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2) 대외교역

(2) 대외교역

 신라의 대외교역은 처음에는 당나라 및 일본과 사신을 파견하면서 貢物과 廻賜品을 주고 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公貿易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교역은 주로 사신들의 내왕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당나라와는 경주-당은포-산동반도 등주로 이어지는 북부연안항로와 중부횡단항로, 그리고 경주-회진-중국의 강회지방으로 연결되는 南部斜斷航路를 거쳐 장안에 이르러 행해졌다.0445)權悳永,<遣唐使의 往復行路>(≪古代韓中外交史≫, 一潮閣, 1997), 188∼208쪽.

 당나라와의 공무역은 공물과 회사품의 교환을 통한 교역을 비롯하여 당나라의 官市 개설을 통한 교역, 互市를 통한 교역으로 구분된다. 공물과 회사품의 교환은, 먼저 邊州에서 遣唐使가 가지고 간 공물의 종류와 수량을 검열하여 鴻矑寺에 보고하면, 홍로시에서는 그 가격을 산정하고 회사품의 물량을 정하여 귀국시 견당사에게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에 사신들 개인에게도 관등의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선물을 내려주었다. 官市는 사신의 편의를 위해 각종 行鋪로 하여금 사신의 객관 안에 상품을 진열하여 교역케 하는 방식이었고, 互市는 특산물을 당나라 조정에서 高價로 구입해주던 방식이었다. 이 밖에도 비공식적으로 사신들은 본국 왕실 혹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도 하였다.0446)權悳永,<遣唐使의 活動>(위의 책), 274∼278쪽. 역으로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와서 국왕으로부터 물품을 하사받는다든지, 신라 상품을 다량 구매하여 당나라에 돌아가 막대한 이윤을 남긴 경우도 있었다.0447)權悳永, 위의 글, 281∼282 참조.

 그런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이루어진 공무역은, 신라가 특산물과 직물류 및 금속 가공품을 비롯하여 물품화폐의 성격을 지닌 금·은·동·포 등을 공물로 가져간 데 대해, 당나라는 외교적인 의례품과 아울러 직물류, 금속가공제품 및 문화 관련 물품을 사여하는 형식이었다. 이와 같이 두 나라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무역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공물로 가져간 특산물의 경우 牛黃·人蔘·美髢 등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것으로서 당나라에서 매우 선호하였던 물품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신라에서 가져간 직물류나 금속가공품의 경우에는 시대가 갈수록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궁중수공업 생산의 발전에 바탕한 것으로서, 9세기에 들어서면 동남아 수입물품을 가공하여 중국에 보냄과 아울러, 불경과 불상까지도 당나라에 보낼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셋째, 신라가 가져간 물품 가운데 金·黃金·麩金·銀·布 등이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당나라 남부 지방에 유통된 庸調銀이나, 兩稅法이 성립된 이후에 일어난 동전의 품귀현상, 그리고 이러한 화폐와 함께 통용되었던 현물화폐로서의 금과 포 등이 지니는 가치에 따른 것으로서,0448)栗原益男·布目潮渢,≪中國の歷史≫(東京;講談社, 1975), 95·294·305쪽 참조. 신라조정 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매입하기 위하여 일종 물품화폐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헤아려진다. 신라가 당나라에 宿衛學生을 보낼 때면 국가에서 買書銀이나 買書金을 주어 학업을 하는 데 필요한 경비에 충당토록 하였던 데서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넷째, 중국에서 내린 회사품의 경우 외교 의례적인 물품 외에 가공제품이란 것도 대체로 국왕 또는 왕실 등에서 사용될 만한 의복류와 기물에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원성왕 2년(786)과 경문왕 5년(865)의 당나라 회사품이 모두 왕과 왕비, 왕태자·대재상·차재상 등에 한정되었다는 데서도 드러나지만, 결국 공무역이란 것이 당시의 최고 지배층이었던 국왕과 왕실 귀족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섯째, 공무역을 통한 중국 문화의 수용은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공무역은 당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도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공무역은 신라의 調·土毛 등으로 표현된 물품과 일본의 黃金·明珠·綿 등의 교역으로 이루어졌다. 신라가 일본에 보냈던 조 또는 토모 등은<買新羅物解>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향료·안료·염료·금속·기물·직물·서적·일반 생활용품 등 당나라·신라·동남아시아 제품들을 망라하는 것이었고,0449)윤선태,<752년 신라의 대일교역과 ‘바이시라기모쯔게(買新羅物解)’>(≪역사와 현실≫24, 1997), 47쪽 참조. 일본측에서 신라에 보냈던 물품은 황금·명주·면류 등으로서 당시 동북아시아권에서 물품화폐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통일 이후 신라의 일본과의 사신 왕래는, 신라가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로 인하여 양국관계가 소원해 있을 때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쪽에 발해가 들어서면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과 발해가 각각 연대를 맺게 되자, 신라 성덕왕 때부터 일본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여 경덕왕 12년(753) 신라왕이 일본의 오만무례함을 이유로 사신을 받지 않음으로써 경색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0450)金恩淑,<8세기의 新羅와 日本의 關係>(≪國史館論叢≫29, 1991) 참조.

 그러나 일본측의 新羅交關物에 대한 욕구로 인하여,0451)≪續日本紀≫권 29, 稱德天皇 神護景雲 2년 9월 갑자. 공무역에 대신한 私貿易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더욱이 9세기 초엽 신라의 제반 사회적 갈등과 왕위쟁탈전 등의 정치적 여건은 이러한 상인들의 사무역을 부추기는 배경이 되었다. 憲德王 2년(810) 무렵 신라의 상인들이 빈번히 일본 구주지방에 표착한 것이나 그 이듬해에 신라의 運糧船人들이 해적들에게 약탈당하여 일본에 표착한 사실, 그리고 9세기초 일본의 구법승 圓仁이 중국 양주에서 만났던 신라 상인 王請과 王宗이 일본과의 교역을 통하여 거부가 되었다는 사실 및 신라 상인들이 중국 양주 등지에서 일반물품이나 시문·미술품 등 신라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물품을 사들여갔다는 점 등은 당시 활발하였던 신라 해상들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들 해상들은 최초에는 長春과 같이 국내 물품의 해운에 종사하다가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부응하여 눈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일본에 신라와 당나라 및 동남아 물품을 제공하는 유일한 통로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 또한 안사의 난(755∼763) 이후 지방통제가 이완됨으로써, 建中 원년(780) 10월 민간 사무역을 금지하는 당 황제의 칙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무역이 번성하였다. 특히 8세기 중·후반 신라의 정치 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숱한 신라 유이민들이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권을 비롯하여 내륙 수운의 중심지와 중국 연해안지대를 따라 집단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와 발해에서 長安에 이르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산동반도 일대는 고구려계 유민 출신인 李正己 일가가 점유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정치체를 형성함으로써, 발해와 신라를 상대로 한 사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0452)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張保皐의 新硏究≫, 1985;≪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 1997, 201∼211쪽).

 그런데 신라로서는 친발해적인 성향의 이정기가문이 장안으로 통하는 통로를 점유함으로써 불편함이 있었고, 또한 당시 신라 서남해안에는 많은 유이민들과 해운에 종사하는 해상들을 노리는 중국의 해적들이 창궐하여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중국은 지방 번호들을 토벌하고자 하였고, 그 가운데 이정기가(李師道)를 토벌하는 선봉부대인 武寧軍의 고급 장교로 복무하였던 장보고는 元和 14년(819) 2월 토벌을 완수함으로써 공백상태가 된 산동반도 일대의 상권에 대한 모종의 야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야심은 중국 내 주요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신라인들을 하나의 체계하에 편제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신라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처한 문제, 곧 중국 해적들의 신라인 掠賣 문제해결 등의 현안과 맞물려 흥덕왕 3년(828) 4월 장보고를 淸海鎭大使에 임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신라조정으로서는 친신라계의 인물이 장안으로 통하는 관문을 점하는 것이 유리하였고 아울러 신라의 두통거리였던 중국 해적선의 소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장보고로서는 청해진을 설치함으로써 중국 山東半島의 登州 赤山村과 일본 博多를 연결하는 중간 거점을 확보하여 명실공히 동북아 삼국의 교역망을 하나로 엮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0453)李永澤,<張保皐海上勢力에 관한 考察>(≪韓國海洋大學論文集≫14, 1979), 24쪽. 사실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로 신라 서남해안에는 해적의 그림자가 사라지게 되었고, 신라 당은포로부터의 중국 최초의 기항지인 산동반도 등주 적산포 등을 거점으로 하여 중국 河南道의 密州와 海州를 거쳐 淮南道의 楚州·泗州·漣水·揚州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신라의 무역상들을 하나의 교역망에 편제함으로써 당-신라-일본의 교역을 실질적으로 지배 내지 영향력하에 두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0454)李基東, 앞의 글, 215쪽.

 장보고는 당나라에 대해서는「大唐賣物使」, 일본에 대해서는「廻易使」라는 이름 아래 교역사절단을 파견하고 그의 무역선을 交關船이라 일컬었는데, 각각 중국과 일본정부의 용인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장보고의 회역사가 갖고 온「唐物貨物」은 인기가 매우 높아 이를 구매하기 위하여 예약 대금으로서 絁를 무역지점에 미리 납부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 장보고의 교역은 한·중·일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형태라 할 수 있는데, 발달된 신라선을 바탕으로 하여 주로 당나라와 신라, 동남아의 물산을 중계무역하는 轉運의 형태였다.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신라와의 공무역이 중단된 상태에서 선진문물의 수용 창구로서, 신라에 있어서는 왕실 근친에 한정되었던 공무역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반 귀족들의 중국과 동남아 물산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물품 가운데 일부는 궁중수공업장에 들여가 가공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공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興德王陵碑>에 보이는 ‘貿易之人間’은 기실 흥덕왕 자신이 청해진을 설치하여 무역을 장려하였던 측면을 보여준다면, 興德王 敎書에 보이는 사치풍조의 만연에 대한 경계는 자신이 후원하였던 장보고의 활동으로 인하여 외국 물산의 만연과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원리 곧 골품체제의 붕괴에 대한 염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라 집권층에서 바라보는 상반된 두 가지의 태도는, 장보고가 청해진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신무왕을 옹립하고 중앙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정치적 알력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결국 장보고가 문성왕에게 딸을 왕비로 들이려 할 때 중앙 진골귀족들이 신분의 미천함을 이유로 반대함으로써 표출되어 文聖王 3년(841) 그의 피살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장보고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이 기존의 골품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중앙귀족들에 의한 장보고의 숙청은 신라사회의 지배원리 곧 골품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진골귀족들의 자구책이었다.0455)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앞의 책, 125∼126쪽).

 장보고가 피살되었다고는 하나 海商들의 사무역은 그치지 아니하고 군소 해상세력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圓仁이 일본으로 되돌아갈 때 신라 상선을 이용했다는 것이나 일본측 사료에 보이는 신라 상선들에 관한 기사, 그리고 大中 7년(853) 일본 천태종 승려인 圓珍의 입당에 신라인 해상 金良暉·王超의 상선을 이용하였다는 기사, 新羅僧 大通이 景文王 6년(866) 귀국할 때에 廻易使 陳良의 선편을 이용하였다는 사실 등은, 서남해안 지방의 군소 해상들의 활동이 장보고의 몰락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사실 산동반도 등주 지역에는 문성왕 7년(845) 무렵에 신라인 張詠이 勾當新羅所押衙로, 光化 4년(901)에는 金淸이 押衙로 각각 있었으며, 天成 2년(927) 무렵에 신라인 張希巖과 李彦謨 등이 각각 前登州都督長史와 前登州知後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장보고의 사후에도 등주 지역에 신라의 교민사회가 의연히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0456)李基東,<羅末麗初 南中國 여러나라와의 交涉>(≪歷史學報≫155, 1997), 4∼12쪽.

 이들 군소 해상들은 9세기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유력 해상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이 편제됨으로써, 신라말 고려초의 새로운 사회세력인 豪族으로 성장하였다.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松嶽지역의 王建가문과 白州의 正朝 劉相晞, 貞州 포구를 중심으로 한 柳天弓, 羅州의 多憐君, 靈巖의 최씨가문, 壓海島의 能昌, 槥城의 朴述熙와 卜智謙가문, 康州의 王逢規, 蔚山의 朴允雄 등은 나말려초에 해상세력으로서 성장한 대표적인 호족들이었다.0457)鄭淸柱,<호족세력의 대두>(≪한국사≫1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국사편찬위원회, 1996), 82∼90쪽. 특히 이들 세력 가운데 왕봉규와 같은 이는 독자적으로 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하였다.0458)金庠基,<羅末 地方群雄의 對中通交>(≪黃義敦先生古稀紀念 史學論叢≫, 東國大, 1960) 참조. 더욱이 후삼국이 분립하던 당시 왕건과 견훤이 吳越 및 閩國과 교섭한 것은 공식적인 사신왕래보다는 오히려 민간수준에서 진행된 교역과 각종 문물의 수용에 그 의의를 두고 있는 바,0459)李基東, 앞의 글(1997), 12∼22쪽. 나말려초 민간인들이 주도한 대외무역의 융성함을 볼 수 있다.

 결국 후고구려 궁예의 휘하에서 예성강 하구 가까운 정주를 거점으로 서해안을 控制하면서 槥城·羅州·靈巖·珍島 등 서해안 일대의 해상세력가들을 자신의 휘하에 결집하는 데 성공한 왕건은,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장보고 때에 좌절된 해상세력의 중앙 정치무대 진출의 꿈을 달성하였다. 이에 새로 개창한 고려는 어떤 왕조보다도 해상의 이익에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고려시대의 무역은 매우 번성하였으며, 고려의 개창자인 왕건이 웅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예성강 하구는 동북아시아의 국제 무역항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朴南守>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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