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장식은 頭飾과 冠帽로 나눌 수 있다. 남자의 머리 형태는 小人은 묶은 머리이고 大人은 상투머리형이었다.
남자의 대표적 관모로는 幞頭와 弁이 있으나 禁制에는 복두에 대한 것만 나와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복두 외에도 다른 여러 종류의 관모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복두에 대해서는 그 만든 직물에 관한 금제가 있는데, 진골대등은 어떤 직물로 만든 복두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6두품은 繐羅0581)매우 얇게 짠 고급 무늬비단.
참고로 색복지에 나오는 신라 직물을 귀중도에 따라서 그 대강을 열거하면 布-綿紬-絹-絁-紗-綾(中小文綾·小文綾)-羅(昇天羅·越羅·繐羅·野草羅·布紡羅·繡羅)-錦(繡錦)-罽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絁·絹0582)굵은 실로 성기게 짠 비단.·布로 만든 것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5두품은 羅0583)매우 얇은 비단.와 시·견·포로 만든 것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4두품은 紗0584)엷은 透織으로서 지극히 곱고 가벼운 비단.·시·견·포로 만든 것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평인은 견0585)매우 얇고 성기게 무늬없이 짠 비단.·포로 만든 것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복두의 모양은 唐制를 습용했을 당시에는≪宋史≫輿服志에 나오는 紗·羅 등의 직물로 만들어 下垂帶를 한 것과 같았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高麗圖經≫에 貴人의 복두는 兩帶이고 庶民은 四帶여서 서민은 양대복두를 보면 피한다고0586)≪高麗圖經≫권 19, 農商. 하였으므로, 고려시대 귀인은 이 兩脚이 옆으로 下垂한 복두를 착용하였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복두는 처음에는 뒤로 대를 내렸을 뿐, 옆으로 뻗치는 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고려시대·조선시대에까지 전승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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