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2) 해외무역
  • (4) 이슬람과의 교역

(4) 이슬람과의 교역

 신라의 무역에서 특기해야 할 일은 아라비아·페르시아 등 이른바 이스람교권 상인들과의 교역이다. 이들과의 관계는 唐帝國이란「거대한 호수」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始終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이나 중국측 문헌에서 신라와 이슬람 여러 나라와의 직접무역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몇몇 문헌에는0857)Sulaimãn,≪中國과 印度消息≫(Paris, 1948), Al-Masoũdi,≪黃金草原과 寶石鑛≫(Baghdad, 1938). 아랍·무슬림상인들의 신라 내왕이나 신라 見聞에 관한 기술과 함께 신라로부터 수입한 상품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다.0858)무함마드 깐수,<新羅와 西城間의 文物交流>(≪新羅·西城交流史≫, 檀國大 出版部, 1992), 236쪽.

 아랍 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ãdhibah, 820∼912)는 자신의 저서≪諸道路 및 諸王國志≫에서 신라의 위치와 황금의 산출, 그리고 무슬림들의 신라 내왕에 관하여 서술한 뒤에 신라가 수출하는 상품명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동해에 있는 이 나라에서 가져오는 물품은 비단(綢緞)·劍·키민카우(kiminkhãu)·麝香·蘆薈·馬鞍·豹皮·陶器·帆布·肉桂·쿠란잔(Khulanjãn)” 등이다. 이 밖에 고라이브·樟腦·高良薑 등이 있다.0859)Ibn Khurdãdhibah,≪諸道路 및 諸王國志≫(Leiden, Brill, 1968). 그런데 헨리 율(H. Yule)과 앙리 콜디어(H. Cordier)의 연구(H. Yule & H. Cordier, Cathay and the Way Thither, Vol. Ⅰ, London, 1915)를 참고한 李龍範의 글에서는 그 품목의 수와 내용에서 전자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李龍範,<處容說話의 一考>,≪震檀學報≫32, 1969, 30쪽). 그는 “수출품은 고라이브(Ghoraib)·水溶性樹膠·蘆薈·樟腦·帆布·馬鞍·磁器·綢緞·肉桂·高良薑 등”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劍과 豹皮가 빠진 대신에 고라이브·樟腦·高良薑이 첨가되어 있다. 키민카우와 쿠란잔이 어떠한 물품인지는 모르지만 고라이브는 人蔘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검과 표피나 인삼·생강 등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다량 수출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 모두가 이슬람으로 수출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수출상품의 하나인 노회는 그 원산지가 아라비아·아프리카 등 지역이며 이 漢字 이름도 그리스어의 Aloe에서 Alue(아라비아어), Alwa(페르시아어)로 음이 바뀌어진 것을 중국에서는 蘆薈·奴會·納會 등으로 음사한 것이다. 또 신라 수출품으로 되어 있는 장뇌도 아열대지방의 산물로서 신라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상품의 역수출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 다양성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권 33, 志 2, 色服 車騎 器用 屋舍조에 보면 외래상품명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색복조에는 孔雀尾·翡翠毛·瑟瑟·玳瑁 등이 보인다. 공작미는 인도·동남아 일대와 중국의 남부에도 분포·서식하는 공작의 꼬리부분이지만 翡翠毛는 翡翠鳥의 털(Kingfisher's Feathers)을 말한다.0860)趙汝迨,≪諸蕃志≫下, 翠毛·周去非,≪嶺外代答≫권 9, 翡翠조 등 중국문헌에 이 새의 서생지·생태·기묘한 포획방법·용도 등을 기술하고 있다. 주산지는 캄보디아이고 털의 색깔은 翠色으로 진귀하며 극히 사치한 상품은 毛緞 같이 꼬아서 짠(撚織) 것이었다. 중국 宋代에도 이「翠毛박이 비단」의 착용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때에도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瑟瑟에 대하여≪삼국사기≫에는 다만 眞骨女人의 빗(梳)이나 冠, 또는 六頭品女의 빗에 “瑟瑟鈿(박이)을 禁한다”는 기사가 있을 뿐 다른 설명이 없다. 진골녀의 빗과 관에 瑟瑟박이를 금지하였다고 하면 그리 흔한 물품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관하여 비교적 많은 중국측 자료를 정리해 보면 주산지는 타슈켄트며 碧石의 보석으로 추측된다.0861)≪舊唐書≫권 104, 列傳 54, 高仙芝 :≪新唐書≫권 135, 列傳 60, 高仙芝·권 221 上, 列傳 146 上 西域 上 于闐 및≪資治通鑑≫권 216, 唐紀 32, 玄宗 天寶 9載.
슬슬이 어떠한 종류의 보석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로퍼(Laufer)는 보석으로서의 슬슬은 이란어 Se-Se를 음사한 것이며, 에메랄드(Emerald)일 것이라 추측하였다(B. Laufer, Sino-Iranica, Chicago, 1919, p.516).
중세 동서교역의 총아인 回鶻상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가지고 온 중요 상품에 이 슬슬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보석에 대한 唐人들의 호기심을 족히 엿볼 수 있다. 신라에서 이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흥덕왕 9년(834)경에는 신라귀족도 漢民族에 못지 않은 소유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0862)李龍範,<<三國史記>에 보이는 이슬람 商人의 貿易品>(≪李弘稙博士回甲記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103쪽.

 玳瑁(瑇瑁)의 생산지는 보르네오·필리핀 군도·쟈바 등지이며 그 해안에서 포획되는 龜甲의 일종이다. 그것은 黃色을 띈 검은 반점이 있는 반투명체로 장식용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車騎조에서도 진골의 수레 재료에 이것을 쓰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고, 屋舍조에서도 진골과 6두품의 床에 대모 장식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대모는 빗에서부터 車材·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된 사치성 물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車騎조에 紫檀·沈香이란 물품명이 기록되어 있다. 자단은 불교에서는「旃檀」이라고 하며 학명은 Pterocarpus Satarinus이다. 쟈바와 스마트라 서북에서 산출되는 향기나는 목재이다. 침향은 그 학명이 Aguilaria Agallocha로서 역시 향기있는 목재로 주로 占城國(Campa)·스마트라에서 생산된다. 이들 香木은 “眞骨이 사용하는 수레의 材木으로 쓰여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진골에서 4두품 남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단이나 침향을 鞍橋에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屋舍조에서도 진골은 침향을, 6두품은 자단과 침향을 床에 장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器用조에 “6두품·5두품은 물론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毬·㲮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구유는 중국에서는 氍叟毛 로도 표기하는데 털깔개를 말한다. 답등은 答毛 㲪 또는 毾㲪으로 쓰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모두 羊毛를 주성분으로 하여 雜毛를 섞어서 짠 문양이 있는 페르시아 직물이라는 점에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답등은 구유에 비해 더 섬세하며 북부 인도에서도 산출되나 로만·오리엔트(Roman-Orient)의 것이 가장 색채가 선명하다고 한다. 이 답등·구유는 페르시아의 坐具用 모직물이며 그것도 榻(페르시아어 Takht·Takhta가 원어)이라는 페르시아 坐具에 까는 깔개이다.0863)李龍範, 위의 글, 98쪽.

 위에 논급한≪삼국사기≫雜志에 보이는 외래품 외에도 특수향료의 수입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예로 1966년 경주 佛國寺 釋迦塔에서 발견된 향은 乳香으로 밝혀진 바 있다.0864)閔泳珪,<예루살렘 入城記>(≪연세춘추≫456·457, 1967). 유향(Frankincense, 아랍어 Lubãn 혹은 Kundur, 범어 Kunduru)은 아라비아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하드라모우드(Hadramout)나 질리(Gilead) 연안에서 생산되는 薰陸香·馬尾香·天澤香·摩勒香·多伽羅香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향료이다.≪諸蕃志≫하, 유향조에 의하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스마트라의 파렘방(Palembang)에 集貨되었다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이들의 수출품에는 물론 安息香(Styrax Benzion) 등 다른 고가의 향료도 포함되어 있다.

 각종 유리기구도 고급 사치품으로 수입되었다. 아라비아(大食) 유리의 특수성을≪제번지≫하, 유리조에는 “습기에 깨지지 않고 추위와 더위에 잘 견디며 물속에서도 못쓰게 되지 않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신라귀족들도 이러한 유리기물을 애용하였던 흔적을 현존하는 유물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金冠塚·瑞鳳塚·天馬塚·皇南洞 98호 北南墳 등 5∼6세기 고분에서 총 18여 점의 유리기구가 발견되었다. 그 재료나 제조기법, 장식형태와 색깔 등으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후기 로만글래스(비잔틴 유리)계에 속한다고 한다.0865)무함마드 깐수, 앞의 책, 245쪽.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유리군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리공예품에도 페르시아(사산조)계의 제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漆谷郡 松林寺五層塡塔에서 발견된 병 2점을 비롯하여 경주 皇龍寺塔址·芬皇寺石塔·皇福寺三層塔·佛國寺 釋迦塔·益山 五層石塔 등에서 총 8점의 유리병이 발견되었다.0866)무함마드 깐수, 위의 책, 247쪽. 이와 같이 로마의 유리기구가 고신라고분군에서 출토되고 페르시아계 유리병 등이 통일신라의 寺塔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東西文物交流史上 신라문화의 변모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신라의 통일을 전후하여 당의 서울 長安에는 거의 만에 가까운 西城人이 거주하고 있었다.0867)≪唐會要≫권 73, 安北都護府. 天寶(742∼755) 이후에는 급증하여 780년경에는 장안에만도 50,000여 명에 이른다.0868)沈福偉,≪中西文化交流史≫(上海人民出版社, 1985), 156쪽. 한편 해양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들은 인도양을 넘어 자바·스마트라·캄보디아 등「南海」일대에까지 상업시장을 넓혀갔다. 그러면서 8세기초에는 남중국 무역의 중심지인 廣州로 진출하고 다시 福州·泉州·洪州(南昌)·杭州·明州(寧波)로 북상하여 운하를 따라 蘇州·揚州에까지 그들의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唐太和上東征傳≫에 보면 당시 광주에는 “香藥·珍寶를 산적한 婆羅門·波斯(페르시아)·崑崙 등의 배가 수없이 많았고 師子國·大石國 사람들이 왕래 거주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아랍의 역사가 아브 자이드(Abu Zaid, 9∼10세기)와 알 마스디(Al-Masudi, 10세기)는 당말 黃巢의 난(875∼884)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자는 황소 농민군이 복주를 거쳐 광주로 진출하여 이를 함락하고 “이슬람교도·유태교도·기독교도·배화교도 등 이곳에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실로 12만 명이나 죽였다”고 하였으며, 후자는 주민들을 포함하여 20만 명을 학살했다고 적고 있다. 인원수에 과장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광주에 거주하던 대식인·파사인들의 수를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아랍·페르시아의 거주민만도 십수만을 헤아리게 되니 당 정부는 일찍부터 이들의 거주지를 특수지역으로 지정하여「蕃坊」을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종 개원 2년(714)에는「市舶使(司)」를 두고 이들과의 무역업무도 관리하게 하였다.0869)金文經,<張保皐 해상왕국의 사람들>(≪張保皐-해양경영사연구-≫, 1993), 109쪽.

 양주에도 많은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신당서≫ 田神功傳에는 그가 양주에서 “大食(아랍)·波斯·賈胡”를 수천이나 학살했던 사실이 수록되어 있으며,0870)≪新唐書≫권 144, 列傳 69, 田神功.≪全唐文≫ 太和 8년(834)의 칙문도 많은「南海蕃舶」과「蕃客」이 嶺南의 福建과 揚州에서 내왕·칩거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0871)≪全唐文≫ 권 79, 疾愈德音 太和 8년(834). 원인의≪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양주의 孝感寺 瑞像閣 수리에 소요되는 경비 중 일부를 파사국과 占婆國의 상인들에게 분담시킨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0872)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1, 開成 4년(839), 정월 7일. 이 시기 신라 무역상인들도 이 두 지역에서 교역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던 사실을 전한 자료들이 허다하게 발견된다.≪속일본후기≫에 보면, 신라상인들이 康州(廣州)에 표류하던 일본인 50여 명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고0873)≪續日本後紀≫ 권 15, 承和 12년(845) 12월 5일. 日本僧 원인은 그의 일기에서 양주에 체류하는 동안 신라인 국제무역상 王請·王宗을 만났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朱景玄의≪唐朝名畵錄≫에도 貞元末(804) 신라상인이 江淮에서 수십 점의 그림을 비싼 가격으로 구입해 간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는 통일 이후 당과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면서 사신을 비롯하여 승려·유학생·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이미 경주는 長安에서 크게 유행하던 西域風의 정취를 닮아가고 있었다.「三十五金入宅」으로 표현되던 특수 부유층들은 사치성 소비재를 제공해 주는 이슬람상인들의 왕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역거점「번방」을 구축하고 무역권을 확대해 가던 이들이,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가담하고 있었던 신라인 무역업자와在唐「新羅坊」사람들과도 자연스런 상거래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신라귀족들이 애용하던 많은 이국상품은 재당 신라상인들의 모국을 상대로 한 무역활동에서 가지고 올 수 있었을 것이고, 한편 상업활동이 왕성하던 이슬람상인이 직접 반입하였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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