 직결된다고 이해되고 있는 烟受有田畓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연수유전답은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지목의 하나이다. 촌내의 경작전답 중에서 국가 내지 관의 소유로 되어 있는 官謨田畓과 內視令畓을 뺀 토지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촌주의 직무수행과 관련된 촌주위답도 이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 있다. 이 연수유전답은 촌내의 일반민들이 보유·경작하고 곡물을 생산하는 토지이다.

 그런데 이 토지의 명칭을 주목해보자. 연수유전답이란「烟이 받아 가진 전답」을 말한다. 명칭 자체로 볼 때 이 토지가 국가나 관에 의하여 효과적인 경작을 위해 분할지급된 토지로 볼 만도 하다. 그러나 촌락문서에 보이는 4개 촌의 촌민들이 보유한 연수유전답량의 현저한 차이나,0381)4개의 촌 중 공연수가 남아 전하는 沙害漸村·薩下知村, 그리고 西原京 관내의 촌의 연수유전답량의 대강의 평균치를 순서대로 보면, 畓의 경우는 8.5결·4결·2.6결이며, 田의 경우는 5.6결·8결·7.6결이다. 沙害漸村의 연수유답에 포함된 촌주위답의 양 19結 70負 등의 수치로 볼 때, 연수유전답이 관리들에 의해 임의로 할당할 수 있는 토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연수유전답의「유(有)」는 소유하다는 의미를 갖는 이상 종국적으로 烟 즉 각 戶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로 볼 수 있다.

 연수유전답이란 용어는 다른 시기의 토지 지목으로는 보이지 않고 통일신라기에만 사용되고 있다. 왜 이때에만 이러한 지목명이 사용되었을까. 용어 자체에서 볼 때「연이 받아 갖는」역사가 통일신라기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정하에서 연에게 토지를 주는 이는 물론 왕(국가)일 것이다. 왕이 토지를 주었던 역사적 사실을 명칭에 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성덕왕 21년(722)의 ‘비로소 百姓에게 丁田을 지급하다’와도 유관할 것이다.

 동아시아 고·중세의 왕정체제하에서 토지와 인민은 모두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은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존재하였다. 이 같은 시기에 전통적으로 민이 보유·경작해온 토지에 대하여 국가가 양전하여 토지문서를 마련해 주고 보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 줄 때, 백성들은 그 토지를 왕이 준 땅으로 받아들였을 만하다. 특히 그 일이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유해온 이 토지의 지목을「연수유전답」이라 하는 데 공감하였을 것이다. 국가로서도 이 토지가 왕에 의하여 백성에게 주어진 토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효과적인 조세징수와 부역 및 군역의 징발을 위해서는 주민의 생존기반인 논과 밭이 왕이 준 땅임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연수유전답의 출현에서 우리 역사에서는 경작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드러나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자신의 보유·경작지에 대한 배타적인 권한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사회·경제상의 분화와 국가와 民의 관계정립 속에서 그 존재의의가 제고됨에 따라 민의 토지 소유권을 공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제 막 드러난 것인 만큼 ‘연이 받아가진 전답’이라는 이름으로서 명칭에 조차 왕토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연수유전답은 종래의 보유지와 새롭게 경작의무가 부여된 토지를 포함하여 民이 현실적으로 경작·소유하게 된 토지였다고 여겨진다. 연수유전답과 정전은 이 같은 관계에서 존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수유전답의 경작은 농민들의 자영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촌락문서에 보이는 촌주를 위시한 부유한 농민층은 노비를 부리거나 품을 사서 토지를 경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경제가 파탄하여 투탁한 농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0382)≪三國遺事≫권 5, 孝善 9,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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