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3. 과학과 기술의 발달
  • 2) 땅의 과학과 기술
  • (4) 쇠붙이의 기술

(4) 쇠붙이의 기술

 금속기술의 발달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그 방면의 작품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수많은 범종·불상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공예품에서 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장신구·마구·무기 등의 여러 가지 금속제품이 제작 사용되었고, 일부 남아 전해진다.

 통일신라 때의 대표적 금속기술 유물 가운데 지금 가장 유명한 경우로는 범종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범종으로는 지금까지 모두 11개 만이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강원도 오대산의 上院寺鐘으로 聖德王 24년(725)에 만들었고, 그 다음이 惠恭王 7년(771)에 만든 聖德大王神鐘(일명 에밀레종)이다. 상원사종은 종 꼭대기에 새겨 놓은 명문에 의하면 놋쇠 3,300鋌을 써서 만들었다고 되어있고, 성덕대왕신종은 역시 종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12만 근의 구리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측정한 값으로는 상원사종은 1,290kg의 무게를 가지고 있고, 성덕대왕신종은 약 20톤 가까운 무게로 추정되어 있다. 또 신라의 종 이후 한국종의 주석(Sn) 합금량은 12∼18%로 밝혀져 있다.1182)廉永夏≪韓國의 鐘≫(서울大 出版部, 1991), 39·43쪽.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종은 이웃 일본과 중국의 범종과는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음은 주목된 바 있다. 특히 한국종에만 특이하게 꼭대기 부분에 음통·음관, 또는 甬筒이라고도 불리워 온 원통이 달려 있다. 그 과학적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연한 설명이 인정되어 있지 않지만, 종소리를 좋게 해주는 어떤 음향학적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특히 1,051글자의 긴 설명을 새겨 놓은 성덕대왕신종의 鐘銘에는 이 종을 실제로 만드는 데 관여했던 기술자 4명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들은 鑄鍾大博士 大奈痲 朴從鎰, 次博士 奈麻 朴賓奈, 나마 朴韓味, 大舍 朴負岳 등이다. 그런데 이들 기술직보다 앞에 새겨진 더 고위직의 일반사무 담당자로 보이는 이름 9명은 모두 김씨이고, 이들 기술직 4명은 모두가 박씨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시기의 가장 큰 종은 경덕왕 13년(754)에 제작되었던 皇龍寺鐘이었다. 그것은 무게가 거의 50만 근(497,531근)이나 되고, 높이 1장 3촌, 두께 9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1183)≪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鐘. 이 시기에 여러 가지 큰 불상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금속기술의 발전 때문에 가능했다. 그보다 2세기나 앞서서 불교진흥을 위해 진력한 진흥왕이 세운 황룡사에는 큰 규모의 불상이 세워졌다. 皇龍寺丈六像은 진흥왕 27년(566) 황룡사가 완공된 지 8년 후인 진흥왕 15년에 완성되었는데, 여기에는 35,007근의 구리와 도금을 위한 금 10,198푼(分)이 들어갔다고≪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아주 똑같은 자료를 기록해 전하고 있다.1184)≪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4년·27년·35년·36년.
≪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丈六.

 불교는 小獸林王 2년(372) 고구려에 처음 전해진 다음 이웃 백제와 신라에도 전해졌다. 그런데 불상을 제작하여 남아 있는 경우로는 법흥왕 26년(539)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처음이다. 우리 나라에는 이것보다 더 일찍 만들었던 불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35년에 완성되었다는 황룡사장륙상은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거작이었다. 35,007근의 구리와 10,198푼의 황금을 사용한 이 불상보다도 훨씬 큰 불상으로는 芬皇寺藥師銅像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경덕왕 14년에 만든 것으로, 황룡사장륙상보다 거의 열배나 되는 크기였는데, 무게가 30만 6,700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 제작기술자가 本彼部의 强古乃末이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1185)≪三國遺事≫권 3, 塔像 4, 芬皇寺藥師.

 아직 확실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통일신라 시기에는 금속기술이 발달하여 이런 대규모의 범종과 불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경덕왕 13년에는 50만 근 짜리 황룡사종을 만들고, 바로 다음해인 경덕왕 14년에는 30만 근 짜리 분황사약사동상을 제조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는 天智天皇 9년(670)에 물레방아를 이용한 풀무로 온도를 높여 야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186)≪日本書紀≫권 27, 天智 9년. 8세기 통일신라 시기에는 冶鐵이 큰 규모로 실시되고 있었음을 이런 대형 종과 불상의 제작에서 알 수가 있다. 이런 금속기술을 이용하는 기관으로는 鐵鍮典(뒤의 築冶房)이 있었다.1187)≪三國史記≫권 39, 志 8, 職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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