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2. 귀족의 경제기반
  • 3) 녹읍과 녹봉

3) 녹읍과 녹봉

 ≪三國史記≫에는 신문왕 9년(689)에 “敎를 내려 內外官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租를 내리되 차등있게 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덕왕 16년(757) 3월조에서는 “內外群官의 月俸을 除授하고 다시 祿邑을 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매년 지급한 租는 祿俸과 같은 의미로서 녹봉이 처음에는 年俸으로 지급되다가 뒤에는 月俸으로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정부는 신문왕 9년 이전에는 관료에게 녹읍을 주었으나, 신문왕 9년부터 경덕왕 16년까지는 녹봉을 지급하였고, 경덕왕 16년 이후에는 다시 녹읍을 주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에 흔히 신문왕 9년 이전의 녹읍을「前期祿邑」, 경덕왕 16년 이후의 녹읍을「後期祿邑」이라고 불러왔다.0488)姜晋哲, 앞의 책, 9∼34쪽.

 식읍이 賞賜의 의미를 갖는데 반하여, 녹읍은 관료의 관직복무에 대한 대가로 지급된 보수로서 祿科의 성격을 지녔다. 녹읍은 縣이나 村 정도의 지역을 단위로 지급되었는데, 그 지급기준은 관등이었다. 상대등이나 중시와 같은 최고의 관직자는 현이나 촌을 녹읍으로 지급받았으나, 하위의 관직자는 하나의 촌락을 여러 명의 관료가 공동으로 지배하는 형식의 녹읍을 반급받았다는 견해가 있다.0489)姜晋哲, 위의 책, 19∼20쪽. 이에 대하여 歲租가 신문왕 9년(689) 이전에도 지급된 것으로 보면서,0490)이는 강수와 김유신의 처에게 歲租를 주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들에게 지급한된 세조는 특별한 공훈에 대한 賞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姜晋哲, 위의 책, 11쪽). 높은 관등을 가진 관료는 녹읍을 지급받고 낮은 관등을 가진 관료는 歲租를 지급받았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0491)盧泰敦은 귀족가문 출신 관원에게는 녹읍을 주었고, 單門寒族으로서 학식이나 행정능력 및 무예로 발탁된 관원에게 준 祿이 歲租라고 보았으며(盧泰敦, 앞의 글, 159쪽), 李喜寬은 대아찬 이상 관위를 가진 관료는 녹읍을 지급받고, 아찬 이하의 관위를 가진 관료들은 歲租를 지급받았다고 보았다(李喜寬,<新羅의 祿邑>,≪韓國上古史學報≫3, 1990, 123∼124쪽). 하지만 大舍 이하의 낮은 관등을 가진 국학의 학생들에게 노거현이 녹읍으로 주어진 사실로 보면,0492)≪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소성왕 원년 3월. 낮은 관등을 가진 관료도 세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녹읍을 반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낮은 관등을 소지한 관료의 녹읍은 공동지배양식을 취하였을 뿐이었다.0493)姜晋哲, 앞의 책, 20∼21쪽.

 녹읍이 공동지배양식을 취하였을 경우에 개별관료에게 분배될 녹읍의 몫은 어떻게 수취되었을까 궁금하다. 또 고급관료에게 지급될 녹읍이 촌을 단위로 하였다면, 大阿湌이 받는 촌의 크기와 伊伐湌이 받는 촌의 규모는 어떻게 차등지워졌는지도 의문이다.

 여기서 식읍이 왕권의 제약을 받아 관료적 지배의 형태로 바뀌어진 것이 녹읍이었다는 견해와0494)姜晋哲,<新羅의 祿邑에 대한 若干의 問題點>(≪佛敎와 諸科學≫, 東國大學校開校80周年紀念論叢, 1987;앞의 책, 68쪽). 식읍이 封戶를 단위로 지급되었다는 견해를0495)李景植, 앞의 글, 136∼139쪽. 참고하면, 녹읍의 지급도 실제로는 호를 단위로 지급된 것이 아닐까 한다. 가령 관등이 높은 관료는 戶數가 많은 촌락을, 관등이 낮은 관료는 호수가 적은 촌락을 지급받거나, 여러 명이 하나의 촌락을 반급받아서 개개인에게 지급된 녹읍의 호수에 해당하는 몫을 수취해갔을 것으로 헤아려볼 수 있겠다.

 그런데 舊族長層에 의한 私的 支配의 전통이 남아 있는 녹읍은 왕권을 중심으로 토지와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지배, 즉 율령제 지배의 관철을 서두르는 통일신라정부의 정책방향과는 상충되는 면이 많았다.0496)姜晋哲, 앞의 책, 69쪽. 또 불균등한 戶나 그것이 집적된 지역을 단위로 하는 녹읍의 지급도 신라 중대의 율령체제의 정비 혹은 관료제의 진전과는 순응할 수 없었다. 즉 녹읍의 지급이 불균등한 戶나 그런 호가 모여서 구성된 촌을 단위로 이루어진 전기녹읍은 관료에게 관등에 따라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祿科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신라정부는 관료제의 발전과는 모순되는 고대적 수취체계에 기초한 녹읍을 폐지하고, 문무관료에게 관료전과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다.

 녹읍에 대신하여 관료가 관직에 복무한 대가로 주어진 녹봉은 관료제적인 보수체계를 담고 있었다. 녹봉은 국가가 백성으로부터 현물을 거두어 관료에게 관등에 따라 지급한 보수체계였다. 아울러 국가가 녹읍을 혁파하고 녹봉을 지급한 사실은 종래의 녹읍에 편제되었던 백성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녹봉의 재원은 백성의 사유지에서 거둔 조세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녹봉의 품목이 米·麥·粟 등이 기본이고 白銀·綾羅·布 등도 지급된 사실을 통해서 보면,0497)李熙德,<高麗 祿俸制의 硏究>(≪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69), 187∼188쪽.
崔貞煥,<高麗 祿俸制의 運營實態와 그 性格>(≪慶北史學≫2, 1980), 132∼140쪽.
신라에서도 백성으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 관료에게 관등에 기준을 두어 일정량씩 지급하였다고 보아도 좋겠다. 따라서 녹봉에 의해 대체된 녹읍에서 관료는 조세와 공물 그리고 역역을 수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녹봉제는 폐지되고 녹읍이 부활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녹읍이 부활된 경덕왕 16년에 바로 州·郡·縣의 명칭이 漢式으로 개정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 앞서 聖德王 21년(722)에는 당의 균전제를 모방한 丁田制가 시행되었으며, 경덕왕 18년에는 중앙관제가 唐式으로 개정되었다. 즉 당시의 전반적인 개혁이 율령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참고하면 경덕왕 16년(757)에 부활된 녹읍이 전기녹읍과 같은 형태로 실시되었을지 의문스럽다. 이러한 의문은 후기녹읍이 전기녹읍과는 다른 보수체계였다고 이해할 때만 그 논리상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럴 경우 후기녹읍은 율령제적 토지지배의 일환으로 실시된 조처였다고 보아야 한다.

 헌덕왕 7년(815)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新羅帳籍을 통해서 보면, 율령제적 지배질서가 촌락사회 깊숙히 관철되고 있음이 확인된다.0498)이러한 이해방식과는 달리, 녹읍이 부활된 배후 사정을 당시 촌락사회에서 깊이 뿌리를 내린 공동체적 관계의 유대가 율령제적 토지지배를 쉽게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분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은 견해도 있다(姜晋哲, 앞의 책, 75쪽). 신라장적에 보면 국가는 율령의 규정에 따라 烟·人·畓·田 그리고 牛馬·桑·栢子木·秋子木 등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재해 놓았다. 또 唐의 균전제에 해당하는 정전제를 실시하고, 그 토지를 烟受有田畓이라 표기했다. 그리고 그 연수유전답의 다과에 따라 9등호제를 실시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촌락을 단위로 計烟數値를 산정해 놓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율령제적 토지지배가 당시 촌락사회 내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

 후기녹읍은 이러한 율령제적 토지지배를 배경으로 하여 연수유전답 위에 설정되었다. 녹읍주들이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토지는 녹읍으로 지급받은 지역에 있는 연수유전답이었다.0499)李喜寬, 앞의 글, 127쪽. 국가는 연수유전답의 다과에 따라 孔烟을 9등호로 구분하고 계연수치를 산정하여 조·용·조의 부과 기준치로 삼았다. 공연의 재산상태가 불균등한 데 비하여 계연이 토지 18결을 단위로 편성된 일정한 규모의 課戶라는 점에서 계연이 후기녹읍의 지급단위로 파악되고 있다.0500)李仁哲,<新羅 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259쪽).
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역사비평사, 1991), 135쪽.
후기녹읍이 계연을 단위로 지급되자 전기녹읍에서 나타났던 戶나 村의 규모가 차이에 따라 생기는 모순이 후기녹읍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다.

 후기녹읍에서는 計烟 幾余分幾戶와 같은 형태로 녹읍의 지급기준이 정하여졌다. 四余分三戶의 녹읍을 지급받은 관료는 신라장적에 보이는 A촌과 같은 크기의 전답을 소유한 촌락을 지급받았으며, 計烟九戶의 녹읍을 지급받은 관료는 신라장적의 B·C·D촌을 합한 크기만큼의 촌락을 녹읍으로 지급받았다. 이처럼 계연을 단위로 녹읍을 지급하게 되자, 불균등한 戶나 그런 호가 모여서 구성된 촌을 단위로 지급된 전기녹읍에서 발생한 모순같은 것은 없어지게 되었다.

 ≪三國史記≫에는 ‘菁州 老居縣을 學生祿邑으로 삼았다.’고 하여,0501)≪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소성왕 원년 3월. 일정한 지역을 녹읍으로 지급하였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학생녹읍으로 주어진 청주 노거현에도 신라장적에 보이는 공연과 계연이 편성되고, 노거현 소속의 각 촌락에도 계연수치가 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국학의 학생수와 노거현의 계연수치를 참작하여 노거현을 학생들에게 지급한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녹읍을 계연이라는 호를 단위로 지급했을 경우에 녹읍의 지배양식은 공동지배의 방식으로 되었을 것이다. 가령 신라장적의 沙害漸村은 田畓의 합계가 164結 12負 4束이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최고관직인 門下侍中에게 지급된 田柴科 100결(田) 50결(柴地)보다 더 많은 액수이다. 따라서 신라의 경우에도 각 행정관부의 장관이나 장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촌 단위에도 이르지 못하는 액수의 녹읍을 받았다고 짐작된다. 이에 자연히 녹읍의 지급은 촌보다 더 적은 호를 단위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하나의 촌락에 여러 명의 녹읍주가 생겨나게 되고, 녹읍의 지배방식은 공동지배로 되었다.

 녹읍을 공동으로 소유한 녹읍주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녹읍의 戶數 즉, 計烟數에 따라 수익을 분배하였다. 계연이 조·용·조에 모두 적용되었으므로, 녹읍주는 자연히 녹읍으로 지정된 호에서 租稅·力役·貢賦를 수취하였다.0502)이에 대하여 일찌기 收租權 이외에 노동력까지 지배하였다고 보는 견해(金哲埈, 앞의 글, 236∼239쪽)와 수조권은 물론 貢賦·力役까지 포함한 일체의 수취가 수급자에게 흡수되었다고 보는 견해(姜晋哲, 앞의 책, 17∼36·51∼74쪽)가 있다. 이와는 달리 녹읍주에 의한 녹읍의 지배는 土地支配(租의 수취)를 제외한 戶口에 대한 지배(노동력의 징발)와 樹木에 대한 지배(貢賦의 수취) 그리고 牛馬에 대한 지배(飼育의 강제)가 주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木村誠,<新羅の祿邑制と村落構造>,≪歷史學硏究≫別冊「世界史の新局面と歷史像の再檢討」, 1976, 19쪽), 계연이 녹읍의 지급기준이었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明石一紀,<續·統一新羅の村制について>,≪民衆史硏究≫13, 1975, 17쪽). 후자는 계연수치가 租·調를 제외한 役丁에 기준을 두었다고 보아 녹읍의 수급자는 역정의 使用權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연은 조·용·조 전반에 적용되었다고 봄이 옳다. 아울러 녹봉을 대신하여 녹읍이 지급되었다는 점에서도 녹읍으로 지정된 호에서 녹읍주가 租稅를 수취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후기녹읍이 율령체제에 입각한 군현제적 지배를 전제로 해서 지급되었다는 사실은 녹읍주의 역역에 대한 지배가 전기녹읍의 그것에 비해 훨씬 미약하였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신라 말기로 접어들면서 녹읍주들의 탈법적인 노동력 착취는 오히려 증가하였고, 그것이 사회혼란의 중요 원인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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