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2) 유학의 발달

(2) 유학의 발달

 우리 나라의 유학에 대한 기원은 張志淵의 箕子說 이후0951)張志淵,≪朝鮮儒敎淵源≫(東書館), 1쪽. 樂浪時代0952)李丙燾,≪資料韓國儒學史草稿≫(서울大, 1959), 5쪽. 또는 3국시대설 등이 제시되었다.0953)玄相允,≪朝鮮儒學史≫(민중서관, 1949), 13쪽. 대체로 小獸林王 2년(372)의 太學設置를 그 실질적인 기원으로 볼 수 있으나,0954)李基白, 앞의 책, 195쪽.≪留記≫의 경우나 빈번한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유학의 전래는 그 시기를 크게 소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가 王京을 중심으로 소개·응용되었을 것이며, 현존하는 金石文을 통해 볼 때0955)가령<毌丘儉紀功碑>는 正始 7년(246)에 세워진 것이나 그것이 중국인(魏)의 작품이라 해도 고구려 서울(集安)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므로 漢字사용의 의미가 있다. 또한<冬壽墓誌>는 고국원왕 27년(357)에 세워졌으며,<好太王碑>(414)와<牟頭婁墓誌>(5세기 중엽)를 볼 때 4세기 중엽 이전에는 유학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신라의 경우 漢字의 사용이나 유학의 이해는 고구려보다 늦었을 것임은 확실하다. 다만<冷水里碑>(1989년 발견)의 경우로 보아 5세기초 눌지왕 때 한자의 보급이 일반화되었음을 알게 한다(金昌鎬,<迎日冷水里碑의 建立年代>,≪古代史硏究≫3, 1990, 104쪽 참조). 국민적인 활용은 시기가 떨어질 것이지만 당시는 吏讀를 비롯하여 借字의 응용이 있어 구체적 시기는 단정할 수가 없다.0956)≪조선전사≫3(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300∼310쪽.

 다만 유학이 교육제도의 발달과 함께 발전되었기 때문에 太學이나 太學博士(李文眞)의 존재로 보아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유학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다만 신라의 경우 고구려보다는 늦었지만 이미 4세기 중엽 국가성장의 내적 필요성에서 또는 국민통합의 집결체로서 花郞의 조직은 일정한 규범을 요구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律令의 공포(520)나<蔚州川前里書石>(525)의 내용에서 이미 유교적인 이해가 진전되고 있었다.0957)李基東,<新羅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앞의 책), 330∼332쪽. 따라서<壬申誓記石>의 ‘忠道執持 過失無誓’의 정신이나0958)<壬申誓記石>의 壬申年에 대해서 종래 文武王 12년이나 聖德王 31년으로 비정하였으나, 李丙燾는 진흥왕 12·13년(551·552) 또는 眞平王 33·34년(611·612)으로 추정하였다(李丙燾,<壬申誓記石에 대하여>,≪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691∼692쪽).<眞興王巡狩碑(磨雲嶺碑)>의 ‘如有忠信精誠’의 표현도 주목된다. 진흥왕 6년(545)의 國史編纂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신라의 유교정치이념은 眞平王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고조되었으며,0959)李晶淑,<新羅眞平王代의 政治的性格>(≪韓國史硏究≫52, 1986), 11∼13쪽. 당과의 외교경쟁에서 더욱 촉진되었다.0960)삼국의 對唐外交는 삼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경쟁적으로 추진되었다. 고구려는 麗隋戰爭 후 당의 강경책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고, 백제 武王과 신라의 眞平王은 각각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삼국은 당의 건국 직후 조공사를 파견하였으나, 당은 같은 해인 624년(영류왕 7년·무왕 25년·진평왕 46년)에 책봉을 받게 된다. 더구나 삼국은 당에의 조공사 파견에 있어서도 경쟁적이어서 對唐外交가 지닌 정치적 의미를 볼 수 있다(申瀅植, 앞의 책, 1984, 314∼315쪽). 따라서 왕권강화에 수반되는 유교정치이념은 3국간에도 당의 國子監 入學競爭에 나타났으며,0961)≪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9년조 참조. 진덕왕 2년(648)의 “국학에 나아가 釋尊과 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했다”는 기사와 宿衛外交0962)申瀅植,<新羅의 宿衛外交>(앞의 책, 1984), 354∼355쪽. 및 太平頌에 의해 유교사상이 더욱 고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덕왕 2년 金春秋의 귀국시에 가져온 溫湯碑·晋祠碑·晋書(新撰)의 내용이나 神文王 2년(682)에 설치된 국학의 하급(실무)직인 大舍가 이미 진덕왕 5년에 설치되고 있어, 진덕왕 2년의 김춘추의 입당은 국학설치를 위한 준비작업이라 하겠다.0963)李丙燾,≪韓國史≫ 古代篇(震檀學會, 1959), 666∼667쪽. 따라서 국학은 진덕왕 5년에 설치준비에 착수한0964)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 1 古代編(一潮閣, 1982), 386쪽. 것이 아니라 이때 실질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官府를 설치하는 경우 책임자가 먼저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급관리를 먼저 임명한 후 관부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임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0965)가령 執事部의 경우 그 설치는 진덕왕 5년(651)이나 그 하급관리인 典大等(侍郞)은 진흥왕 26년(565)에, 大舍는 진평왕 11년(589)에 각각 먼저 임명되었다. 船府의 설치는 문무왕 18년(678)이나 차관급인 卿은 문무왕 3년(663)에 임명되었다. 司正府도 무열왕 6년(659)에 설치하였으나, 경은 진흥왕 5년(644)에 임명된 바 있다.

 결국 신라는 진덕왕 2년 이후 武烈系 王權의 성장과정에 따른 왕권강화의 필요성에서 유교정치이념의 구체적 표현으로 김춘추의 귀국 직후인 진덕왕 5년에 국학을 설치한 이래 신문왕 2년까지 교육제도를 완비한 것이다. 결국 신문왕 2년(682)의 ‘立國學’은 제도적 완비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 후 문무왕 20년(680)의 下敎를 비롯하여 21년의 遺詔,0966)≪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20년·21년. 신문왕 원년 8월의 하교와 6년 2월의 ‘奏請禮記幷文章’, 그리고 7년의 5廟制의 확립 등은 국학설치나 유교정치의 구현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보겠다.0967)≪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원년·6년·7년. 그외 성덕왕 18년(719) 宿衛 金守忠의 ‘文宣王·10哲·72弟子像’을 받들고 돌아온 일, 27년의 子弟들이 國學에 들어가기를 청한 일 그리고 30년의 勅詔와 33년의 上表0968)≪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6년·27년·30년·33년. 등은 통일신라 유학의 발전상을 나타내 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 帝(현종)는 邢璹에게 이르기를 신라는 君子之國으로 자못 書記를 알아 중국과 비슷하다. 경은 훌륭한 유학자이므로 사절로 보내는 것이니 마땅히 經義를 연술하여 대국(당)의 유교의 번성함을 알게 하라(≪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효성왕 2년).

㉯ 사신이 다녀가면 중국의 風敎를 전하고 사람이 오면 古典을 배워 간다. 衣冠에는 예를 알고 忠信은 儒를 높인다(≪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5년).

 위의 글(㉮·㉯)에서 신라 유학의 번성함을 찾을 수 있다. 즉 ㉮는 효성왕 2년(738)에 신라사신으로 온 邢璹(유학자)를 퉁해 신라 유학의 수준을 가늠한 내용이며, ㉯는 경덕왕 15년(756)에 玄宗(당)이 신라사신에게 직접 써준 五言詩의 일부이다. 이로써 신라는 그 유학의 발달과 번영을 내외에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중대의 역대 왕들은 善政을 강조하는 敎書나 詔書를 통해 왕도정치의 표본을 세웠으며,0969)神文王은 재위 12년간(692∼681)에 4번의 下敎를 내렸으며, 聖德王은 재위 36년간(702∼737)에 12회의 大赦令을 내려 왕권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申瀅植, 앞의 책, 1990, 154쪽). 국학의 충실과 경전의 강론, 그리고 唐 國學의 입학과 수학 등으로 유교교육제도를 강화하였다. 특히 성덕왕과 경덕왕대의 廟學制의 확립은 교육 장소를 신성시 함으로써, 講學과 視學의 의례를 통한 전제왕권의 권위를 강조하게 되었다.0970)高明士,<新羅時代 廟學制的 成立與展開>(≪大東文化硏究≫23, 1989), 263∼265쪽. 따라서 국왕 자신까지 규제하는 유교적인 규범과 도덕률의 고양은0971)李基白,<新羅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앞의 책), 228∼229쪽. 진골귀족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왕권의 전제화와 귀족억압의 논리적 타당성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통일신라의 왕은 유교정치의 지도이념인 智와 德으로서 經世方法인 禮·樂·政·刑을 베푸는 정치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것은 유교의 본성인 ‘道德의 實踐’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며,0972)李完栽,<儒學의 精神>(≪柳承國博士華甲紀念論叢≫, 1983), 13쪽. 그 도덕의 내적 기준인 仁과 외적 기준인 禮를0973)李漢龜,<儒敎倫理의 本質的 構造>(앞의 책), 29쪽. 결합시켜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이루어 국민교화의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유교적인 이상세계로서 平天下를 이룩하여

大道가 행해졌을 때는 天下가 공평해지고, 참으로 어질고 능력있는 자를 뽑아 信義를 강론하고 친목을 도모하게 됨으로 자기 부모만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인은 편히 쉴 수 있고, 젊은이는 일할 수 있으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다. …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모는 없어지고 도둑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문을 닫지 않으니 이를 大同이라 부른다(≪禮記≫, 禮運)

와 같은 大同世界의 실현을 중대 전제왕권을 통해 이룩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역죄를 응징할 수 있고, 국학에서≪論語≫·≪孝經≫을 필수과목으로 부과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며,0974)李基白, 앞의 책, 226쪽. 入唐使가≪예기≫와 吉凶要禮의 책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0975)≪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6년. 즉 신문왕 2년의 독학설치나 7년의 5廟制確立의 명분을 찾을 수 있으며, 반역자의 처단을 王道政治具現의 차원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문왕 즉위 후 金軍官 處刑의 교서에 “임금을 섬기는 규범은 충성을 다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벼슬살이를 하는 도리는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蘇定方이 백제정벌 직후에 唐帝에게 올린 다음의 표현에서도 신라사회에 뿌리내린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국왕은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섬기기를 자기 부형과 같이한다(≪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통일신라 유학의 발달은 국가교육제도인 국학이 공식적으로 설치되고 관리양성제도인 독서출신과의 설치로 그 절정을 이룬다. 국학은 그 책임자(卿)가 중앙행정부(14부)의 차관급에 속하지만, 5단계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兵部나 內省, 그리고 成典과 같은 형태를 취하여 우대받고 있었다.<표 1>에서 본다면 국학은 직능상 禮部의 통제를 받았으리라 여겨지지만, 책임자가 1인으로서 타기관과 달라 거의 독자적 운영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박사와 조교가 실제 교수이며, 大舍와 史는 실무담당자로 여겨진다.

시기 신문왕 2년 경덕왕 혜공왕 인원수
명칭 國 學 太學監 國 學


司業 1명
博士 博士 博士 약간명
助敎 助敎 助敎
大舍 主簿 大舍 2명
4명

<표 1>國學의 구성과 그 변천

 국학은 무열왕권의 등장과 확립과정에서 수반되는 왕권강화와 유교정치이념의 구현이라는 현실적 목적과 통일전쟁 후 문치주의의 지향이라는 시대적 요구에서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정치적인 소외계층인 6두품 계열을 흡수함으로써 전제왕권 지지기반을 넓힐 수 있다는 정책에서 마련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제한적이지만 관리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으므로0976)李基白, 앞의 책, 230쪽. 국학의 설치(완비)는 전제왕권과 6두품 계층의 정치적 타협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학생의 等位는 大舍 이하로 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0세까지 입학(수학)할 수 있다. 9년을 기한으로 하되, 만일 능력이 부족하여 향상치 못하는 자는 퇴학시키고, 재질은 성취할 만하되 미숙한 자는 9년을 넘어도 재학케 한다. 졸업자의 관위는 大奈麻·奈麻를 준다(≪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이 기록은≪三國史記≫에 기록된 국학 학생의 수학연한, 방법 그리고 특전내용이다. 즉 국학 입학연령은 15∼30세로 법정 수업연한은 9년이다. 그러나 그간에 능력부족자는 퇴학시키지만, 능력인정자는 수업연한을 연장해 주었다. 졸업자에게는 奈麻(11위)와 大奈麻(10위)의 관등을 주었기 때문에, 이들 신분을 6두품으로 비정하고 있다.0977)國學의 학생이 대나마까지 오를 수 있는 5두품에게는 ‘큰 매력을 주지 못했을 망정(李基白, 앞의 책, 229쪽), 5두품까지 가능했다는 것은 사실이다(申千湜,≪高麗敎育制度史硏究≫, 螢雪出版社, 1983, 8쪽). 따라서 4두품은 제외되었을 것이며, 6두품이 국학의 학생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진골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6두품 세력은 학문적 교양과 국왕의 정치적 조언을 통해 그 세력을 확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교정치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0978)李基白, 앞의 책, 231쪽.

교수 방법은 周易·尙書·毛詩·禮記·春秋左氏傳·文選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다. 박사나 조교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효경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씨전·문선·논어·효경을 그리고 상서·논어·효경·문선으로서 교수한다(≪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이 내용은 국학의 교과과정을 설명한 것으로<표 2>와 같이 기본은 3분과로 나눌 수 있었으며, 국학의 공통 필수과목은≪논어≫와≪효경≫이었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수양이나 사회의 윤리·도덕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인간의 德目을 중시하려는 뜻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과정은 국학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유교적인 덕목으로 국민을 교화하고, 왕권유지를 위한 정치이상을 실현하려는 목적은 분명하다. 다만 특수과정(算學課程)으로서 雜學(천문·역·산술·의학)이 있어 학문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교과과정 교 과 내 용
제1과정 예기·주역·논어·효경
제2과정 춘추좌씨전·모시·논어·효경
제3과정 상서·논어·효경·문선
제4과정 綴經·三開·九章·六章(산학과정)

<표 2>國學의 교과과정

 다음으로 유학의 발달을 가져온 제도적 장치는 독서출신과(삼품과)이다. 이는 원성왕 4년(788)에 처음 실시된 것이지만 국학의 졸업시험제도의 성격을 띤 시험으로 불가피하였을 것이다.0979)李基白, 앞의 책, 230쪽. 이에 대한≪三國史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학생의 독서에는 3品出身이 있다. 춘추좌씨전이나 예기 및 문선을 읽어 그 뜻이 잘 통하고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上品으로 한다. 曲藝·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中品으로 하고, 곡예·효경을 읽은 자를 下品으로 한다. 다만 5經·3史와 諸子百家의 書를 겸통하는 자가 있으면 초탁해서 등용한다(≪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즉 국학에서 배운 과목을 중심으로 3품으로 선발하되, 특히 우수한 자는 特採의 은전을 주고 있었다.<표 3>에서 보듯이, ≪효경≫은 3품 공통 시험과목이었음에 비추어 통일신라 유학은 道德至上主義的인 정치이념으로 대표된다고 하겠다.0980)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388쪽. 결국 독서출신과는 국학에서 수학한 내용을 확인하는 試驗 절차였으며, 그 중에서 일부가 守令으로 임명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文籍출신이 아니므로 수령직을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은0981)≪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5년. 국학출신이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근거와 함께 큰 의미를 지닌다. 결국 엄격한 骨品社會안에서도 실력(유학)에 따라 인물이 발탁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守令職(외직)이 牧民官으로서 인식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 말하면 국학출신 유학자를 지방관으로 파견함으로써 지방의 학문수준을 높혀줄 뿐 아니라, 도덕정치라는 시대조류를 확대시킬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동시에 특채의 은전이 있어 우수한 인재의 등용통로를 마련하여 賢士登用과 같은 爲民政策의 틀을 이룩하였다고 생각된다.0982)柳初夏,<孟子의 爲民意識과 그 性格>(≪民族文化硏究≫14, 1979), 135∼139쪽. 따라서 독서출신과는 일종의 官吏登用試驗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국학의 졸업시험으로 보인다. 단지 그 성적이 우수하면 관리(주로 外職)에 발탁된 것뿐이며, 중앙관부의 하급직에도 임명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학의 입학자들이 주로 6두품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三國史記≫권 10, 원성왕 4년조에서 弓術로 사람을 뽑던 제도가 없어졌다고 한 경우로 보아 관리선발 시험제도의 의미가 분명히 있었다.0983)張道斌,≪大韓歷史≫, 364쪽. 따라서 汕耘 張道斌은 신라의 문약이 고유의 선거제도인 弓箭을 폐지하고 한문으로 詩選하는 데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선발과정 시 험 과 목
상 품 춘추좌씨전·예기·문선·논어·효경
중 품 곡예·논어·효경
하 품 곡예·효경
특 품 5경·3사·제자백가

<표 3>讀書出身科의 내용

 국학의 설치가 무열왕통의 정치적 출범을 의미한 것처럼, 독서출신과의 실시는 元聖系 王室의 출발과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원성왕(김경신)은 惠恭王 16년(780)에 일어난 金志貞亂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혜공왕을 시해하였으며, 金良相을 宣德王으로 등장시켰다. 이어 김경신은 金周元과의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원성왕으로 등장함으로써 원성계 왕실을 열게 된다.0984)申瀅植,<武烈系의 成立과 活動>(앞의 책, 1984), 12쪽. 원성왕의 등장은 단순한 왕위의 교체가 아니라, 무열계 왕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선덕왕은 下代의 첫 왕이지만, 東海火葬이나 王統(聖德王의 外孫)으로 보나 무열계 왕통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0985)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韓國史硏究≫18, 1977), 27쪽. 따라서 실질적인 하대의 첫 왕인 원성왕은 무열계 왕통의 정치적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왕가의 확립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것이 五廟制의 변천과 독서출신과의 설치이다. 왕은 신문왕 때 이룩된 5묘제와 혜공왕·선덕왕 때 개편된 그것을 다시 고쳐, 聖德大王과 開城大王(宣德王의 부친)을 바꾸어 자신의 조부(魏平:輿平大王)와 부친(孝讓:明德大王)을 奉祝한 것이다.0986)邊太燮,<廟制의 變遷을 통하여 본 新羅社會의 變遷過程>(≪歷史敎育≫8, 1964), 55쪽.

 이와 같이 원성왕은 자신의 家系 위주로 5묘제를 바꿔 왕통의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이를 자신의 등장과정에서 ‘君臣의 合意’라는 정치적 승리로 구현했으며, 강릉으로 축출된 김주원의 아들인 宗基와 자신의 친손자인 俊邕(昭聖王)·彦昇(憲德王)을 侍中·兵部令 등에 임명하여 왕가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회변모에 따라 원성왕은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재건하고 그 기능을 확충시키기 위해 독서출신과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관리를 선발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변화된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子玉을 집사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渡唐留學生이라는 文籍출신임을 내세워 楊根縣小守로 임명한 것이다.0987)≪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5년. 이로써 유교정치의 본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발달은 왕권의 전제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도덕정치의 풍조가 확대됨으로써 정치비판의 계기를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薛聰의<花王誡>로서, 도덕적 규범의 강조로 나타났다. 왕권전제화의 이념적 바탕이 된 유교가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견제와 제한을 가져 온 모순을 보게 된다. 즉 유학의 발전에 따른 漢文學의 이해는 도리어 骨品制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되었으며, 6두품 세력의 정치적 진출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6두품 계열은 이러한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왕권과 결탁할 수 있었다 해도0988)李基白, 앞의 책, 231쪽. 고대사회 극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학의 발달은 단순히 왕권강화의 수단이나, 국민의 지식수준을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道를 배우고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드러운 것이다. 일찍이 듣기를, 옛 사람의 말에 糟糠之妻를 버려서는 안되며 어려웠을 때의 交友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三國史記≫권 46, 列傳 6, 强首).

와 같이 당시 사회상을 비판함으로써 사회개혁에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강수는 釜谷의 대장간 딸과 혼인한 후 다시 아내를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당시의 一夫多妻制나 골품제에 입각한 신분제도를 비판한 것이다.0989)李基白, 앞의 책, 217쪽. 그러므로 유학의 보급은 윤리적 덕목에 따른 사회개발과 개혁에도 일정한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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