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이전에도 중국의 수학서가 들어와 이미 상용하고 있던 수학 수준에 걸맞는 지식을 뒷받침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구체적 증거로는 통일 후의 수학교육에 관한 기록에서 알 수가 있다. 神文王 2년(682)에 시작한 國學은 통일신라가 당나라를 본받아 시행한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1163)≪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國學. 성덕왕 16년(717) 봄 2월에는 醫박사와 算박사 각 1명을 두었다는 기록도 여기 있다. 이 국학은 景德王 때에는 大學監이란 이름으로 바꾼 일도 있었는데, 주로 경서와 역사서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언제부터 산학을 교수했던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산학 박사와 조교가 가르치는 책은 여기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綴經≫·≪三開≫·≪九章≫·≪六章≫의 네 가지 책이 그것이다.≪철경≫이란 당나라에서도 과거에서 사용되었던 교과서인 중국 수학자 祖沖之(429∼500)의≪綴術≫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당나라의 교과서였던 이 책은 아주 어려운 책이어서 4년이라는 가장 긴 수업연한을 주었던 책으로 전해지지만, 그 후 전해지지 않는 책이다.≪구장≫은 후한시대 완성된 중국 수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九章算術≫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그 후 줄곳 산학교육의 기본교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머지 두 가지 책은 정확히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육장≫이란 책은 혹시≪구장산술≫을 줄인 책이거나 또는 그에 준한 다른 책으로 6장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 것이지만, 그 비슷한 제목의 책으로 지금 전해지는 것이 없다.≪삼개≫역시 내용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신라에서 사용했다는 4가지 수학교재는 같은 시기 일본에서 사용한 교재 가운데에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명히 그런 이름의 책들이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사용되다가 일본에도 전해져 그들의 교재가 되었을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1164)김용운·김용국,≪한국수학사≫(과학과인간사, 1977), 83쪽.
도량형은 아직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 이미 여러 가지 도량형 단위가 사용되고 있었고, 또 이를 사용하여 건조물의 칫수가 표시되기는 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통일신라는 고구려척, 중국에서 온 周尺, 그리고 唐大尺 등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1165)박성래,<한국도량형사>(≪한국의 도량형≫, 국립민속박물관, 1997),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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