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3) 신라상인에 의한 무역의 전개

 779년 이후 신라가 사신파견에 의한 공적인 무역을 포기한 것은 신라상인의 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조정도 8세기 후반부터 신라상인들이 일본에 많이 왕래하자 굳이 신라·당과의 공적인 무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768년 稱德(쇼우토쿠)天皇은 좌우대신 등 고위관료와 황족에게 신라 交關物을 사도록 총액 85,000屯의 大宰綿을 지급하고 있는데,0738)≪續日本紀≫권 29, 神護慶雲 2년 10월 갑자. 이는 신라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교역체제를 일본조정이 인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0739)東野治之,<鳥毛立女屛風下貼文書の硏究>(≪正倉院文書と木簡の硏究≫, 塙書房, 1977), 305쪽. 이즈음에는 대재부 부근에 신라인과 무역을 하는 상인층이나 商圈이 형성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조정은 774년에는 신라인이 표착하였을 경우에 배를 수리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표류민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서 신라상인들의 왕래를 장려하였다.0740)≪類聚三代格≫권 18, 夷俘幷外蕃人事, 太政官符(應大宰府放還流來新羅人事). 신라인들이 일본에 많이 왕래하자 815년에는 對馬島에 신라어 통역까지 설치하였다.

 9세기에 신라인 상인층은 당과 일본을 중계하는 무역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그 상인층은 在唐신라인이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0741)石井正敏,<10世紀の國際變動と日宋貿易>(≪アジアからみた古代日本≫, 角川書店, 1992), 347∼348쪽.
李炳魯, 앞의 글(1996b), 256∼260쪽.
신라인들은 산동반도의 登州, 양자강구와 長安, 洛陽을 연결하는 대운하에 연해있는 楚州·泗州와 같은 상업경제의 요지에 거류지 新羅坊을 형성하였는데, 이 신라방에서는 일종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재당 신라인들은 상인조직을 이루어 일본의 견당사나 입당승들이 일본에 귀국할 때에 동행하여 무역을 하면서, 당·신라·일본 삼국간 무역에 의해 蓄財를 하였다.

 840년에는 삼국간 무역을 장악하면서 반자립적인 해상세력으로 성장한 장보고가 부하 李忠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과 조공 형식의 공적인 교역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0742)浦生京子,<新羅末期の張保皐の擡頭と反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60쪽. 일본조정은 신라왕이 파견한 사신 이외에는 공식사절로 대접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李忠이 가지고 간 물건은 민간교역을 허락하였고 그에게 식량을 주도록 하였다.0743)≪續日本後紀≫권 9, 承和 7년 12월 계묘삭 기사·권 10, 承和 8년 2월 임인삭 무진. 이러한 조치는 일본조정의 일관된 입장으로, 무역은 확보하지만 타국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으려는 방위적인 성격의 것이었다.0744)石上英一,<古代國家と對外關係>(≪講座日本歷史≫2, 東京大學出版會, 1984), 260∼261쪽. 일본조정은 9세기 중엽 이후 외국사절이 아닌 商客에게도 客館을 사용하도록 하여, 조정이 대금을 지불할 때까지 공적인 시설에서 상객이 체재하도록 하였다.0745)田島公,<大宰府鴻臚館の終焉>(≪日本史硏究≫389, 日本史硏究會, 1995), 24쪽.

 일본에서 신라와의 교역에 종사한 것은 平安京(헤이얀쿄우)의 귀족들이 중심이었지만 재지유력농민과 지방관도 있었다. 筑前守로 재임하던 840년에 장보고와 거래가 있었던 文室宮田麻呂(훈야노미야타마로)는 임기 후에도 현지에 남아 무역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신라상인의 물품을 국내에서 매각하였을 뿐 아니라, 絁를 미리 건네주고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고 있다. 宮田麻呂는 기내에 광대한 영지와 平安京과 瀨戶(세토)內海의 교통 요지인 難波(나니와)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제력의 바탕에는 그가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도 크게 작용하였다.0746)戶田芳實,≪日本領主制成立史の硏究≫(岩波書店, 1967), 136쪽.

 한편 신라상인들이 일본을 왕래하자 일본인들의 경계심도 고양되어 신라인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812년에 신라 해적선의 대마도 출몰사건이 보고되자, 일본조정은 신라 인근지역들에 신라에 대한 경계와 방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0747)≪日本後紀≫권 22, 弘仁 3년 정월 경신삭 갑자. 835년에는 대재부의 건의로 壹岐(이키)國의 전략상 요소 14개소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였고, 843년에는 대마도의 경비를 강화하고 849년에는 弩兵을 배치하였다.0748)≪續日本後紀≫권 4, 承和 2년 3월 병오삭 기미·권 13 承和 10년 8월 정사삭 무인·권 19, 嘉祥 2년 2월 경술.

 842년 이후 교역을 위해 일본을 왕래하는 신라인들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즉 842년 8월 대재부 大貳 藤原朝臣衛(후지와라노아손마모루)가 신라상인들이 사실은 일본을 정탐하기 위해 일본을 왕래하는 것이라면서 신라인들의 일본 입국을 금지하도록 조정에 요청하였다.0749)≪續日本後紀≫권 12, 承和 9년 8월 임술삭 병자. 이것은 신라상인의 활발한 왕래가 일부 대재부 관리들로 하여금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한 것을 말해준다.0750)佐伯有淸,<九世紀の日本と新羅>(≪古代の政治と社會≫, 吉川弘文館, 1970), 299쪽. 이러한 보고에 대해 일본조정은 종래의 ‘歸化’사상을 내세워, 신라인의 왕래를 막을 수 없음을 표명하고 있다.0751)≪類聚三代格≫권 18, 夷俘幷外蕃人事, 承和 9년 8월 15일 태정관부(應放還入境新羅人事).
≪續日本後紀≫권 12, 承和 9년 8월 임술삭 병자.

 9세기에 신라상인들이 활약하면서 일본에 표착하는 신라인들도 많아지는데, 일본조정은 표착한 신라인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귀국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식을 주어 귀국시켰다. 834년 대재부 해안에 도착한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여 상처입히자, 仁明(닌묘우)조정은 대재부 관리를 책망하고 신라인들을 치료하고 양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0752)≪續日本後紀≫권 3, 承和 원년 2월 임오삭 계미. 표착한 신라인 중에서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어 신라에 돌려 보내는 일본정부의 정책은 9세기 후반에도 계속되었다. 즉 856년에는 표착한 신라인 30명을 식량을 주어 돌려 보내고,0753)≪日本文德天皇實錄≫권 8, 齊衡 3년 3월 임자. 863년과 864년에는 博多津에 표착한 승려 3명과 丹後國에 표착한 신라상인 57명, 石見國 美乃郡에 표착한 신라인 24명에게 양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0754)≪日本三代實錄≫권 7, 貞觀 5년 4월 21일 계축·11월 17일 병오 ; 권 8, 貞觀 6년 2월 17일 갑술. 869년에도 對馬島에 표류한 신라인 7명에게 식량을 주어 돌려 보냈다.

 이것은 일본인이 당을 왕래하거나 신라에 표착한 경우에 신라의 협조를 배려한 정책이었다. 신라선의 우수성과 신라의 남쪽을 통과해야 하는 항로 때문에, 당에서 귀국하는 일본사신이나 승려들은 신라선을 임대하여 항해에 익숙한 신라인을 고용하여 귀국하는 일이 많았다.0755)≪續日本後紀≫권 8, 承和 6년 8월 경술삭 기사·권 13, 承和 10년 12월 계해·권 18, 承和 15년 3월 경신삭 을유. 845년 일본인이 신라에 표착하였을 때, 신라정부도 표류한 일본인을 돌려 보내고 있다.0756)≪續日本後紀≫권 15, 承和 12년 12월 갑술삭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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