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3) 각종 수공업 기술의 발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수공업 분야에 상당한 기술적 발전이 있었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고구려·백제의 기술까지 포용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기술을 수용한다는 범위를 넘어서서 신라 특유의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시기 수공업 기술의 발전은 주로 궁중·관영수공업 분야의 것이었지만, 이 또한 귀족이나 민간 수공업분야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白紙墨字大方廣佛華嚴經寫經>(755)에서 볼 수 있듯이 경위와 외위의 관등을 가진 장인들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불사에 일종 工價를 받고 작업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관장들의 기술이 일반 장인들에게 전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애장왕 5년(804) 승려 장인인 覺知師가 禪林院鐘을 주조하였던 데서 볼 수 있듯이, 기술적인 문제로 인하여 관장들이 주도하였던 주종이 9세기 초엽에는 점차 일반 승장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수공업과 일반 수공업 사이에 기술적인 교류가 있었고, 그 결과 사회 전반적으로 수공업기술이 제고되었음을 보여준다.

 먼저 통일신라시대의 철생산은 자석 등의 광물을 생산하여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으며, 이와 함께 철의 사용량도 전시대에 비하여 놀랄 만큼 증가하였다. 이는 신라가 이 시기에 이르러 중고기에 비하여 채광 및 야철기술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채광법의 발전은, 원광석이 砂鐵에서 赤鐵鑛 또는 磁鐵鑛 등의 보통 광석으로 바뀐 것에서 살필 수 있는 바,0418)尹東錫,<統一新羅의 鐵器>(≪三國時代 鐵器遺物의 金屬學的 硏究≫, 高麗大出版部, 1989), 203쪽. 삼국시대에는 露天法이었던 것이 통일 이후 땅속의 광맥에 따라 수직으로 갱도를 파내려가 채광하는 竪坑法으로 변하였다.0419)尹東錫,<古新羅의 鐵器>(위의 책), 134∼135쪽. 야철법에 있어서도 종래 삼국시대에는 原鑛과 木炭의 炭燒式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통일 이후에 규모를 확대시켜 도가니와 풀무를 이용한 방법으로 발전하였다.0420)尹東錫, 앞의 글(1989a), 134∼135쪽.

 철가공 기술은 鑄鐵과 鍛鐵技術을 들 수 있다. 주철기술은 삼국시대에 馬具나 무기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후 점차 합금기술이 발달함으로써 불상이나 종을 조성하거나 솥 등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데 이용되었다. 특히 무기와 농구류의 경우 삼국시대에는 주로 炒鋼法에 의해 생산된 중·고탄소강의 철소재를 목탄 중에 가열하여 반복 鍛打하는 방법이었으나,0421)尹東錫, 앞의 글(1989b), 136∼145쪽. 통일신라시대의 유적으로 인정되는 馬塚 138호분과 안압지·황룡사지·월정교·월성해자에서 출토된 무기·농구류의 경우 대부분이 섭씨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용해한 白鑄鐵로서 주조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0422)尹東錫, 앞의 글(1989a), 158∼204쪽.

 한편 금속의 넓게 펴지는 성질이나 열을 가하면 용해되는 성질 등을 이용하여 금속제품을 가공하는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대체로 板金法과 打出法 등의 기술이 사용되었다. 또한 금속제품을 장식하는 기술 곧 彫金技術로는 魚子文과 象嵌, 線彫技術 등을 비롯하여 금가루와 금실로 무늬를 장식하는 鏤金細工技術(Filigree 기술)이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7, 8세기 무렵 각종 사리장엄구나 器皿·粧飾金具 등에 連珠文帶와 함께 이용되었는데, 통일신라 토기나 나말려초 도자기에까지 응용되어 고려시대의 독특한 청자상감법을 창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금속제품을 장식하는 기술로서 鍍金法을 들 수 있는데, 아말감에 의한 도금과 金箔鍍金·漆箔法 등이 있었다. 신라에서는 주로 금아말감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수은에 금을 섞어서 동 또는 동합금한 제품에 바른 후 이를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킴으로써 금만을 남게 하여 도금하는 방법이었다.0423)李蘭暎,≪韓國古代金屬工藝硏究≫(一志社, 1992), 173∼256쪽.

 다음으로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수공업 제품으로 궁중수공업 관사에서 생산하였던 직물류를 들 수 있다. 이는 중국과의 교역 물품 가운데 보이는데, 7세기부터 비단류의 품목이 다양해지고 보다 섬세한 베가 생산되었다. 그 후 8세기 무렵에는 명주류와 모직물류가 새로이 나타나는데, 이는 새로운 기술의 유입이나 또는 직물류의 기술을 모직물에 응용한 결과였다. 또한 이 시기에 五色氍毹 등 염색과 관련된 직물류의 이름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서 염색기술상의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비단류에 문양을 내는 기술과 함께 가는 베류의 직조기술이 마직물이나 모직물의 직조에 응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통일신라의 토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정형화된「신라토기」를 계승하면서 백제와 당나라의 기술이 일부 수용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7세기초에 이르러서부터 당나라 영향을 받은 그릇 모양들이 나타나는데, 이를 전후하여 스탬프로 문양을 찍은 인화무늬 토기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초기 통일신라의 토기로 이해되는 경주 西岳里 石室墳 출토 굽다리접시나 목항아리는 고식 신라토기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안압지에서 출토된 일련의 토기 가운데 홈이 파인 구연고배 등은 백제 계통이며, 그리고 신라의 고배와 수·당 계통의 굽달린 사발(盌)이 합해진 다리 달린 사발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신라의 전통적인 토기 형식에다 백제나 중국의 토기 형식을 가미한 것이었다. 특히 안압지 출토 굽다리접시에는 물고기알무늬(魚子文)가 보이는데, 이는 7세기 무렵 각종 금속제품의 장식문양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토기에까지 응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후 忠孝洞古墳 단계에서는 굽다리접시의 뚜껑이 완전히 사라져,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고배의 형식 곧 다리에 아주 작은 구멍을 가진 뚜껑없는 굽다리접시(無蓋高杯)의 전형을 이룬다.0424)金元龍,≪新羅土器≫(열화당, 1981), 84∼90쪽. 이와 아울러 9세기 무렵에 중국 浙江省 지구의 越州窯 햇무리굽 청자가 당시 활발한 사무역에 힘입어 도입됨으로써 고려청자의 기원을 이루기도 하였다.0425)鄭良謨,<槪說 高麗靑瓷>(≪高麗靑瓷名品特別展≫, 國立中央博物館, 1989), 268·281쪽.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토기 제작기술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뼈단지나 鬼面瓦 등에 유약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종래의 신라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굽는 과정에서 잿물에 의한 자연유만이 나타났던 것인데, 7세기 중엽부터 鉛釉 즉 산화연을 염기로 하는 유약과 灰釉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 시기 토기의 형식이 그러하듯이 백제·중국을 통하여 전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유는 용해도가 섭씨 700∼800도에 불과하여 가마의 온도가 올라가면 모두 타버리기 때문에, 연유를 바른 토기는 저화도의 산염으로 구워야 하고, 고온 환원염의 전통 신라토기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약을 바른 토기는 회백색 또는 적갈색의 빛깔을 띤 軟質土器로서 실용성보다는 특수 용도에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0426)金元龍, 앞의 책, 16∼19쪽.

 통일신라시대의 조선기술은 문무왕 18년(678) 船府라는 독립된 관사를 설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발달한 해상력에 기인하지만, 실제로 당시의 조선기술이 어떠하였는지, 배의 형태와 구조가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5, 6세기 무렵의 연안용 소형 배모양의 금령총 출토의 배모양 토기(호암박물관 소장)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7, 8세기 무렵의 놀이배(경주 국립박물관 소장)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특히 안압지에서 출토된 배는 韓船의 초기 모습을 전해주는 半構造船으로서 L자형 邊材, 독특한 나무못(木釘), 加龍木 등 우리 나라 고대선의 특징을 보여주며, 11세기 중·후반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莞島船」과 상통한다고 한다. 이는 신라시대에 중국선이나 일본선의 구조와 선형을 달리하는 독자적인 구조법에 의한 한선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0427)金在瑾,<張保皐 時代의 貿易船과 그 航路>(≪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148∼149쪽.

 사실 신라선에 관한 기사는 우리측 사료상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에, 오히려 일본측 사료에 많이 보이고 있다.≪續日本後紀≫권 8, 仁明天皇 承和 6·7년조에는 9세기 중엽의 신라선이 ‘바람과 파도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또는 ‘능히 파도를 헤치고 갈 수 있다’는 우수한 배로 소개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신라선은 9세기 초엽 張保皐가 한국·중국·일본 삼국의 해상권을 장악할 때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당시에 장보고의 원양무역선은 갑판 위에 선실을 두고 돛대를 두 개 이상 장비한 平底型船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중국선인지, 신라 고유의 배인지, 아니면 양자의 절충형인지는 분명하지 않다.0428)金在瑾, 위의 글, 147∼151쪽.

 그런데 9세기 초엽 중국을 다녀온 일본 승려 圓仁의≪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원인 일행이 신라인 통역자 金正南의 주선으로 개성 4년(839) 윤정월 4일에 새로 산 배를 수리한 바 있는데, 楊州로부터 楚州에 보냈던 都匠·番匠·船工·鍛工 등 36명의 장인들은 신라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원양무역선 등의 기술적 계통은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인 장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져 신라인 수수·초공들을 중심으로 운항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원인 등이 이러한 배를 이용하여 일본에 귀국한 이후 그 우수성이 인정되어 9세기 중엽경에 이르러서는 일본인들이 다투어 신라선을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에서의 제염법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光宗 9년(958)에 세워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의 ‘바닷물을 찌는 수고를 더하고’라는 문구에서 바닷물을 쪄서 농축시키는 방법(海水直煮式)으로 소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0429)崔仁渷 撰,<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82쪽. 이러한 제염법은 많은 재목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재목과 노동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가에 鹽盆 등을 설치하였다.「鹽盆」은 일반적으로 바닷물을 찌는 가마솥을 말하는데, 경문왕 12년(872)에 세워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끝부분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어 지금까지는 염분을 토지 면적단위인 結로 표시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鹽田과 염분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소금 생산시설을 일컫는 용어로 추측하여 왔다.0430)權寧國,<14세기 榷鹽制의 成立과 運用>(≪韓國史論≫ 13, 서울大, 1985), 15·30쪽. 그러나 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염분은 소금을 찌는 가마솥을 일컫는 이름이었으며, 이를 세는 단위도 坐數나 所를 사용하였고, 염분은 솥의 크기에 따라 大釜·中釜·小釜 등으로, 그리고 솥의 재질에 따라 鐵盆·土盆 등으로 구분되었다는 점에서 10세기 중엽까지의 제염법은 여전히 바닷물을 쪄서 소금을 농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라 하겠다.0431)朴南守,<각종 수공업기술의 발달>(앞의 책), 81∼87쪽 참조. 다만 이 시기에 단편적이나마 민간에 소금이 유통되었음직한 기록이 있어서,0432)≪三國遺事≫권 3, 塔像 4, 三所觀音 衆生寺. 소금 생산량이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당히 증가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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