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2) 차용어

(2) 차용어

 借用語는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접촉하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확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唐과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당과의 접촉을 지속하여 신라는 세계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신라인의 언어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문물의 수입에 따라 한문과 한자가 받아들여지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자어가 대량으로 국어에 수용되었다.

 한자어의 증가 양상은 우선 인명의 한자어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금석문에는 姓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 대신 그 출신지가 표시되어 있다.<丹陽新羅赤城碑>(540년대)에는 大衆等(직책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喙部 伊史夫智 伊干□

喙部 西夫叱智 大阿干□

沙喙部 武力智 □□□

 즉 앞에는 출신지인 6部의 명칭 탁부·사탁부 등을 쓰고 다음에는 인명과 관등명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이는 출신지가 성과 같은 구실을 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인 화엄경사경의 참여인 명단도 역시 성이 없이 출신지만 표시되어 있다.

紙作人 仇叱珍兮縣 黃珍知 奈麻

經筆師 武珍伊州  阿干 奈麻 異純 韓舍 今毛 大舍 義七 大舍

    南原京   文英 沙彌 卽曉 大舍

    高沙夫里郡 陽純 奈麻 仁年 大舍 屎烏 大舍 仁節 大舍

 이는 이 시대에도 삼국시대의 관습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가 중국식 성을 쓴 것은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新·舊唐書≫에는 왕이 金眞平이라는 기록과 왕의 성은 金氏, 귀인의 성은 朴氏이며 백성은 氏는 없고 이름만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서 삼국시대에도 왕의 성을 표시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신라시대 금석문은<감산사불상조성기>로 여기에 金志誠(金志全)의 이름이 보인다.<성덕대왕신종명>에는 大奈麻 金□□, 級湌 金弼奚, 大角干 金邕, 角干 金良相, 阿湌 金敬信, 奈麻 朴韓味 등 김씨와 박씨의 성씨가 보인다. 이 신종명의 인명은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비문의 형식이나 표현이 정통적인 한문인데다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듯 갖추어야 할 격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러한 격식이 이 명문으로 하여금 참여인들의 성을 모두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이루어진 이두문으로 된 조성기들이 출신지와 이름만을 기록하였고 고려의 건국에 참여하였던 공신들의 이름에 성씨가 없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신라말까지도 성을 사용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그 사용도 한정된 범위였을 것이다.

 신라 통일 이후 한자어화된 인명을 흔히 볼 수 있다. 위의 불상조성기와 신종명에 나오는 인명들이 그를 직접 보여주는 예들이다. 인명의 한자어화는 불교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의 기록인<黃草嶺眞興王巡狩碑>(6세기 중엽)에 나오는 隨駕沙門의 이름은 法藏·慧忍으로 이는 한자어로 된 法名이다. 중신들의 이름인 伊史夫智·居七夫智 등이 고유어 이름임을 생각하면 이른 시기부터 불가에서는 이미 한자어식 법명을 사용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후의 자료에 나타나는 승려들의 법명은 모두 한자어여서 이것이 한국인들의 이름을 한자어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활을 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신라의 상류사회에서 한자이름을 쓴 것은 왕의 시호를 처음으로 올린 것이 法興王이니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眞興王의 이름은 彡麥(深麥)인데 그의<황초령순수비>와<北漢山巡狩碑>에는 眞興大王으로 기록되었으니 이 한자어 이름은 왕의 생존시에 이미 사용하였던 것이다. 眞平王의 이름 白淨, 太宗武烈王의 春秋, 文武王의 法敏이 모두 한자어 이름인데 삼국통일 후의 왕명도 모두 한자어 이름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왕의 이름에 비하여 신하들의 이름이 한자어화한 것은 이보다 뒤의 일이다. 金庾信·金仁問·金歆運·薛聰 등이 한자어 이름이고 위에 든<성덕대왕신종명>에 나오는 이름들도 한자어 이름임을 보면 신라 통일 후에는 중신들 사이에서 한자어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자어 이름을 사용했어도 후대의 관명과 같이 한자를 일정하게 정하여 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명을 기록하는 한자를 바꾸어 표기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위의 감산사불상에 나오는 金志誠과 金志全, 그의 아우 良誠과 良全은 동일인의 이름인데도 한 해의 차이를 두고 기록된 두 조상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이는 고유어 인명의 표기 글자가 때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문자기록보다는 음성언어로서의 호칭을 더 중시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지배층의 이름 가운데도 위에서 든 朴韓味의 韓味는 고유어 이름 ‘한맛’일 것으로 믿어지고<황룡사탑찰주본기>의 朴居勿의 居勿도 고유어 이름으로 보인다. 중국식 성을 쓰면서도 이름을 고유어로 쓴 것은 이 시대의 지배층에서도 고유어 이름이 널리 쓰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향은 서민층에서 더 심하였다. 우리는 張保皐의 이름에서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弓巴·弓福으로도 쓰이는데 巴나 福은 사내아이를 나타내는 巴只(보기)에서 온 것이다. 고려시대 호적을 보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아명으로 巴只라고 했다가 나이가 들면 관명으로 바꾸는데 신라시대에는 어른이 되어 관직을 가지면서도 이 아명을 그대로 쓰는 예가 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는 상류층 여성들은 이름을 갖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신라시대에는 여성들도 이름을 갖고 있었다.<감산사불상조성기>에는 觀肖里(官肖里)·古巴里(古寶里)·古老里(古路里)·阿好里·首兮買里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접미사 ‘-里’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존칭의 표시일 것으로 보인다. 古巴里(古寶里)의 어원은 ‘곱다’에서 왔고 古老里(古路里)는 중세국어의 ‘골(美貌)’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후대에 여성의 이름으로 흔히 쓰인 ‘아기’·‘아지’란 이름도 이 시대에 이미 쓰였다. 김유신의 누이인 寶姬의 小名인 ‘阿海’와 文姬의 소명인 ‘阿之’가 이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희·문희가 말해주듯 여성의 이름도 한자어화하고 있다. 이는 물론 상류층의 경우이다. 眞平王妃의 이름인 摩耶夫人은 불교적 영향이 있는 한자어 이름이다. 武烈王妃부터는 시호가 주어졌다. 文明王后가 그것인데 그의 또다른 이름인 訓帝夫人은 생시에 쓰던 한자어 이름이다. 慈儀王后(文武王妃)·神穆王后(神文王妃)·陪昭王后(聖德王妃) 등도 생전에 쓰던 한자어 이름이었고 그 시호는 따로 주어졌다. 이러한 한자어 이름은 왕실과 그를 둘러싼 일부 상층에 한정되고 대부분의 여성 이름이 고유어로 지어졌을 것임은 앞의 감산사불상의 예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1206)南豊鉉,<韓國人의 이름의 變遷>(≪새국어생활≫1-1, 국립국어연구원, 1991) 참조.

 景德王 16년(757)에 전국의 州·郡·縣名을 한자어로 바꾸었다. 종래 2자 내지는 3자로 표기하던 고유어의 지명을, 주는 한 글자의 한자 이름으로 부르고 군과 현은 두 글자의 한자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沙伐州는 尙州로, 歃良州는 良州로, 漢山州는 漢州로, 完山州는 全州, 武珍州는 武州와 같이 바꾸었고, 古陁耶郡은 古昌郡으로, 古尸山郡은 管城郡으로, 吉同郡은 永同郡으로, 推火郡은 密城郡으로 바꾸었고, 柒巴火縣은 眞寶縣으로, 阿火屋縣은 比屋縣으로, 武冬彌知縣은 單密縣으로, 今勿縣은 禦侮縣 등과 같이 바꾸었다.

 새 지명은 종래의 지명과 어떤 有緣性을 가지고 지었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즉 종래의 지명은 한자어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유어였고 지명표기자의 독법도 音讀과 訓讀이 혼용되었다. 그러나 새 지명은 음독을 하는 한자어라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종래의 지명인 推火(郡)은 ‘밀블’로 훈독하였지만 密城郡은 ‘밀성군’으로 음독만하였던 것이다.1207)李基文,≪國語史 槪說≫(塔出版社, 1972), 60쪽 참조. 이것은 매우 큰 개혁이어서 고유어 지명에 익숙해진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부담이었다. 그리하여 경덕왕 이후에도 새로 개정한 한자어 지명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종래의 고유어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다.≪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면 경덕왕 16년 이후의 기록에 屈自郡·居老縣·推火郡 등의 郡縣名과 武珍州·漢山州·揷良州·沙伐州 등 개명 이전의 州名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는 당시 행정상으로도 개명한 새 한자어 지명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려초까지도 이어져 醴泉 鳴鳳寺의<慈寂禪師碑陰記>(941)에는 고려초의 비석인데도 그 속현의 이름을 赤牙縣으로 쓰고 있다. 이는 ‘븕엄(縣)’으로 읽히는 고유어 지명인데 경덕왕 때는 이를 殷正縣으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경덕왕의 지명 개정 후에도 새 지명이 획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영향은 컸던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시대의 지명에서 경덕왕 때 지은 새 지명을 그대로 따른 예들이 많은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신라의 官等名과 官職名은 고유어와 한자어가 섞여 쓰였다. 삼국시대부터 17관등명은 고유어로 정해져 그것이 신라말까지 이어졌으나 관직명은 한자어와 고유어가 혼용되었다. 上大等·大角干·太大角干 등은 한자어와 고유어를 혼용한 것이다. 上·大·太는 한자어로 보이고 大等·角干은 고유어이다.≪삼국사기≫직관지의 한 예를 들어 이 시대 관직명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執事省은 본명이 稟主(혹은 祖主)이었는데 진덕왕 때 執事部로 바꾸었고 흥덕왕 때 집사성으로 바꾸었다. 여기에 中侍가 1인인데 진덕왕 때 두었고 경덕왕 6년(747)에 侍中으로 고쳤다. 典大等은 2인인데 진흥왕 때 두었던 것을 경덕왕 6년에 侍郞으로 바꾸었다. 大舍는 2인인데 진평왕 때 둔 것을 경덕왕 18년에 郞中으로 바꾸었다. 舍知는 2인인데 신문왕 때 둔 것을 경덕왕 18년에 員外郞으로 바꾸었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사지라 했다. 史는 14인인데 문무왕 때 6인을 늘렸고 경덕왕이 郞으로 고쳤던 것을 혜공왕이 다시 史라고 하였다.1208)≪三國史記≫권 38, 志 4, 職官 上 참조.

 이들 관직명도 종래에는 고유어와 한자어가 섞여 쓰였는데 경덕왕 때 한자어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이후에도 사지와 같은 고유어 명칭과 시중·시랑과 같은 한자어 명칭이 섞여 쓰였으나 시대가 흐를수록 한자어화되어 가는 경향이 강한 추세였다.

 고유명사나 관직명에서 우리의 고유어가 한자어화하여 가는 경향은 신라인들이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재래의 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하여 새로운 우리의 문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문화의 수용에 따라 梵語 기원의 차용어가 들어왔다. 그러나 범어에서 직접 차용한 예는 확인되지 않는다. ‘부텨’가 그 직접차용어일 가능성은 있으나 확인하기가 어렵고 그 밖의 단어들도 대개는 한자어화된 것이다. 8세기의 고문서와 금석문에 나타난 범어 기원의 한자어의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佛(<buddha), 菩薩(<bodhisattva), 僧(<samgha), 和上(<<upadhyaya), 沙彌(<sramanera), 維那(<<karmadana), 檀越(<danapati), 菩提(<bodhi), 舍利(<sarira), 齋(<<uposadua), 梵唄(<bhasa).

 이 밖의 외래어는 확인되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시 일본이나 말갈과의 접촉이 잦았으므로 그들에게서 온 단어들이 있음직하나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倭를 향가에서는 倭理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여리’로 해독되는 것으로서 중세국어의 ‘예’에 이어진다.1209)金完鎭,≪鄕歌解讀法硏究≫(서울大 出版部, 1980), 129쪽 이하 참조. 이 ‘여리’가 당시의 일본어에서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자어는 한문의 구조에서 온 것과 국어의 구조에 따라 조어된 것이 있다. 行道爲(-), 勸善爲(-), 見聞隨喜爲賜(-) 등은 한문구조의 한자어들이다. 이에 반하여 당시의 이두문에는 우리말 어순에 따라 신조한 한자어들이 많이 나타난다.<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楮皮脫(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이), 脫皮練(벗긴 껍질을 다듬는 이), 紙作伯士(종이를 만드는 기술자), 經寫筆師(경을 베끼는 필사), 紙作人(종이를 만드는 사람). 이들은 비록 우리말의 어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그 한자를 訓으로 읽지 않고 음으로 읽은 한자어이다.

 한문의 영향으로 한자어만이 차용된 것은 아니다. 고유어의 의미가 한자어의 영향으로 바뀌거나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기도 한다. ‘洑堤傷故 所內使以 見令賜矣/보의 뚝이 상하였으므로 소내사로 하여금 보이시었음(청제비정원명)’의 ‘見令賜矣’는 ‘보이샤’로 읽히는 것으로 여기서의 ‘見/보-’는 단순히 시각적인 ‘보다’의 뜻이 아니다. 중국의 제도에 觀察使가 있어 왕 대신 각 지역을 관찰하여 행정적인 조치를 내리는데 이러한 사실을 ‘見/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보다’의 뜻은<신라장적>에도 나타나는데 ‘內視令’의 ‘視/보-’도 그러한 뜻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또 ‘乙未年 烟 見賜 節 公等前 及白 他郡中 妻 追移/을미년 烟을 보실(관찰하실) 때에 公等 앞에 직접 보고하고 他郡에 妻를 따라 옮겨간 자(신라장적)’의 ‘及白’은 고려초의 帖文인<鳴鳳寺慈寂禪師碑陰記>에도 보인다. 이는 ‘및-’으로 읽힐 것으로 관청이나 관원의 앞에 직접 나오는 것, 즉 ‘出頭하는 것’을 뜻한다. 白은 이 밖에도 관이나 왕에게 ‘보고하다’의 뜻으로 쓰이는데 이들은 한문이나 중국식 제도의 영향이 국어의 단어에 미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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