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3. 농민의 생활
  •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2) 촌락과 농민의 지위

 신라 통일기에 촌을 직접 지배하는 지방행정조직으로는 領州, 州의 領縣, 영현이 없는 郡, 郡治로서의 郡, 郡의 領縣, 小京 그리고 鄕과 部曲이 있었다. 촌은 이들 지방행정조직을 통하여 중앙정부와 연결되고 있었다.

 신라장적에 기록된 村周를 통해서 보면, 중앙에서 가장자리까지 거리가 1.376㎞에서 3.677㎞정도였다. 촌의 지름은 2.752㎞에서 7.354㎞가 된다. 원의 중심부에 촌이 자리잡았다면, 촌과 촌간의 거리는 4㎞ 정도가 된다. 그러나 촌과 촌 사이에는 어느 촌에도 속하지 않은 지역이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6㎞정도의 간격을 두고 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름이 3㎞에서 5㎞(반지름은 1.5㎞에서 2.5㎞정도)되는 촌역 안에는 가옥과 경작지 그리고 임야 등이 있었다. 이처럼 촌락간의 거리가 멀고 촌역이 넓었기 때문에 당시의 농민은 다른 촌락의 농민과는 소원한 관계였고, 촌락내에서 대부분 인간관계를 다지며 생활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촌의 戶數는 孔烟을 자연호로 보면, 신라장적에 보이는 촌은 각기 A촌이 11호, B촌이 15호, C촌이 11호, D촌이 10호였다. 그러나 공연이 자연호가 몇 개 합쳐져서 편성된 편호였다고 보면, A촌은 29호, B촌은 25호, C촌은 14호, D촌은 24호 정도의 촌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0536)李泰鎭, 앞의 책, 36∼37쪽. 이들 촌의 戶數를 평균 30호로 보고, 1호가 차지하는 주거지가 200평 정도였다고 하더라도, 취락이 촌역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1결 정도밖에 안된다.0537)姜晋哲의 견해에 따르면, 1결은 6,806평이다(姜晋哲,<田結制의 問題>,≪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371쪽). 따라서 촌역의 대부분은 논·밭·목초지·습지·하천·임야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 전체를 둘어싼 토담이나 환호는 없었다. 대신에 촌 주변의 야산에 土城 혹은 石城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에는 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산으로 올라가 城을 방어수단으로 하여 적에 대항하였다. 성을 단위로 한 방어전에는 法幢이 편성된 최소의 단위가 縣이었던 점을 참고하건데,0538)李仁哲, 앞의 책, 304∼313쪽. 1개 현에 속한 촌들이 공동으로 적에 대항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신라장적에 기재된 개별 촌은 자연촌이면서 동시에 행정촌이었다. 국가가 개별 자연촌을 행정상으로 파악하여 문서로 작성하였고, 조·용·조와 군역의 수취를 위한 9등호제와 계연수치를 자연촌별로 완결지어 계산해 놓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자연촌 자체를 하나의 행정촌으로 파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0539)장적에 기록된 촌을 自然村으로 보고, 몇 개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진 행정촌에는 村司가 있고, 內視令·村主·軍師 및 屬官 등이 촌사를 구성하고 촌락행정을 맡아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李鍾旭,<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時代의 村落支配體制>,≪歷史學報≫86, 1980, 11∼54쪽). 그러나<신라장적>에는 當縣□□□村이라 하여 자연촌락 자체가 이미 행정촌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종래의 행정촌 개념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浜中昇,<統一新羅의 家族과 村落>, 앞의 책, 20쪽). 중국사에서도 行政村이란 국가가 조세징수·치안유지 등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作爲的으로 구성한 촌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松本善海,≪中國村落制度の史的硏究≫, 岩波書店, 1977, 193∼195쪽). 장적에서 A촌의 촌주는 국가가 행정촌으로 파악한 A촌만의 촌주였다. 이에 촌주위답이 없는 촌에는 촌주가 본래 임명되지 않고, 촌주가 임명된 촌을 통하여 현의 통제를 받았다.

 신라장적을 통해서 보면 3∼4개 촌 가운데 한개의 촌에만 촌주가 있었다. 따라서 촌주가 관할하는 일정한 행정구획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촌주가 3∼4개 촌을 관할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竅興寺鐘名>에 보면, 현에 上村主·第二村主·第三村主라는 3명의 촌주가 있었다. 신라장적에 3∼4개 촌 가운데 한명의 촌주가 있는 점을 감안하여, 1명의 촌주가 3∼4개 촌을 관할하였다고 보면, 1개 현에는 9∼12개의 촌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현의 넓이를 고려하더라도 1개 현에 12개 촌 이상의 촌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라장적에 보이는 촌의 넓이는 오늘날 面의 3분의 1 정도이다. 따라서 촌주가 관할하는 범위는 행정촌 3∼4개 정도로서 오늘날의 면 정도 넓이였다. 촌주는 縣에서 公等이 파견되어 나와 烟을 조사하여 장적을 작성할 때 공등을 도와주었다. 또 현으로부터 하달된 국가의 명령을 村民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현을 통하여 촌의 변동사항을 국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또 촌주는 조세수취를 도와주기도 하고 역역동원에 촌락민의 대표가 되기도 하였다.

 신라장적은 율령제적 농민지배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장적 역시 율령의 규정에 따라 작성되었다. 이에 장적에 기재된 농민 또한 율령제국가의 公民이었다. 장적에서는 이들 농민을 良人과 奴婢로 나누어 기재하였다.≪三國史記≫색복지에서는 4두품 아래의 양인을 平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장적에 보이는 대부분의 농민은 관직으로 진출이 제한을 받았다는 점에서 平人으로 볼 수 있다. 평인이 아닌 신분으로는 노비와 촌주가 있었다. 촌주는 4두품 내지는 5두품의 신분적 대우를 받는 존재였다. 같은 촌이라고 하더라도 州郡縣 혹은 小京의 직속촌에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4두품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 軍官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촌은 地方官司가 설치되지 않은 촌이었다. 따라서 신라 통일기의 촌락민은 대부분 신분적으로 평인이고 직업상으로는 농민이었다.

 신라 골품제사회에서는 4두품 이상의 신분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平人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율령에 명시된 골품제의 규정에 따라 농민은 피지배신분층으로 고정되었고, 그 신분은 세습되었다. 하지만 평인농민은 양인의 주요 구성 성분으로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노비를 비롯한 賤人이 토지나 재물을 소유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평인농민이 가진 소유권은 분명히 하나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신라정부는 평인농민에게 토지를 포함한 재산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대신에 그들로부터 조·용·조와 군역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적·군사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군사적 자원을 공급해주는 계층이 농민이었으므로, 국가는 이들 농민의 동태를 상세히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신라장적은 국가가 이들 농민의 출생·사망·전출·전입 등을 일일이 파악하여 기재해 놓았을 뿐 아니라 농민에게 신고의 의무까지 부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장적에는 농민 가운데 촌에서 도망친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촌민들이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국가가 평인의 거주이전을 극도로 제한한 데 따른 현상이다. 국가가 평인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한 이유는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켜 놓고, 그들로부터 조·용·조와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골간으로 하여 국가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라장적에 보이는 연수유전답과 수취체계의 구명이 당시의 농민의 지위를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연수유전답」이란 ‘烟이 받아서 가진 전답’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연에게 전답을 지급한 주체는 국가로 해석된다. 국가가 토지를 지급하였다고 볼 경우에 떠오르는 사항은 성덕왕 21년(722)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丁田을 지급하였다’고 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隋唐의 均田制를 연상하게 하지만, 신라에서는 균전제가 실시되지 않았다.0540)浜中昇,<統一新羅における均田制の存否>(≪朝鮮學報≫105, 1982;앞의 책, 88∼120쪽).

 신라에서는 국가의 모든 토지가 王土로 인식되기는 하였으나, 개별 토지의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었다. 신라의 토지제도가 토지사유제였다는 사실은<崇福寺碑文>이나<海印寺田庄文書>그리고<開仙寺石燈記>에 보이는 田券 등에 잘 나타나 있다.0541)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앞의 책), 175∼207쪽. 이처럼 토지국유제가 실시되지 않았음에도 백성의 私田을 연수유전답이라 하여 국가가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한 것처럼 신라장적에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은 백성이 조상대대로 경작해오던 토지에 대하여 국가가 나누어주는 형식을 취하면서 어떤 法制的 認定節次를 취하였음을 나타낸다.0542)姜晋哲,<韓國土地制度史>上(≪韓國文化史大系≫2, 高麗大, 1965, 1202∼1220쪽; 앞의 책, 1∼17쪽). 따라서 어떤 법제적 인정절차를 거쳤는가 하는 문제가 丁田制 곧 연수유전답의 실체 구명에 핵심을 이루고 있다.

 ‘烟受有’라 하여 ‘受有’의 대상이 烟으로 되어 있음은 정전제에서 土地支給對象이 戶였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정전제는 丁을 대상으로 한 토지지급이 아니라 丁戶를 대상으로 토지의 지급이 이루어진 토지제도였던 것이다. 즉, 孔烟이 국가로부터 받아 가진 토지가 연수유전답이었다. 공연은 자연호가 아니라 몇 개의 자연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編戶였다.0543)李泰鎭, 앞의 책, 25∼42쪽. 국가는 편호로 이루진 공연을 단위로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토지소유권을 인정해주었다.

 신라정부는 공연의 소유토지에 근거를 두어 9등호제를 실시하고 호등에 따라 조·용·조와 군역의 수취체계를 마련하였다.0544)李仁哲, 앞의 책, 231∼259쪽. 이에 따라 농민은 공연을 단위로 국가로부터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토지소유권을 인정받는 대신에 조·용·조와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공연에 부과되는 조세는 지주가 부담하였지만, 역역과 공부 그리고 군역은 佃戶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정전제를 신라정부가 실시한 데에는 일정한 목적이 있었다. 우선 자연호를 합쳐서 공연을 편성하여 한시적이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토지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해줌으로써 넓은 면적의 토지를 기반으로 농민생활이 전보다 안정되고 재생산기반이 확충되도록 하였다. 아울러 편호로서의 공연은 농민이 개별 자연호로 있었을 단계보다 토지를 처분하고 촌에서 이탈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정전제 실시의 목적은 토지의 지급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을 될 수 있는 대로 농토에 묶어 놓고, 국가가 원하는 조·용·조를 수취하고 軍役을 부과하여 국가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정전제의 실시로 농민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에 실제적인 변동이 일어난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정전제의 실시로 모든 농민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반급받아 자영농민이 되지도 않았고, 신라장적에 나타나는 농민이 모두 자영농도 아니었다. 농민 가운데는 자영농도 있고, 소작인도 있으며, 남의 집에 가서 용작을 하는 사람도 있고 노비도 있었다. 당시의 촌에는 9등호제로 구분된 토지소유의 불평등 이상으로, 자연호의 토지소유가 불평등하였다. A촌의 촌주와 같은 이는 19결 70부의 토지를 소유하였는가 하면, 촌에서 무단으로 도망치는 호구들은 無田農民이었다. 그러므로 촌민은 같은 백성 혹은 평인이라고는 하지만, 토지소유나 소득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즉 같은 평인층 가운데서도 사회계층의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 통일기의 촌은 血緣集團의 성격을 다분히 가지면서도0545)旗田巍, 앞의 책, 420쪽. 계층분화가 상당히 진전된 地緣集團이었다고 생각된다.0546)崔吉城, 앞의 글, 39∼40쪽.

 그러면 당시의 농업생산 실태는 어떠하였고, 농민의 소득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三國史記≫나≪三國遺事≫등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신라시대의 농작물로는 벼·보리·콩·조·기장·채소류·잣·호도·살구·복숭아·배·밤·대마·잠사·저마·호마(참깨와 검은 깨)·들깨·인삼 등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농민의 실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주요 작물은 벼·보리·콩이었다. 당시의 농업생산은 가뭄·홍수·바람·서리·우박 등 기후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해충의 피해로도 그 생산성이 떨어졌다. 당시 농업생산을 감소시킨 중요한 요인은 대부분 가뭄과 해충의 피해였다.≪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가뭄의 피해가 가장 컸던 모양이다. 신라정부는 가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전주의 碧骨堤나0547)≪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6년. 영천의 菁堤의 증축에서 보는 바와 같이,0548)李基白,<永川 菁堤碑貞元修治記의 考察>(≪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80∼294쪽. 저수지를 비롯한 수리시설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수리시설이 전체적인 농경면적에 비해 너무 적어서 거의 모든 수전경작이 天水에 의존하였다.

 토지는 지력이 낮아 휴한법에 의하여 농경이 이루어졌다. 종자의 파종은 이앙법이 보급되지 않아 직파법으로 행해졌다. 농기구로는 보습·쟁기·따비·괭이·쇠스랑·낫·살포·자귀·도끼·호미 등이 사용되었다.0549)김광언,<신라의 농기구>(≪민족과 문화≫1, 한국문화인류학회, 1988), 43∼84쪽.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이용은 신라 통일기의 농업생산성을 그 이전에 비하여 크게 증대시켰다. 그럼에도 당시의 농업생산성은 여전히 낮았다. 농민은 흉년이 들지 않는 해에 한해 식량조달이 겨우 가능하였고, 만일 흉년이라도 들면 당장 식량부족현상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뭄이 들거나 벼멸구의 피해가 있는 해에는 그 해 10월이나 이듬해 봄에 백성이 굶주리게 되어 정부에서 진휼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도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기록이≪삼국사기≫에서 산견되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흉년이 든 해의 겨울이나 봄에 백성이 굶주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식량생산 사정은 한전과 수전의 생산량이 각기 6개월분의 식량 정도밖에 조달할 수 없었다고 판단된다.

 당시 대부분 농민은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먹고 살았다.0550)韓致奫,≪海東繹史≫권 26, 穀類. 고추가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 음식물을 조리하는 데 있어 간장·된장·소금·마늘 등이 가장 중요한 조미료였다. 그러나 이러한 식생활도 흉년이 들지 않고, 귀족세력으로부터 식량을 수탈당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가능하다. 흉년이 들게 되면, 굶주리다 못하여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나,0551)≪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16년. 자식을 팔아서 생활하는 자가 있었다.0552)≪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50년 및 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13년. 그런가 하면 효녀 지은처럼 스스로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0553)≪三國史記≫권 48, 列傳 8, 孝女知恩. 남의 집에 가서 傭作을 하거나,0554)≪三國遺事≫권 5, 孝善 9, 眞定師孝善雙美·大成孝二世父母 神文代·孫順埋兒 興德王代. 食客이 되어 먹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0555)盧泰敦,<羅代의 門客>(≪韓國史硏究≫21·22합집, 1978), 25쪽.

 정전제는 외관상으로는 공연의 토지소유에 근거하여 조·용·조와 군역의 수취체계를 수립한 탓에 자영농을 대상으로 한 토지소유권의 인정과 부세체계의 수립을 기본구도로 하고 있었다. 신라정부는 정전제의 실시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농민을 자영농화하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정부가 구상한 정전제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촌사회에서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면서, 가난한 농민 가운데는 그들의 전답을 파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던 중앙의 귀족이나 지방의 호족들은 토지를 집적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智證大師가 헌강왕 5년(879)에 자기의 私財인 莊 12區, 田 500結을 사찰에 희사했다거나,0556)<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93쪽. 大安寺의 田畓이 494결 39부이고 柴地가 143결, 鹽盆이 43결이었다던가 하는 사실이0557)<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0쪽. 바로 당시의 대토지소유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토지소유 현상은 상대적으로 소규모 자영농의 몰락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신라의 정전제에서는 대토지소유를 용인한 채 공연이라고 하는 편호를 구성하고, 토지소유에 따라 구분된 9등호제에 기준을 두어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하였기 때문에 토지소유자가 부담해야 할 일체의 조세가 점차 소작인 등의 토지경작자에게 전가되었다. 지주와 전호를 묶어서 편성한 공연은 가난한 농민에게 가중한 부담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이제 가난한 소농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소작을 하지 않고 小農끼리 하나의 공연을 구성하여 조·용·조와 군역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었다. 신라장적에 하하연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으로 파악된다. 그보다 형편이 나쁜 농민은 아예 노비가 되거나 유리걸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는 현상은 정전제가 붕괴되어짐를 의미한다. 정전제는 농민을 공연으로 편제하여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용·조와 군역을 부가하는 것이었는데,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유리걸식하는 현상은 공연의 편제 자체가 불가능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토지에서 이탈해간 농민의 몫까지 촌에 남아 있는 농민이 조·용·조와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토지소유에 바탕을 둔 조세는 촌에 남아 있는 농민이 그래도 부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농민이 촌락에서 이탈한 상황에서 力役·貢賦·軍役의 의무는 그 이행이 전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국가는 여전히 개별 촌의 계연수치를 근거로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하였다.

 토지에서 이탈하지 않고 촌에 남아 있는 농민에게도 정전제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수취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항쟁하지 않으면 않될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성여왕 3년(889)에 정부가 貢賦를 독촉하니 도적이 벌떼와 같이 있어났다고 하는 이른바 농민항쟁은 바로 그러한 상황의 도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말 수취체계의 구조적 모순은 신라정부에 의해 해소되지 못하고 고려정부에 의하여 개선되었고, 농민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李仁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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