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2. 불교철학의 확립
  • 1) 교학의 발달
  • (3) 화엄교학

가. 의상의 생애와 활동

 義相(625∼702)은 삼국의 쟁패권 다툼이 치열하던 眞平王 47년(625)에 신라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1076)≪三國遺事≫권 4, 義解 5, 義湘傳敎.
≪宋高僧傳≫권 4, 唐新羅國義湘傳.
鄭炳三,<義相 傳記의 諸問題>(≪韓國學硏究≫1, 淑明女大, 1991).
金杜珍,<義湘의 生涯와 政治的 立場>(≪韓國學論叢≫14, 國民大, 1992;≪義湘-그의 생애와 화엄사상≫, 민음사, 1995, 49∼82쪽).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87∼98쪽.
그는 20세 미만의 청소년기에 출가하여 초기에는 그보다 8세 위인 元曉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며 교학의 탐구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의상은 圓光과 慈藏으로 이어지며 기반을 쌓아온 攝論學 등 신라 唯識學을 중점적으로 연마하였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현장의 新唯識을 배워오고자 眞德王 4년(650) 육로로 중국을 향해 떠났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에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의상은 원효와 함께 普德을 찾아 열반과 방등 등의 대승교학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의상은 다시 문무왕 원년(661)에 중국 유학길에 나서서, 중도에 포기한 원효와 달리 해로를 통해 중국에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의상은 이듬해에 그가 신라에서 익혔던 교학과도 연관성이 있는 새로운 화엄교학을 정립해가던 終南山의 智儼을 찾아갔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화엄교학의 축적 위에 觀行의 실천을 중심으로 화엄종의 문호를 연 杜順(557∼640)을 이어 지엄(602∼668)이 중국불교 교학을 집대성하고≪화엄경≫의 교설을 바탕으로 一乘圓敎 華嚴의 중심사상을 法界緣起說로 정립시켜가고 있었다.1077)鄭炳三,<中國 華嚴宗의 形成과 義相>(≪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418∼425쪽.

 의상은 10년에 가까운 중국 수학시절을 보내며 중국 화엄종을 완성하는 法藏과 동문 수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화엄교학 외에도 南山律宗의 완성자인 道宣과 깊은 교유를 가져 청정한 수도인의 자세를 체득하였다. 그리고 지엄 문하에서 연마한 화엄교학의 정수를 문무왕 8년(668)에≪一乘法界圖≫로 체계화하여 지엄에게 인가받았다.

 의상은≪일승법계도≫를 지은 근본 의의를 華嚴一乘의 緣起法을 밝히는 데 두었다.≪일승법계도≫의 화엄사상은 지엄의 사유구조를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적 관점에서 상징적인 圖印에 화엄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아 一乘法界의 緣起 구조를 中道的 바탕에서 치밀한 구성으로 특색있게 전개시킨 것이었다.1078)鄭炳三,<義相의 華嚴緣起思想>(≪伽山學報≫2, 1993), 69쪽. 지엄보다 진전된 의상의 화엄사상은 새로운 불교철학 형성에 노력하던 신라 불교계에 한단계 진전된 사상체계를 제시하는 사상적 성과였다.

 의상은 중국에서 수학한 후 문무왕 11년(671)에 귀국하였다. 이때 신라는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패망시킨 뒤 그 遺民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唐과의 민족적 결전을 치루고 있었다. 의상은 당군의 침공이라는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明朗이 주도한 秘密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의상은 자신이 체득해 온 화엄사상을 펴나갈 전법도량을 물색하면서 동해변 洛山의 굴에 관음 眞身이 산다는 말을 듣고 두 차례의 7일 정진 끝에 관음 진신을 친견하고, 洛山寺 金堂을 짓고 塑像 관음과 두 보주를 안치하였다는 설화를 남겼다.1079)鄭炳三,<統一新羅 觀音信仰>(≪韓國史論≫8, 서울大, 1982), 38∼39쪽.

 이 시기에 그는 출가 본사이기도 한 皇福寺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이끌며 화엄교학을 강하였다. 문무왕 14년에 表訓과 眞定 등 십여 제자들이 의상을 따라 法界圖印을 배우는데, 여기에서 강의내용의 의문점을 물으면 그를 하나하나 일깨워 주어 조직화된 교학체계를 전수시키는 면학 분위기를 볼 수 있다.1080)≪法界圖記叢髓錄≫上-1(≪韓國佛敎全書≫6, 775쪽中∼776쪽上). 화엄을 강의하면서 문도를 양성하고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그 사상체계를 이해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가 황복사에 있을 때 徒衆들과 탑돌이를 하는데 그들이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허공으로 석자나 떠올라 돌았는데, 이에 의상이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는 설화적 사실은 바로 화엄교학을 신라사회에 펴나가는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의상은 당군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 16년에 국가의 지원을 얻어 太白山에 浮石寺를 창건하였다. 다양한 승려들에게 각기 역할을 분담시켜 국가운영에 참여시키던 문무왕은 화엄사상을 새로 들여온 의상에게 부석사를 중심으로 敎團체제를 이루어 가도록 지원하였던 것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5백 명의 權宗異部僧이 이를 반대하여 의상을 외호하던 善妙龍이 浮石의 神變을 부린 다음에야 순조롭게 이루어졌음을 기록은 전한다. 이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야 가능했던 부석사 창건의 어려움을 寺名과 연결지은 부석설화에 담아 극화시킨 것이었다.

 의상은 이후 부석사를 중심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의 천연동굴이나 초려에서 제자들과 화엄사상을 연마해 나갔다.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法界圖 사상을 익히게 하여 이의 체득에 대한 상징으로 法界圖印을 수여하는 문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의상은 중국에 가기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선배 道友인 원효와 귀국 후에도 계속 교유를 이어갔다. 원효는 지엄의 교설을 전달하는 중에 생긴 교학상의 의문점을 해결하기도 하였고, 의상은 화엄을 강의하면서 원효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호교류를 통하여 두 사람은 각자의 사상체계를 정비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의상은 사상을 이론으로서만 이해하지 않고 그 이론의 실천을 중시하며 열심히 수련하였다. 그가 평소 실천하였다는 洗穢法은 몸을 씻고 나서 수건을 쓰지 않고 그대로 마르도록 서서 기다릴 정도의 청정행이었다. 그리고 三衣一鉢 이외에는 다른 아무런 持物도 갖지 않는 청정 持戒行을 앞장서 실천하였다. 그래서 국왕이 그를 흠모하여 田莊과 奴僕을 주자, 佛法은 평등하여 위 아래 사람이 함께 나누어 쓰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켜 나가는 것으로≪열반경≫에서도 八不淨財를 이야기했는데 어찌 莊田을 가지며 노복을 부리겠는가, 다만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농사지어 법신의 혜명이 이 몸을 의지해 사는 것이라고 이를 거절하였다. 여기서 의상으로 대표되는 당시 승려의 국가·사회관을 살필 수 있다.

 많은 축성사업을 전개한 문무왕은 재위 21년(681)에 京城을 새롭게 수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상은 글을 보내어 왕의 政敎가 밝으면 草丘로 경계를 정해 놓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여 복이 되지만, 정교가 밝지 못하면 여러 사람을 수고스럽게 하여 長城을 쌓더라도 재앙이 그치지 않으리라고 강력히 축성 중지를 건의하여 중지시켰다. 의상은 기층민의 경제적 안정이 국가의 기본적인 힘이 되며 그들의 정신적 안정이 사회안정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통일 이후 국가체제를 재편해가면서 강화된 왕권을 과시하려던 작업의 일환으로 시행하려는 과도한 토목사업 등을 반대하는 적극적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교단에서 엄정한 수행자세를 강조한 것은 통일기 불교계의 내부정비 및 새로운 기풍 진작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교단정비와 짝하는 것이고, 의상이 강조한 수행자세도 이런 추세와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것이었다. 통일기 초기의 새로운 사회경제체제 시행에 따라 교단에서도 계율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국가체제에 보조를 맞추어야 하였을 것이고 의상이 선도하였던 수행자의 자세는 이러한 당시 사회상황에 부합되는 윤리였다. 통일 이후의 사회안정을 민생의 안정이라는 기본구도 속에서 파악한 의상의 사회의식은 개인적인 실천과 대민시책에서 정확하고 절실한 것이었다.1081)鄭炳三,<義相 華嚴사상의 사회적 의의>(≪민족불교≫3, 청년사, 1992), 198∼199쪽.

 의상은 청정한 수행인의 자세를 개인 차원에 머물러두지 않고 새로운 의식을 열망하고 있던 당시 신라사회 전반에도 광범위하게 전개시킴으로써 능동적인 시대의식을 제시해 보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상의 연찬보다 그의 화엄사상 체계와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信仰을 그 실천행동으로 선택하고, 당시 신라사회 전반에서 무르익어가던 觀音과 彌陀信仰 체계를 華嚴經說을 바탕으로 정립하여 그의 활동의 중심적인 지향처로 삼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의상은 현실구제적인 관음신앙을 보다 확실한 기반 위에 정착시키고자 華嚴經說에 토대를 둔 眞身常住 관음신앙을 열어 보였다. 신라 대중을 구제하고자 실제로 신라땅 낙산에 머물고 있는 관음을 확인시켜주는 진신상주 신앙은 관음신앙의 수행자들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구제를 확신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이는 중고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온 佛國土說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의상은 관음신앙과 함께 미타신앙을 화엄교단의 중심 신앙으로 전개하였다. 의상이 개창한 華嚴宗刹 부석사는≪觀無量壽經≫의 경설에 기반을 두어 구품을 거쳐 무량수전의 극락세계에 이르도록 하고, 本堂 無量壽殿에는 종찰의 주불로 아미타불만을 봉안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세속적 현실의 이면을 직시함으로써 자신을 정화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회의 정화에 매진하여 얻는 즐거움이 바로 極樂淨土이며, 이것이 자신의 마음의 땅으로 열리는 것을 수행자의 도량에서 실재화시켜 나타낸 것이 부석사 가람이었다. 의상이 華嚴宗團을 중심으로 미타신앙을 천명한 것은 교단체제와는 거리를 둔 교화승들의 성과 못지 않은 큰 영향력을 신라사회에 끼쳤다.

 이처럼 의상이 전개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은 통일기 신라사회가 지향하던 새로운 사회 안정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의상이 주도하는 화엄종단 내에는 眞定이나 智通 등과 같이 기층민 출신의 제자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平等의식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교단 내에 한정된 의식이었다. 당시 신라사회에 넓게 기반을 확보해 가던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은 骨品制 身分社會의 제한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현실적인 요구 수용과 사후 안락의 기원이라는 일반성 때문에 교단 밖에서도 계층에 구분없이 전개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의상이 실천과 전파에 주력한 관음과 미타신앙은 화합적 의식으로서의 의미도 지니는 것이었다.1082)鄭炳三,≪義湘 華嚴思想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193∼194쪽.

 반면에 이와 같이 실천을 중시함으로써 교학사상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노력을 보이지 않은 의상의 태도는 法藏의 주요 저술들이 저자 자신에 의해 의상에게 보내지는 7세기말까지 그의 법손에 의한 화엄교학의 활발한 연구 진전에 장애가 되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활발한 사상 연찬을 거듭해온 유식이 신라불교 교학의 연구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독자적인 교학과 돈독한 수행 그리고 신앙으로 교단을 이끌던 의상은 중대의 안정기가 시작되어가는 효소왕 11년(702)에 入寂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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