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2) 조세제도
  • (2) 호조

(2) 호조

 통일신라기의 戶는 그들이 소유한 토지량에 따라 전조를 냄은 물론 각 집에서 생산한 布 등을 국가에 調로서 납부하였다. 고구려를 위시한 삼국에서도 戶調는 수취되고 있었고, 고려에서도 역시 존재하였다.≪三國史記≫의 통일신라기 기사에는 租·調의 감면 사실이 보이고 있으며,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고려 太祖 즉위년의 조서의 내용을 보아도 田租와 더불어 호조가 통일신라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뽕나무와 삼밭에 대한 정확한 파악도 호조의 징수와 직결되는 것은 물론이다.

 통일신라기 호조의 징수가 어떻게 변화되어갔는가 하는 점은 구체적인 자료로서 살펴보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이 시기 호조의 징수량을 전 시기에 비해서는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新羅本紀 文武王조에 의하면 재위 5년(665) 겨울에 絹·布의 길이를 약 절반 정도로 줄인 사실이 있다. 이는 전공의 포상 등으로 많은 견·포가 소용되는 현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기도 하며, 한편 동맹관계에 있던 唐나라 견포의 필단 크기도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필단의 길이를 짧게 한 것은 한편으로 주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는 시책이었다.0387)李宇泰,<韓國古代의 尺度>(≪泰東古典硏究≫창간호, 1984), 13쪽. 문무왕 9년 2월에 있었던 빚의 탕감과 이자 면제조치까지를 생각해보면 통일신라기 일반민 특히 대다수 빈호들에 대한 각종 수취가 축소되어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장기간 지속된 전시경제가 하층 일반민들의 경제상태를 극히 악화시켜왔던 만큼 일반민의 각종 부담을 경감시키는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그의 재위 21년(681) 임종시의 조서에서도 긴요하지 않은 각종 과세는 모두 헤아려 폐지하라고 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전시경제의 가장 극심한 피해자들인 일반민에 대한 조세경감책이 추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일반민이 부담하는 호조의 수취량이 통일신라기에는 삼국시대 말에 비해 크게 줄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조의 징수에는 9등호제가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통일신라 9등호제의 편성기준에 대하여는 학계에서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계산상으로나 통일신라가 경과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단계로 볼 때 각 孔烟의 소유토지량의 크기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다고 여겨진다.0388)李仁哲,<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 4∼10쪽.
―――,<新羅 九等戶制의 再論>(≪歷史學報≫133, 1992), 127∼148쪽.
따라서 이 같이 9등호제가 편성되고 있는 현실에서 戶가 부담하는 공물인 調는 9등호제에 따른 차액 부과가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호등부과 대상체가 되고 있는 공연은 재산상태, 친인척관계, 집의 근접도 등에 따라 1∼3戶의 자연호로 편제되었다고 여겨지는 만큼,0389)李泰鎭,<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孔烟>(≪韓國史硏究≫25, 1979), 31∼38쪽.
金基興,<新羅村落文書에 대한 新考察>(≪韓國史硏究≫64, 1989), 13∼20쪽.
호조는 자연호보다는 공연을 대상으로 하여 9등호제에 따른 수취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9등호제의 상등호는 지배층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인 만큼,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상등호에 매겨지는 수취량이 하등호들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양이 되기는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호등별 차액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더욱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각 孔烟에 대하여 호등에 관계없이 같은 액수의 貢物을 부과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도 공연의 편성에서 이미 기본적인 빈부의 정도가 참작된 것인만큼 재산의 크기에 따른 수취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말에는 각 집에 대하여 재산의 차등을 고려하지 않고 일정하게 포 5필을 내도록 하였는데, 이에 비하여 통일신라기의 호조징발은 크게 변화·정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麻布나 絹의 징수 이외에 이것들을 짤 수 있는 원료가 되는 실인 麻와 絲가 거두어졌을 가능성도 크다. 신라촌락문서에는 뽕나무의 숫자나 마전의 넓이가 파악되고 있는데 원사에 대한 수취가 있었을 것을 추정케 해준다. 또한 촌락문서에 의하면 추자나 백자의 주수가 정확히 파악되고 있는데, 이러한 나무를 위시하여 각종 과일나무를 소유한 집들에 대해서도 나무의 크기나 결실여부에 따른 수취가 있었을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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