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3) 당에서의 활동
  •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3) 재당신라인과 무역상

 신라는 7세기 중엽 통일제국을 수립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였지만 8세기말경에 오면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무너지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호족들의 지방분권적 할거상태가 시작된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일은 이와 같이 중앙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토호들이 할거하게 되자 오히려 인민대중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저력을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에 쏟아넣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교역권을 형성하고 羅·唐·日 3국간을 종횡무진 항해하면서 그 주인 노릇을 톡톡히 수행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 나라 역사상 인민들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이 이 때처럼 활기찼던 시기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8세기경 신라인들은 동아시아 3국간의 교역뿐만 아니라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 즉 동서해상무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한다. 이 시기는 앞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들이 南海航路, 또는「香藥의 길」이라고도 하는 바닷길을 통하여 광주와 양주까지 내항하고 있었다. 신라인 무역업자와의 교역은 자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들이 地中海나 中東의 해안에서 수행하였던 그러한 구실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전자에 비해서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수행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해상활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중국의 동·남쪽 연안과 대운하 변에 산재하고 있던 신라인 촌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山東半島의 연해안에서 대운하의 연변, 그리고 淮水·揚子江 河口, 揚州·楚州(淮安)·明州(寧波)·泉州·福州·廣州에 이르는 지역은 물론, 唐·일본·신라를 잇는 삼각무역에도 참여하여 세계무역의 일익을 담당해 갈 수 있었다.

 일본의 구법승 원인은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9년 반 동안이나 당의 동해안 일대와 광대한 제국의 내륙 등지를 여행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入唐求法巡禮行記≫라고 알려진 이 책은 당을 여행하였던 일본승의 일기지만 전권을 통하여 등장하는 인물의 반 이상은 당나라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아닌 신라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행히도 이 승려의 일기를 통하여 당시 당에 거주하던 신라인 마을의 분포나 조직, 그리고 그들의 생업과 믿음이 무엇이었던가를 생생히 밝힐 수 있다.

 신라사람들의 마을은 산동반도 남해안 일대에서 海州(連雲港市), 그리고 대운하 변과 揚子江口·강남 연해안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마을들을 연결해 보면 당시 신라와 당의 경제중심지를 이어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된다. 그리고 산동반도 연해안의 중심지는 적산촌이 분명하며, 대운하 변의 심장부는 楚州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揚州·明州·황암에도 신라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양주부에 王請과 王宗 등을 중심으로 한 신라인 국제무역상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이미 논급하였지만≪江都縣志≫권 16에는 北宋 元豊 7년(1084) 이 곳에 高麗館이 설치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근자 고려관 유적지 인근에서 신라자기와 고려청자의 파편이 수거된 바 있다.0907)金文經, 앞의 글(1993), 99쪽. 이로써 미루어 보면 이곳에는 신라 이래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수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라인 취락은 대운하 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고 그 심장부는 분명히 초주와 漣水鄕이었다. 개성 4년(839) 2월 일본 조공사 일행은 귀국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신라선박 9척과 해로에 익숙한 신라선원 60여 명을 고용하였다.0908)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1, 開成 4년(839) 3월 17일. 당정부는 다수의 신라 무역상인과 선원들 그리고 造船기술자와 선주들이 거주하던 이 지역에「신라방」을 설치하고 교민을 관장하는「句當新羅所」를 두었다. 그리고 摠管을 행정 책임자로 하고 그 밑에「專知官」과「譯語」등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초주는 회수 하류에 위치하여 대운하와 회수를 이어주는 경제적·전략적 요지였다. 淮·泗·汴·蔡·潁·渦河 등 수많은 하천이 직접, 간접으로 交會하여 이곳을 거쳐 흐르기 때문에 운송과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남으로는 양주를 거쳐 蘇州·杭州·明州 등 무역항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와하·변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中原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양주·초주·연수향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신라인들은 거의 신라 해외발전기와 청해진 전성기(828∼841)에 해양으로 진출하여 정착하였던 무역업자 또는 직업선원의 후예거나 당사자였다. 항해술에 능숙했던 이들은 신라·당·일본의 3국 무역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양주·광주 등을 중심으로 한 西方世界와의 교역도 활발히 전개해 갔다.

 신라인들은 결코 대운하 변에만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海州(연운항시) 동해현 宿城村에도 촌장 王良의 지도 하에 소금생산을 업으로 하는 다수의 신라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0909)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1, 開成 4년(839) 4월 5일. 密州 연안의 大珠山 驕馬浦에는 木炭운송업자와 造船업자·선박수리업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원인 일행이 적산촌에서 명주로 가던 도중 대주산 교마포에 도착하여 신라인 陳忠의 목탄수송선을 타고 초주까지 여행하였던 사실0910)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大中 원년(847) 윤3월 17일.과 일본 조공사 선박이 풍파로 파괴되자 배의 수리를 교마포에서 하였던 사실0911)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1, 開成 4년 4월 1일. 등은 이를 증명한다.

 신라인 촌락의 흔적은 교마포 북쪽, 靑島의 동북쪽인 지금의 嶗山灣 부근의 승가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산은 높은 바위산이기 때문에 해주의 동해산, 밀주의 대주산, 등주의 적산과 함께 당시의 항해에 있어 둘도 없는 좋은 표적물이었으며 기항지이기도 했다. 원인 일행은 일본무역에서 돌아온 신라인 金子白·欽良暉·金珍 등을 찾아 이곳에 정박하였다. 그 뒤 다시 그곳에 居留하는 신라인 崔氏의 선편으로 초주총관 劉愼言에게 서신을 발송하고 신라인 王可昌의 선편으로 乳山浦를 출발하였다.0912)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大中 원년(847) 6월 26·27일.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곳에는 국제무역업자만이 아니라 광주·명주·양주·초주·산동반도를 왕래하는 연해안 상인들의 선박도 붐비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하고 있었던 곳은 산동반도 남쪽 연안 일대였다. 牟平縣의 邵村浦·陶村, 海陽縣 동북의 유산포 등이 그 대표적인 마을이었다. 특히 유산포는 太子通事舍人 金簡中이 당 정부의「告哀兼弔祭冊立等副使」가 되어 신라로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 조공사 선단이 이곳에 정박했을 때 말과 노새를 탄 30여 신라인들과 많은「娘子」를 목격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이 마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들은 해운업·상업은 물론이거니와 농업에도 종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말과 노새를 타고 왔다는 사실과 일본 조공사 일행이 필요로 한 식량을 인근 소촌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양주·초주·연수향이 양자강과 회수 하류 연안 및 대운하 변을 중심으로 한 신라인 사회의 중심지였다고 한다면 文登縣 淸寧鄕 赤山村은 산동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심장부이다. 뿐만 아니라 당 대륙이나 연해안으로 이르는 교통과 신라·당·일본 3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820년대초에 장보고가 건립한 新羅僧院 赤山法華院이 있어 당시 중국에 살던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법화원은 연간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을 소유하고, 장보고 휘하의 張詠·林大使·王訓 등 3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상주승 24명, 尼 2명, 노파 3명 등 29명이 거주하였다. 일부 기록만 보아도 법화원에는 법당과 장경각을 비롯하여 승방·니방, 수 개의 객사, 식당·창고 등이 있었던 큰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신라인 사회의 규모는 당시 거행된 겨울철≪법화경≫강회에 모였던 스님과 신도들의 수로 추측이 가능하다.

 開成 4년(839) 11월 16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 15일에 끝맺은 강회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男女道俗’·‘老少尊卑’와 유연시주들이 강청하였다. 강경의식은 신라풍속에 따라 신라말로 거행되었고 이 講筵의 마지막 2일 간에는 신도 250명과 200명이 각각 참례하였다.0913)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5년(840) 정월 15일. 이 사실이 곧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하여 산재해 있던 신라인 사회의 규모를 말해 준다.

 적산촌은 신라와 당을 이어주는 가장 안전하고도 중요한 항로의 종착지이며 中原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靑州兵馬使 吳子陳이 神武王의 ‘즉위를 경축하는 사신’이 되어 관헌 30여 명과 함께 신라로 출발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며 장보고의「大唐賣物使」선박 또는「교관선」이 신라와 일본을 오고 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明州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찍부터 신라를 비롯하여「南蕃」및 西方諸國 원항선박의 발착항구였다.0914)≪唐會要≫권 78, 諸使雜錄 上, 元和 14년.
≪輿地紀勝≫권 11, 兩浙東路慶元府 明州景物 下.
≪資治通鑑≫에도 당말의 명주가 강남 연안의 군사·교통·무역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0915)≪資治通鑑≫ 권 250, 咸通 元年·권 252, 乾符 3·4년. 뿐만 아니라 명주는 오대·송대에는 南海諸國은 물론 동북 여러 나라와의 해상무역의 중심항으로 번창하여「市舶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외국상인들은 명주의 東渡門 안팎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신라상인들은 鎭明岭 일대에서, 波斯人들은 동도문 안에서 많이 거주하여 波斯거리를 형성하기도 했다.0916)林土民, 앞의 글, 57쪽.

 大中 원년(847) 6월초 일본승 원인은 귀국을 서둘러 신라 무역상인 金子白·欽良暉·金珍 등을 찾아 楚州를 방문하였다. 그곳 신라방 총관 劉愼言으로부터 金 등의 서신을 전해 받았다. 그 내용인 즉, 이들은 이미 5월 21일에 蘇州의 松江口를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니 嶗山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배를 타고 갈 日人 春太郞과 神一郞은 계약을 파기하고 명주의 신라인 張友信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과 춘태랑의 廣州 왕래를 기록하고 있다.0917)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大中 元年(847) 6월 9일. 金 등은 명주·소주를 중심으로 일본을 수삼차 왕래한 국제무역상인뿐만 아니라 산동반도 연해안에서 운하변을 따라 남북으로 오르내리면서 연안무역에도 종사한 新羅巨商들이다.

 ≪赤城志≫권 19, 山水門(臨海縣)條에 보면, ‘縣西三十里’에 ‘新羅山’이 있었다는 사실과 ‘縣東南三十里’에 ‘新羅嶼’가 있어 옛날 신라상인들이 배를 정박시켰던 곳이라 하고 있다. 외국무역에 종사하던 선원들은 멀리서 이 신라산을 표적으로 삼아 신라서로 배를 착안시켰으리라 믿어진다. 신라산의 위치는 지금의 임해시의 성밖 뒤의 산으로 보고 三十里는 三里의 誤記라 하고 있다. 당시 신라상인들의 취락지는 임해현 城內의 通遠坊이며 이 산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지금 이 산에 있는 많은 옛 무덤은 객사한 신라상인들의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0918)林士民, 앞의 글, 58쪽.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杜牧(803∼852)은 장보고·정년의 전기를 지어 그의 문집에 싣고 이들에 대한 놀라운 관심을 표하고 있다.0919)杜牧,≪樊川文集≫권 6. 특히 두목은 장보고를 安史大亂(755∼763)의 진압에 가장 공이 컸던 당나라 장군 郭子儀(697∼781)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하며 칭송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곧 장보고가 당에서 차지한 위상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장보고의 용맹성과 의협심, 그리고 그가 가진 한없이 넓은 도량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저명한 시인 두목으로 하여금 전기를 쓰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며, 한편 장보고는 저명한 시인 작가의 전기대상이 될 만한 경이로운 인물로 당에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두목이 쓴 이 전기는 거의 그대로 중국의 正史인≪신당서≫권 220에 인용되었고, 다시 우리 나라의≪삼국사기≫ 張保臯·鄭年傳에 전재되었다. 더욱이≪신당서≫의 편자는 “晋에 祗奚가 있고 당에 汾陽(곽자의)과 보고가 있는데 어찌하여 東夷에 인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덧붙이고 있다. 물론≪삼국사기≫의 편찬자도 장보고의 위용을 높이 평가하고, 인멸될 뻔했던 그의 존재를 건져낼 수 있었던 것을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원인도 入唐하였을 때 筑前太守 小野末嗣로부터 장보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가지고 왔다. 원인은 일본 조공사와 함께 입당하여 중국대륙을 구법순례할「請益僧」이다. 이러한 신분의 원인이 장보고에게 전교될 태수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그 당시 장보고의 국제적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 나라 역사상 장보고처럼 중국과 일본 양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찾아 보기가 힘들 것이다. 장보고가 당의「軍中小將」이란 군직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와 士卒 1만을 거느리고 莞島에다「淸海鎭」을 설치한 해는 흥덕왕 3년(828)의 일이다. 이 시기는 노비매매가 극성을 부리던 때이다. 해적들이 신라의 서남해안에 출몰하여 양민을 나포하여 당나라에 노비로 팔았다. 이 사건은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등장하였다. 장보고가 청해에 진을 설치했던 동기도 이 해적들의 양민 나포를 막으려는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太和년간(827∼835)에 오면 신라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노예무역선은 그 자취를 감춘다. 이 사실은 곧 장보고가 황해에 횡행하던 크고 작은 해상세력집단을 철저히 통제하고 그의 세력권하에 두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淸海鎭大使」라는 직함이 그러하듯이 그의 군단은 사병집단적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다.0920)李基東,<張保皐와 그의 海上王國>(≪張保皐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100쪽. 그래서 청해진 일원은 물론 재당 신라인 사회도 하나의 체계 속에 조직화하고 자기의 통솔하에 두면서 사적인 조직으로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해진과 적산촌 그리고 북구주를 근거로 하여 신라·당·일본의 3국무역은 물론 서방세계와의 중계무역도 독점하여 명실공히 동아무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金文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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