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3) 남방해로

(3) 남방해로

 신라가 통일 이전에 당은포를 이용하여 중국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비단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0781)≪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권 4., 眞平王 47년 11월 및 권 5, 新羅本紀 5, 善德王 11년.라는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王都인 경주가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하여 당과의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가탐이≪도리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에서 남양만에 이르러 다시 경주까지 가려면「陸行七百里」라는 노정에다 험준한 추풍령도 넘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적지 않은「國信物」을 지닌 사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역을 주업으로 하는 상인들도 험한 육로를 통한 수송에는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은 羅唐 양국간의 교통불편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행로와 수송능력면에서 월등히 나은 선편이 자연스럽게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영일만이나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뱃길을 서북쪽으로 돌려 산동반도로 항해하거나0782)≪唐國使補≫下, 元義方使新羅. 서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長江口나 남중국으로 직항하는 해로가 이용되었다. 이 강남에 이르는 항로의 중국측 중심 해항은 明州 定海縣, 台州 黃岩縣, 揚州, 泉州, 廣州 등이며 우리 나라측에서는 武州(光州)·羅州·全州·康州(晋州)가 이용되었다. 徐兢의≪宣和奉使高麗圖經≫과≪宋史≫高麗傳에 나오는 노정이 곧 이 해로에 해당된다.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梅岑(昌國縣)에서 白水洋(浙江沿岸 海中)·黃水洋(長江口의 濁水바다)·黑水洋(黑潮해역)을 지나 夾界山(小黑山島)·排島(珍島 동쪽바다 섬)·黑山(黑山島)에 도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나주·群山·인천·강화도를 지나 禮成江에서 開京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서긍 일행은 5월 28일에 매잠을 출발하여 3일 뒤인 6월 2일에「華夷」의 경계라던 협계산에 도착하였고, 3일 오후에는 흑산도에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계절풍을 이용하면 명주에서 불과 5일 만에 흑산도에 도달한다.≪續資治通鑑長編≫에도 고려사행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명주를 출발하여 4일 만에 흑산도에 이르고 있다.0783)≪續資治通鑑長編≫권 339, 元豊 6년 9월 경술. 建炎 2년(고려 仁宗 6년, 1128) 楊應誠 등의 사행길은 5일째 되던 날 명주 정해에 도착하고 있다.≪송사≫고려전에도 명주 정해를 출발하여 순풍을 만나면 5일 만에 흑산도에 이르며, 7일째에는 예성강에 이른다고 했다. 이 항로가 대체로 통일신라 이후 고려초에 이르는 기간동안 많이 이용되었던 이유도 알 만한다.

 ≪南齊書≫권 58, 東夷傳에 보면 加羅國王 荷知(鉗知)가 建元 원년(479)에 남제(479∼501)로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金海지방의 나라가 백제(484)에 앞서서 단독으로 남제와 통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황해를 직접 횡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승 覺德이 梁(502∼556)으로 건너갔을 때나 또 그가 진흥왕 10년(549)에 양의 사신과 함께 佛舍利를 가지고 왔을 때도 이 남방항로를 이용했음이 분명하다.0784)≪海東高僧傳≫권 2, 覺德. 진흥왕 26년에 남조 陳(557∼589)의 사신 劉思와 함께 經論 1,700여 권을 가지고 온「入學僧」 明觀도 필경 이 항로를 따라왔을 것이다.0785)≪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26년.

 신라가 중국 제왕조에 대한 이른바 조공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이 남조의 진부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남방항로를 보다 많이 활용하였을 것이다. 진과의 교역은 진흥왕대만 해도 전후 4차나 되었으며 眞智王(576∼578)·진평왕(579∼631)대에 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진평왕 7년(585)의 고승 智明의 入陳이나 9년의 大世와 仇柒의 이야기078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7년·9년.도 남방해로로 남중국의 吳·越에 이르렀던 당시 신라사람들의 정황을 반증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圓光法師가 선편으로 金陵(南京)에 직항한 기록은0787)≪續高僧傳≫권 13, 釋圓光.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미 남방항로를 통하여 남조와 왕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이 뱃길이 활발히 이용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에서 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安史의 난(755∼763) 이후 江南지역의 경제성장과 揚州를 비롯한 남중국의 廣州·福州·杭州·明州·泉州 등 제항구가 국제항으로 크게 번창한 까닭이기도 하다. 중세기의 이슬람·아라비아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 남중국과 양주까지 무역시장을 개척하고 서방의 문물을 다량으로 가지고 온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파는 당과 정치·경제·문화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신라에 미쳤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 지역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憲德王 8년(816) 흉년이 들자 신라인 170명이 당의 浙東(남중국 절강 동쪽)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하였던 사실0788)≪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8년.은 이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남방항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唐會要≫에는 望海鎭(명주 정해현)이 일찍부터 신라 원항선박의 중요한 발착항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0789)≪唐會要≫권 78, 諸使 雜錄 上 元和 14년(819). 뿐만 아니라≪輿地紀勝≫에는 명주 창국현의 梅岑山은 고려·신라·발해·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라 하고 있다.0790)≪輿地紀勝≫권 11, 兩浙東路 慶元府 明州 景物 下. 그리고≪續日本後紀≫에 보면 신라상인들이 康州(廣州)에 표류한 일본인 50여 명을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0791)≪續日本後紀≫권 15, 承和 12년(845) 12월 5일. 신라인들이 남방항로를 따라 중국에 진출하였던 좋은 예라 하겠다.

 신라말에 오면 이 남방항로는 더 많이 이용된다. 그것은 북중국에 契丹족이 등장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이 항로를 이용하는 선원들은 이미 계절풍과 해조의 흐름을 잘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많은 신라승의 入唐과 귀국의 기록을 보면 서북풍이 부는 10월∼2월에 중국으로 출발하여 서남풍이 부는 3월∼8월에 귀국하고 있다. 여주 高達寺 元宗大師도 眞聖王 6년(892) 늦겨울에 상선으로 남중국의 舒州 桐城縣(安徽省 桐城縣)에 도착하였고 景明王 5년(921) 7월에 강주(진주) 德安浦를 거쳐 귀국했다.0792)≪朝鮮金石總覽≫上 항해기간도 놀라울 정도로 단축되었다. 앞서 본≪고려도경≫이나≪송사≫고려전의 기록처럼 5∼6일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眞澈大師(利儼, 866∼932)의 탑비에는 그가 진성왕 10년(896) 入浙使 崔藝熙와 함께 ‘不銷數日’에 鄞江(寧波)에 도착하였고 孝恭王 15년(911)년에 나주 會津으로 환국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0793)≪朝鮮金石總覽≫上.
≪海東金石苑≫권 3.
계절풍을 잘 이용한 항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聞慶 鳳巖寺의 靜眞大師도 효공왕 4년(900)에 상선을 타고 江淮부근에 도착하였고 景明王 8년(924) 7월에 전주 喜安縣 포구로 귀환하였다.0794)≪朝鮮金石總覽≫上.
≪海東金石苑≫권 4.
光陽 天龍寺 洞眞大師는 眞聖王 6년(892) 늦겨울에 출항하여 경명왕 5년 여름철(7월)에 전주 臨海郡에 귀착하였다.0795)위와 같음.

 五龍寺의 法鏡大師는 효공왕 12년 7월에, 砥平 菩提寺의 大鏡大師는 같은 왕 13년 7월에 武州(광주)의 會津과 昇平에 귀한하고 있다. 많은 승려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늦겨울에 중국으로 가서 여름철(7월)에 무주·전주·강주나 나주 방면으로 돌아오고 있다. 물론 계절풍과 관계있는 결과이다. 後百濟王 甄萱과 吳越 등 제국과의 빈번한 왕래는 이 항로의 계속적인 이용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는 예라 하겠다.0796)金庠基,<羅末地方群雄의 對中交通 -特히 王逢規를 중심으로->(≪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84), 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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