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2) 역사의 편찬

2) 역사의 편찬

 역사의 편찬은 고대국가의 왕권강화과정에서 수반되는 정치행위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국사편찬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문화적 기념탑인 동시에 대표적인 국사편찬사업인 것이다.1012)李基白 외,<우리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韓國史大討論會≫1, 1976), 11∼21쪽. 그러므로 고구려는 영양왕 11년(600)에, 백제는 近肖古王 때(346∼375), 신라는 眞興王 6년(545)에 각각 국사가 편찬되었다. 물론 고구려는 이미 국초에≪留記≫가 편찬되었으므로, 국사편찬은 삼국의 국가발전과정과 비례해서 이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專制王權의 확립이나, 유교정치이념의 구현은 물론 왕족의 혈연의식 또는 왕통의 정통성에 비추어,1013)李基東,<古代國家의 歷史認識>(≪韓國史論≫6, 國史編纂委員會, 1979), 9쪽. 통일신라에 있어서 官撰史書의 편찬 가능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1014)李基東, 위의 글, 13쪽.
趙仁成,<崔致遠의 歷史敍述>(≪歷史學報≫94·95, 1982), 21쪽.

 통일신라의 무열왕통은 통일전쟁과정에서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었으며, 전제왕권의 확립은 유교정치이념을 구현하는 과정을 수반하였으므로, 국사편찬이 필요했음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열기 속에서 확장된 민족적 자존과 당문화의 수용에 따른 문화적 긍지 속에서 역사편찬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진흥왕 때의 편찬 경험과 진덕왕 2년(658) 김춘추의 당에서의 國學參觀과 講論, 그리고 太宗의 溫湯·晋祠碑 및 신찬≪晋書≫의 전달은 국사편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준 계기가 될 수 있었다.1015)申瀅植,<新羅人의 歷史認識과 그 編纂>(≪白山學報≫34, 1988; 앞의 책, 1990, 221쪽).

 특히 진덕왕 5년(651)의 정치개혁은 단순히 新正賀禮나 집사부의 설치(稟主의 폐지)라는 외형적 의미가 아니라, 김춘추·김유신 일파의 정치적 승리이며,1016)李基白,<新羅執事部의 成立>(≪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53쪽. 무열왕권 성립의 제일보인 것이다. 이 개혁 속에서 大舍(國學) 2인의 임명은 국학에 대한 준비만이1017)李丙燾, 앞의 책(1959b), 666∼667쪽. 아니라, 국사편찬의 준비라는 의미도 함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신문왕 2년(682)의 공식적 국학설치는 교육기관의 설립이라는 의미 외에도 국사편찬을 위한 자료수집이나 준비작업의 일환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1018)申瀅植, 앞의 책(1990), 221쪽.

 신문왕대의 제도설치에 있어서 국학 이외에 집사부의 舍知, 工匠府의 主書(大舍),1019)工匠部는 14개의 중앙관부 중에서 그 서열이 최하위이며(책임자가 卿) 개칭된 명칭이 典祀署인 점을 들어 5廟制의 제사를 관장한 기관일 가능성이 있다(申瀅植,≪新羅史≫, 이화여대 출판부, 1985, 130쪽). 동시에 神宮 5廟의 祭堂이나 부속건물의 修築을 맡는 기관일는지도 모른다. 內省의 詳文師, 御龍省의 崇文臺 등은 무열왕통의 廟制와 祭典이나 자료수집 및 국사편찬을 위한 직무를 다했으리라 본다.1020)申瀅植, 앞의 책(1990), 221쪽. 그것은 빈번한 당과의 교섭과정에서 당의 史官制의 영향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당의 사관기능은 3省·秘書省·御史臺·國子監·東宮 등 관리의 兼職官이 갖고 있어,1021)張榮芳,≪唐代的史館與史官≫(臺北, 1985), 147∼148쪽. 신라의 경우 공식적인 사관제도가 없었다고 하여도 국사편찬이 가능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에 역사편찬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성덕왕대에 金大問의≪花郞世紀≫나≪鷄林雜傳≫과 같은 사서의 私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사학의 편찬에 있어서 관찬이 사찬을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며, 기존의 관찬국사 토대위에 사찬국사가 편찬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1022)申瀅植, 앞의 책(1990), 222쪽. 화랑의 이야기인≪화랑세기≫나,1023)1989년에 金海에서 필사본≪花郞世紀≫가 발견되어, 그 진위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그 내용으로 보아 당시 김대문의 저술이라기 보다는 후대의 저술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한 연구성과는 아래와 같다.
權悳永,<筆寫本≪花郞世紀≫의 사료적 검토>(≪歷史學報≫123, 1989).
鄭在鑂,<새로 발견된≪花郞世紀≫에서 본 花郞史>(≪金正基博士華甲紀念論叢≫, 1990).
李鍾學,<筆寫本≪花郞世記≫의 사료적 평가>(≪慶熙史學≫16·17, 1991).
盧泰敦,<필사본≪花郞世紀≫의 사료적 가치>(≪歷史學報≫147, 1995).
李鍾旭,<≪花郞世紀≫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韓國史硏究≫97, 1997).
불교수용의 이야기인≪계림잡전≫은 공식적인 국사(왕의 사적)가 편찬된 이후에야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김대문의 저서를 통해 본 그의 역사인식이 ‘신라사 중심과 객관적인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反儒敎的 또는 反專制主義的인 경향’으로 이해되고 있으나,1024)李基白,<金大問과 그의 史學>(≪歷史學報≫77, 1978), 8∼14쪽. 그가 주로 활동한 시기가 성덕왕 때이며, 漢山州都督으로 활동한 사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성덕왕때는 전제왕권이 절정기에 이른 때이며, 빈번한 親唐外交로 유교정치사상이 크게 발달한 시기임은 물론, 반전제주의적인 인물을 북방경영의 책임자로 임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오히려 전제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중대왕권을 뒷받침하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1025)趙仁成,<三國 및 統一新羅의 歷史敍述>(≪韓國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1985), 24∼26쪽. 이러한 추측은 국사편찬이 왕권강화의 기념비적 성격이라는 점과 당의 사관제도에 대한 폭넓은 이해과정에서 가능하리라 여긴다. 따라서 숙위학생들의 유교정치이념에 대한 욕구는 자연히 국사편찬에 대한 중요성을 제시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보아 신문왕 때는 적어도 武烈·文武王史를 중심으로 한 국사편찬이 가능하였으며, 그 중심기관이 국학을 비롯한 몇 개의 중앙관부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국사편찬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 김대문일 가능성이 크며, 그리고 거기에 빠진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계림잡전≫일 수 있다고 추측된다.1026)申瀅植, 앞의 책(1990), 222쪽.

 그리고 나말에 이르면 中事省·宣敎省 등 근시기구가 발달하고 瑞書院·崇文臺·翰林院 등 문한기구가 확장되는데, 이는 측근정치의 지향이나 왕권강화의 길을 촉진해 주기 때문에1027)李基東, 앞의 책, 247∼267쪽. 역사편찬의 구체적 가능성은 배제시킬 수 없다. 당의 史官이 門下侍郞 등 3省의 관직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다음이 秘書省·國子監 및 東宮官임을 고려할 때,1028)張榮芳, 앞의 책, 148∼149쪽. 宿衛學生의 관직에서 최치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崔彦撝(執事侍郞瑞書院學士)·金薳(守兵部郞中兼 崇文館直學士)이나 姚克-의 中書省 中舍人1029)申瀅植, 앞의 책(1990), 224쪽. 등은 사관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특히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국사편찬에 관계했음직한 인물을 金石文이나 문헌에서 찾아보면<표 4>와 같다.

인 명 관 직 출 전
金立之 翰林郞·秋城郡太守 昌林寺無垢淨塔願記
崔 賀 韓林郞·謝恩謙宿衛判官 大安寺寂忍禪師 照輪淸淨塔碑
崔致遠 前守兵部侍郞充瑞書院學士 鳳巖寺 智證大師寂照塔碑·三國史記
崔愼之 檢校尙書左僕射御史大夫瑞書院學士 菩提寺 大鏡大師玄機塔碑·三國史記
朴仁範 翰林學士 瑞書學士 興寧寺 澄曉大師寶印塔碑·東文選
朴居勿 侍讀右軍大監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朴 邕 侍讀翰林 桂苑遺香
金仁圭 守翰林郞 桂苑筆耕
金 薳 崇文館直學士 儒林郞 沙林寺 弘覺禪師碑 寶林寺普照禪師碑
金口炷 前國子監卿 沙干 開仙寺 石證記
李奐相 左僕射兼 御史大夫 廣照寺 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具足達 前與文監卿 淨土寺 法鏡大師慈燈塔碑
金 遠 前翰林學生 龍頭寺幢竿記
孫仁謙 大舍學院郞中
李夢遊 翰林學士 前守兵部卿 鳳巖寺 靜眞大師 圓悟塔碑
張端說 文林郞 翰林院書博士
金廷彦
 
太丞翰林學士 內奉令 前禮部使
參知政事 監修國史
高達寺 元宗大師 惠眞塔碑
 

<표 4>나말여초의 國史編纂 관계 인물

 <표 4>에 의하면 나말여초의 금석문에는 翰林學士·瑞書學士·御史大夫·國子監卿·監修國史 등이 눈에 뛴다. 이러한 문한기관과 어사대부나 감수국사 등 사관의 존재는 국자감경의 출현과 함께 나말의 국사편찬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光宗 26년(975)의 감수국사(金廷彦)의 존재는 나말여초 국사편찬이 있었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또 여초에 翰林院令으로 활약한 최언위를 비롯하여 김원·이몽유·김정언 등이 한림학사였으므로, 한림원 3품 이하의 관리가 修撰官이 되었다는≪고려사≫의 기록에서도 국사편찬이 증명된다.1030)<慶州崇福寺碑銘>(≪朝鮮金石總覽≫上), 124쪽. 이는 최치원의≪帝王年代曆≫이나 그가 읽은≪鄕史≫와 관련이 크다고 하겠다.1031)李基白 외, 앞의 글, 12쪽. 다시 말하면≪제왕연대력≫은 왕권강화를 위한 저술일 수밖에 없으며,1032)申瀅植, 앞의 책(1990), 227쪽. 최치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역사편찬은 傳統史學 정착의 계기가 되었고, 고려왕조로 연결되어 여초의 왕권강화나 實錄編纂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1033)申瀅植, 앞의 책(1990), 228쪽. 무엇보다도 나말의 宿衛學生들의 유교정치이념에 대한 주장은 왕권강화수단으로서 科擧制의 실시 외에도1034)申瀅植, 앞의 책(1984), 455∼458쪽. 국사편찬의 길을 마련함으로 고려초의 문화적 공백을 메꾸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035)申瀅植, 앞의 책(1990), 229쪽.

<申瀅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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