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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시계와 물시계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시계 가운데에는 분명히 해시계와 물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시계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던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경주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화강석 유물은 흔히 신라의 해시계라 여겨진다.1149)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75), 61∼63쪽. 원래 둥그런 원판 모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화강석은 지금 원판의 4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는 파편인데, 반지름이 33.4cm이고 가장 두꺼운 부분의 두깨가 16.8cm라 밝혀져 있다. 子에서 卯까지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부분이 남아 있다. 만약 이것이 해시계라면 원래 둥글게 모든 부분이 있어서 그 가운데 바늘을 세워두고 그 그림자가 떨어지는 방향이 시각을 나타내게 만든 것이라는 가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유물이 신라의 해시계였던가는 지금 단정하기 어렵다. 어떤 종류의 占치는 데 사용하던 기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30년 경주의 성곽에서 발견된 이 돌파편에는 시간의 단위로도 사용되었던 12지의 일부 글자가 새겨져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시간을 나타내려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12지란 방향을 나타내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경주 성곽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신라시대의 것이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없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의 해시계의 모습을 알려주는 증거는 절대로 부족하다. 그러나 당시 해시계가 사용되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 형태의 것이었으나, 다만 그 구체적 증거를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물시계 역시 구체적으로는 그 모양을 알기 어렵다. 물론 물시계야말로 더 정확한 시계로 사용되었을 것도 사실이다. 낮 시간에만, 그것도 해가 비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해시계와 달리 물시계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같은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재어 주기 때문에 어느 문명에서나 기준시계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는 문헌에 드러난 것으로는 성덕왕 17년(718) 6월에 처음 물시계(漏刻)를 만들었고, 역시 같은 시기에 漏刻典이란 관청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1150)≪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7년 6월·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8년 3월·권 38, 志 7, 漏刻典·권 39 志 8, 天文博士. 여기에는 博士가 6명, 史가 1명 배치되었다. 앞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경덕왕 8년(749)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는 기록은 조금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각박사가 6명은 아니었다 해도 몇 명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 땅에 처음 물시계가 사용된 경우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물시계의 사용은 그보다는 훨씬 앞서부터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그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만 해도 첫 물시계의 기록은 무열왕 7년(660)에 기록되어 있다. 그 해에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황태자가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에게 시간을 알게 했고, 天智 10년(671)에는 그 물시계를 위해 새로운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시계를 세웠으며, 시각을 알리기 위해서는 종과 북을 처음으로 쳤다고까지 기록되어 있다.1151)≪日本書紀≫권 26, 齋明 6년 5월·권 27, 天智 10년 4월.
영어 번역판(Aston·Nihongi·Tuttle, 1972, 265쪽)에는 古制蓮漏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5단계 물시계 상상도가 있다.
보다 구체적 내용이라는 점에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천문학 등의 수준이란 삼국의 학자 지식인들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고 있던 때였음이 밝혀져 있다. 일본에서 이런 물시계가 무열왕 7년경에 사용되었다면 한반도에서는 그보다 앞서 비슷한 물시계가 사용되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 역사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시간측정 장치가 사용되었는지 기록이나 유물이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초 세종 때에 가서야 그런 기록이 분명하게 많아진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여러 가지 해시계와 물시계들이 사용되었을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면 무열왕 2년(655) 10월 月城 안에 鼓樓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1152)≪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렬왕 2년 10월. 고루란 분명히 북을 달고 시각을 알려주는 시설로 만든 것이므로 여기 사용된 시보장치인 북을 울리기 위해서는 그 표준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근처에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에서도 天智 10년(671) 4월 물시계를 새로운 대에 세우고, 처음으로 시각을 알릴 때 종과 북을 쳤다는 기록이 보인다는 점이다.1153)≪日本書紀≫권 27, 天智 10년 4월. 일본보다 약간 앞서 신라가 비슷한 고루 또는 종각을 세우고 물시계로 시각을 측정하여 북과 종을 쳐 시각을 알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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