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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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서예
  • (3) 후기의 선풍 글씨

(3) 후기의 선풍 글씨

 통일신라 후기에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과 함께 미술문화 전반이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유입되었던 외래의 미술양식을 소화하여 이를 신라 고유의 미감으로 토착화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지방호족들의 득세와 더불어 불교계에서 禪門 중심의 불교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각 선문을 대표하는 고승들의 업적을 기리는 풍조가 성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승들의 舍利를 안치하는 浮屠塔을 건립하고 그들의 일대기를 적은 塔碑를 대대적으로 건립하곤 하였다. 탑비의 초기적인 형식은 부도탑 안에 간략한 내용의 塔誌를 안치하는 방식였는데, 원주의 興法寺廉居和尙塔(845?)에서 발견된 銅版製 탑지가 좋은 예일 것이다.

 고승들의 탑비는 당시를 대표하는 명문장가와 명서가들이 명문을 짓고 썼기 때문에 당시의 문필수준과 유행서풍을 살펴보는 데에 절대적 기준이 된다. 수십 기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탑비 가운데 서예사적으로 의미있는 예를 몇몇 든다면 다음과 같다. 金薳과 金彦卿이 쓴 전남 장흥의 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884), 崔致遠이 쓴 경남 하동의 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887), 僧 淳蒙이 쓴 충북 제천의 月光寺圓朗禪師塔碑(890), 僧 慧江(842∼?)이 쓴 충북 문경의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924), 崔仁渷이 쓴 경남 창원의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924)와 충남 보령의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890)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탑비의 서풍은 해서의 경우 대체적으로 초당서풍에 기반했으면서도 각각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후 고려시대 전반기의 탑비에서도 이러한 서풍이 지속되었음을 보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해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는 김원과 김언경이 함께 쓴 특이한 경우로 앞부분 몇행을 김원이 해서로 쓰고 나머지 대부분을 김언경이 행서로 썼는데, 특히 김원의 해서는 구양순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짜임이나 획법에서 매우 뛰어나다(<사진 10>). 또한 최치원(857∼?)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명서가로서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들어가 문필을 널리 떨쳤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류의 刻削한 해서풍을 부드러운 운필과 유려한 획법으로 변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서풍으로 변모시킨 예로 들 수 있다(<사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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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普照禪師彰聖塔碑銘
<사진 10>普照禪師彰聖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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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眞鑑禪師大空塔碑銘
<사진 11>眞鑑禪師大空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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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螭首에 새겨진 그의 篆額 글씨도 자형에 구애받지 않은 신묘한 필치이다. 또한 渡唐留學生으로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868∼944)은 신라말 고려초에 걸쳐 禪門高僧의 탑비를 여럿 썼는데, 글씨는 최치원의 유려한 필치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고풍스런 맛에서는 그를 앞선다. 이 밖에도 구양순체를 잘 구사했던 姚克一(9세기 후반)은 金生·靈業과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명서가로서 경주 흥덕왕릉의 능비(836?)를 썼다고 전하는데, 현지에서 출토된 비편을 보면 구양순·저수량류에 기반한 瘦勁한 글씨여서 기록에 언급된 그의 필력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석비에 새겨진 왕희지체 행서로 몇몇 명서가의 필적을 위시하여 적지 않은 集字碑가 전한다. 우선 명서가의 필적으로 경남 진주 단속사터에 전래하던 것으로 僧 靈業(900년 전후)이 쓴 斷俗寺信行禪師碑(813)를 들 수 있다. 영업은 김생에 버금가는 명서가로 평가되었는데, 이는 그가 集字聖敎序의 골격을 따랐으면서도 굳센 필치로서 일가의 경지를 보였기 때문이다(<사진 12>). 또한 왕희지체 集字碑로서 경주의 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碑(801), 강원도 양양의 沙林寺弘覺國師碑(886) 등이 전하는데, 이것들은 왕희지체 연구에 있어 중국에서도 보기드문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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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斷俗寺信行禪師碑銘
<사진 12> 斷俗寺信行禪師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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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 통일신라시대의 서예사료로서 몇몇 石經이 전한다. 경주 四天王寺址와 昌林寺址에서 수습된 法華石經(9세기 중엽), 남산 七佛庵에서 출토된 金剛石經(9세기 중엽),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의 華嚴石經(886?) 등은 통일신라 寫經 서풍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 가운데 법화석경은 저수량풍에 기반하였고 금강석경과 화엄석경은 구양순풍에 기반하였다. 특히 헌강왕대의 華嚴結社가 이루어진 뒤 정강왕이 아버지 헌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조성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화엄석경은 여러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지만 필치가 고르고 새김이 정교하여 唐代 석경에 못지 않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사진 13>). 이러한 사경서풍과 유사한 예로서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발견의 舍利壺에 새겨져 있는 敏哀大王石塔記(863)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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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華嚴石經師大空塔碑銘
<사진 13>華嚴石經師大空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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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完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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