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2) 조세제도
  • (3) 부역

(3) 부역

 통일신라기의 일반민들은 국가에 대하여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성을 쌓고, 제방을 쌓으며, 그리고 각종 특산물을 채취하고, 조세로 수집된 현물들을 일정한 지역에 운반하는 일도 수행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국가나 관청의 토지 나아가 文武官僚田 등을 경작해 주어야 했다. 賦役은 국가에 의하여 징발되기도 하지만 각 지방관청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징발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자료들로 볼 때 후자 즉 雜役의 실상은 잘 알 수 없다. 여기서는 국가적인 징발을 중심으로 통일신라기 부역의 실태를 알아 보도록 하겠다.

 통일신라기 부역징발의 주대상은 일반민 중에서 丁男이었다. 정남은 15세 이상 약 60세 이내의 연령층에 있었던 남자였다. 국가적인 부역에 징발되는 정남은 삼국시대 이래 15세 이상의 남자였는데0390)金基興, 앞의 책, 86쪽. 이 같은 사실이 통일신라기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성인여자 즉 丁女의 징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는데 국가적인 부역에서는 배제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년중 부역에 징발되는 기간은 1개월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데0391)金基興, 위의 책, 198쪽. 명시적인 자료는 없다.

 국가적인 부역에 동원되는 남정들의 징발체계는 2계통이었다. 이는 원성왕 14년(798) 菁堤라는 저수지를 고쳐 수축하고 공사의 개요를 적어 놓은<貞元修治記>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이 일에는 法功夫 14,140명과 청제에 인접한 절화군과 압량군에서 징발되어온「助役」약간명이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주노동력인 법공부는 통일신라기 일반민을 대상으로 하여 편성된 法幢이란 부대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一品軍과 같은 노동부대원이었다.0392)李基白,<永川 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考古美術≫102, 1969;≪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95쪽). 인원수 14,140명도 35명으로 편제되었다면 404개, 70명으로 편제되었다면 202개의 단위부대였을 인원수이다.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薩下知村에 있는 余子와 法私도 법공부와 같이 법당의 군사로서 주로 노역을 진 군사였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군대체계를 통하여 동원된 인원이 통일신라기 국가적 공사의 주노동력이었다. 통일신라기에는 삼국시대말과는 달리 전쟁이 없었음으로 구성된 법당군이 주로 노동부대원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조역」이라는 부역에 징발된 또 다른 계통의 인원이 있다. 이들은 법공부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은 인원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명칭에서부터 노동부대원으로서 주노동력으로 사역되고 있던 법공부와는 공헌도도 다르고 또한 계통이 다른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법공부가 군역징발에 의해 주노동력으로 사역되고 있었던 데 비해 아마 법당군의 비번에 해당한 연간에 부역에 동원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촌락문서에 기록된 4개의 촌 중에서 살하지촌의 14개의 孔烟에만 여자와 법사의 군역사항이 명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군역관계가 기록되지 않고 있는 다른 3개의 촌의 공연들은 법당군이 아닌 다른 군역을 지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0393)旗田巍,<新羅の村落>(≪歷史學硏究≫226·227, 1958·1959;≪朝鮮中世社會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434쪽). 그러나 통일신라기 군역동원이 전주민에 대하여 상시적으로 부대편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개 촌락만 군역사항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촌락문서가 3년마다 작성되는 형편으로 볼 때 오히려 법당군의 징발이 3년 단위로 교체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면이 크다. 삼국시대말 신라에서는 남정들이 국경을 지키는 군역에 3년간 복무하였던 사실을 참고할 때 더욱 이 같은 생각이 든다.

 이 같은 사실들에서「조역」에 징발된 인원은 법당군에 동원되지 않고 있던 남정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군대에 동원될 수 있는 연령에 있는 인원이라도 3년간의 복무를 마치거나 아직 순번에 해당되지 않았을 때 즉 군대에 동원되지 않고 있었던 연간에는 율령이 정한 바에 따라 일반장정으로서 부역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역의 징발기준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역시 없다. 그런데 부역은 군역과 더불어 身役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기 군역의 징발기준을 통해서 부역에 관련된 점을 알아보도록 하자.

 군역 그 중에서도 일반민의 법당군 징발의 사실이 신라촌락문서에 보인다. 문서에 보이는 살하지촌의 공연에 군역징발사항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合孔烟十五 計烟四餘分二 此中仲下烟一余子 下上烟二余子 下仲烟五竝余子 下下烟六以余子五法私一

 이 내용은 이 촌의 공연 15개 중에서 收坐內烟 1개를 제외한 기존의 14개 공연에 余子와 法私라는 법당군이 징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군역의 징발이 孔烟을 대상으로 하여 실시되고 있음도 보여준다.

 호등별 각 공연이 지고 있는 군역의 부담량에 대하여는 단정해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일단 호등에 관계없이 각 공연별로 동일한 부담 즉 1명의 장정이 징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호등에 따라 차등을 둔 인원,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다면, 징발의 우선 순위에 호등제를 적용하거나 복무일수에 차등을 두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경우≪고려사≫형법지 호혼조에 의하면 고려초에는 장정의 숫자에 따라 9등호제가 편제되어 이에 따라 부역이 차등적으로 부과되고 있었음이 참고된다.

 그런데 군역이나 부역의 징발이 갖는 몇 가지 특성과 통일신라가 갖고 있는 신분사회로서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군역이나 부역은 田租의 수취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호주나 가족원 중의 남정이 직접 몸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부자집인 경우라도 만약 남정이 없다면 군역이나 부역을 부담키 어려웠을 것이다.≪삼국사기≫열전에 보이는 통일신라기 효녀 知恩의 집이 바로 그런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재산이 많다고 하여 장정수가 그에 비례하여 반드시 많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1∼3戶의 자연호로 공연이 편성되어 있었다고 보면 孔烟내에 있는 남정의 인원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9등호제가 人丁수의 다소에 따라 편제되었다는 견해를 따른다고 해도 세세한 9등급의 차등징발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국가의 건국초, 예를 들면 고려초나 조선초에 도성수축 등의 이유로 노동력의 수요가 크게 늘어 부역징발이 철저히 되는 시기를 제외하고 볼 때 지나치게 세분된 등급에 따른 노동력징발은 지속적인 제도로 남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려사≫를 보아도 구체적인 군역이나 부역징발이 대체로 3등급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도0394)金基興, 앞의 책, 192쪽 참조. 이 같은 연유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신분제사회였던 만큼 상등호가 하등호에 비해 대개 신분적으로 우위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田租의 수취에 있어서 결부제의 시행은 사적소유를 충분히 보장했던 만큼 상위신분층을 설득하는 데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역이나 군역징발은 人身으로 부담하는 것인 만큼 과연 상대적으로 상위신분층이었을 상등호에서 하위신분층 즉 下下烟보다 크게 많은 양을 징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보인다. 計烟수에 따라서 군역이나 부역을 징발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0395)旗田巍, 앞의 책, 430쪽. 이후 다수의 연구자들이 지지하였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上上烟은 하하연에 비하여 9배의 인적부담을 지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신분사회의 특성상 상등호가 하등호보다 이 같이 월등하게 많은 身役을 지는 일이란 용납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큰 전쟁이나 대역사가 없었던 통일신라기에 9등급으로 나누어 그같이 철저한 노동력징발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도 있다.

 여기서 孔烟의 구성에 다시 주목해 보자. 통일신라는 빈한한 민들을 보호하여 국가의 인적·물적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빈약한 호들은 2∼3개를 묶어 하나의 과호로 삼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자립할 수 있는 호들은 한 자연호로서 공연을 이루고 빈약한 호들은 2∼3개로 하나의 공연을 편성하였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공연은 최소한의 존립이 가능한 국가의 과호였던 것이다. 이렇게 편재된 공연들의 토지소유량을 위시한 재산의 상태는 여전히 차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인정의 수도 공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연들에게 군역이나 부역을 부담시킬 때 균일한 액수를 징발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경우 재산의 차등이나 인정수의 차이가 비례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공연의 구성이 이미 1∼3호의 자연호로 되었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공연에 대하여 호등별 차이를 두지 않고 징발했다고 하여도 이미 공연의 구성에서 기초적인 노동력·경제력의 차등이 고려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분사회로서의 성격과 고려시대 후반의 군역이나 부역의 징발사례들을 볼 때 3등호제가 실현되는 셈인 공연에 대한 균일한 군역·부역의 징발은 역사적인 현실성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점들에서 살하지촌의 공연들은 모두 1명씩의 남정을 법당군으로 징발당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부역도 성격상 군역과 유사한 것인 만큼 공연별로 균일한 노동력을 징발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지방의 잡역에서는 일의 성격에 따라 모든 남정이 징발되거나 장정수가 참작되어 징발되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며 때로는 여성의 징발도 있었을 것이다.

<金基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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