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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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예술
  • 5) 건축
  • (1) 사원 건축(목조)

(1) 사원 건축(목조)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여러 종파로 분화되면서 불교건축에는 새로운 변화들이 생기게 되었다. 사찰의 숫자는 전시대보다 늘어났으나 사찰의 규모는 오히려 작아졌다. 불교는 敎宗과 禪宗으로 분화되고 교종에서는 5교파, 선종에서는 9산선문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여러 교파로 인해 인적·물적·역량의 분산으로 사찰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사찰의 구성요소가 많아지고 다양화되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山地 사찰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 불교를 융합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산지 사찰을 지으려 함에 平地 사찰에서와 같이 넓고 격식을 갖춘 사찰은 만들 수가 없었다. 즉 회랑은 담장으로 바뀌고 자연지세에 따라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종루·경루가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였고, 이러한 사찰은 望德寺·高仙寺·佛國寺·四天王寺·千軍里 절터 등에서 볼 수 있다.

 종을 만든 기록은 8세기 중엽부터 보인다. 즉 경덕왕 13년(754)의 皇龍寺의 종, 惠恭王 6년(770)∼11년에 완성되었다는 聖德大王神鐘, 哀莊王 5년(804)의 禪林院鐘 등이다. 그러나 기록 이전에 만들어진 종으로는 聖德王 24년(725)의 上院寺鐘이며, 사천왕사의 종루터를 보면 이미 문무왕 19년(679)에 사천왕사의 종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탑뿐만 아니라 浮屠·石燈 등 여러 가지 석조물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이 시대의 가람배치를 보면 쌍탑형식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金堂의 앞쪽으로 대칭의 위치에 탑을 세운 형식인데 이러한 가람은 경주의 사천왕사를 비롯하여 망덕사, 불국사, 천군리 절터 등이 있고 경주군의 感恩寺, 산청의 斷俗寺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고 그 후 폐사된 사찰터만도 경주 시내에 40여 개소에 이른다. 전국적으로는 100여 개소가 넘으며 이 중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확인된 사찰터는 10여 개소 정도이다.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감은사터·망덕사터·고선사터·천군리 사찰터·불국사 등이며 신라시대에 창건되고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변화된 皇龍寺터도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1271)文化財管理局,≪황룡사≫, 1984.

 사천왕사:이 사찰은 문무왕 19년(679) 창건된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식 가람의 최초 사찰이다. 사찰의 남북 길이는 약 105m, 동서 길이는 약 73m이다. 가람의 배치형식은 남북축선 위에 남으로부터 중문·금당·강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금당의 남쪽에 동·서로 대칭의 위치에 목탑을 배치한 형식이다. 또한 금당의 북쪽, 동·서에도 경루와 종루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보인다.

 감은사:이 절터는 경상북도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에 3층석탑과 금당 및 여러 건물들의 기단 유구가 남아 있다.≪三國史記≫및≪三國遺事≫에 의해 신문왕 2년(682)에 이 절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사의 착수는 신문왕의 아버지인 문무왕대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찰터의 발굴조사는 1959년 그리고 1979년∼1980년,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 발굴시에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때 금당터의 石床遺構가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 익랑터도 발견되었다. 2차 때에는 강당 좌우의 건물터가 발견되고 북쪽 회랑은 원래부터 없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동·서 회랑 밖에서 부속건물터가 확인되고 음각된 銘文이 있는 청동제 飯子가 발견되었는데 명문의 내용으로 고려 공민왕 원년(1352)까지는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람배치는 쌍탑식 배치이며 가람의 중심축은 서쪽으로 약 40도 정도 기울어졌고 남쪽으로부터 중문(3×2칸), 금당(5×3칸), 강당(8×4칸)이 놓이고 금당의 양측면 좌우에는 單廊 7칸의 익랑이 붙고 강당의 좌우에도 3×7칸의 크기의 翼舍가 연결되어 있었다. 금당의 앞 양쪽에는 대칭으로 약 38.64m 거리에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1272)김재원, 윤무형,≪감은사≫(을유문화사, 1961).

 망덕사:이 절터는 경주시 排盤洞에 자리잡고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남남동 약 300m 거리에 있으며 금당터와 동·서 목탑터가 확인되었고 그 외의 건물터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 절은 신라 신문왕 4년(685)에 완공되었다. 창건의 연기는 사천왕사와 함께≪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 및 백제의 故地를 2차에 걸쳐 침공하였다. 그런 당의 군사가 실패하자 신라가 사천왕사를 세우고 비법으로 당나라 병사를 격퇴시켰다고 믿고 당나라 예부시랑 樂鵬龜를 파견하여 그 진위를 파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사천왕사 근처에 새로 사찰을 급조하여 당 사신에게 보이면서 당 황실의 만수를 기원하는 절이라 속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때 새로 지은 절이 바로 망덕사이다.

 이 절터는 1969∼1971년 사이에 3차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아직 보고서가 나오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절은 남북 길이가 약 71.5m 동서 길이가 약 60m에 달한다. 가람의 배치는 쌍탑식이며 남쪽으로부터 중문, 금당, 강당이 있고 금당 앞 좌우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탑터가 있다. 중문으로부터 강당에 이르는 동·서쪽에는 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선사:이 절터는 경주시 북쪽 普門池를 지나 暗谷洞의 깊은 계곡 좁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절터는 덕동땜 건설로 수몰되었고 수몰되기 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절터에 있던 3층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건되었다. 가람배치는 金堂院과 塔院으로 분리되어 동·서에 배치된 특수한 형식이었다. 이 사찰의 창건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삼국유사≫에 원효대사가 고선사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효의 入寂 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원효의 입적은 신문왕 6년(686)이므로 이 이전이 될 것이지만 통일전에 건립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이 사찰의 3층석탑 양식으로 보아 감은사보다는 앞선다고 추정할 수 있다.1273)경주사적관리사무소,≪고선사지발굴조사보고≫(1977).

 불국사:불국사는 경주시 진현동에 위치한다. 이 절의 초창은 법흥왕 22년(535)이며 경덕왕 10년(751)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대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현재 지상의 목조건축들은 당시의 것이 하나도 없고 임진왜란 후 중건된 대웅전·극락전·자하문 등이 있고 기타의 건물들은 모두 1972년 신축 복원된 것이다. 강당이였던 무설전과 남회랑은 1902년까지는 있었으나 그 이후 없어졌다. 당시의 유구로는 가람 전면의 대석단을 비롯하여 청운교·백운교·연화교·칠보교 등의 석조물과 대웅전 일곽 내의 석가탑·다보탑 그리고 비로전 앞의 부도 등이 있을 뿐이다.

 이 절의 배치를 보면 우선 크게 3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동쪽 구역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일곽이 형성되고 이 대웅전 구역 서쪽에는 한 단 낮추어 극락전 일곽이 있고 이들 두 구역 북쪽에는 관음전과 비로전 구역이 배치되어 있어 이들 3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 일곽은 현재의 공간이며 극락전 일곽은 미래의 공간, 관음전과 비로전 구역은 과거의 공간을 표현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대웅전 일곽의 배치는 쌍탑식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형식이며 백운, 청운교를 지나는 남북축선 위에 중문인 자하문이 있고 그 북쪽으로 금당격인 대웅전, 그 뒷쪽에는 강당인 무설전이 있으며 대웅전 앞쪽 동·서에는 각각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이들 건물들은 화랑으로 둘러쳐져 있고 회랑의 남서 및 남동쪽 모서리 끝 부분에는 돌출된 종루와 경루가 있다. 극락전 일곽의 배치는 대웅전 일곽의 축선과 평행하게 남북축이 설정되고 그 위에 안양문과 극락전이 있으며 남·서·북쪽에는 회랑이 둘러 막았다. 후방의 비로전·관음전 일곽은 담장으로 주변을 둘러치고 관음전과 비로전은 별도의 공간 안에 배치시키고 있다.1274)문화재관리국,≪불국사≫(1976).

 석굴건축:석굴은 원래 뜨거운 열과 많은 비를 피해서 종교행사를 진행하려고 만든 불전으로 인도에서 널리 유행하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인도에서는 비하라(僧房)·챠이타(佛殿)와 같은 유형이 생기고 한 곳에 수십개의 석굴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석굴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주변국으로 파급되고 우리 나라에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는 이미 삼국시대에 이 영향을 받아 백제의 사찰 이름에도 西穴寺나 南穴寺 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상북도 軍威의 석굴이 있고 유명한 경주 토함산의 石佛寺(石窟庵)와 같은 석굴이 현존하고 있다. 석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연의 암반을 파고 들어가 동굴식으로 불전을 조성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공으로 굴을 만들어 그 위에 흙을 덮어 동굴처럼 만든 불전이다. 경주에 있는 석굴은 인공식 동굴의 불전이며 군위의 석굴은 자연 동굴식 불전이라 할 수 있다. 군위의 석굴은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에 있는 자연 동굴식 석굴로서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조성연대를 보고 있다. 이 석굴은 암반 중턱을 파고 들어가 굴을 만들었다. 석굴 입구의 크기는 직경 약 2m이고 내부는 깊이 약 4.3m, 폭 3.8m, 높이 4.25m의 규모이다. 석굴 안에는 중앙 후면쪽에 높이 2.5m(좌대 높이 포함)의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하고 이 본존불 좌우에는 높이 2m의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경주 토함산 석불사는 인공식 석굴로서 경덕왕 10년(751)에 착수한 것인데 산자락을 약간 잘라 낸 평지에 인공으로 굴을 조립하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자연굴 모습으로 조성한 특수한 형식의 석굴 불전이다. 석굴의 평면은 전실·연도·주실(또는 현실)로 이루어졌으며 주실에는 중심으로부터 약간 뒷쪽에 불상 좌대를 갖춘 본존상을 안치하고 원형 평면의 주실 벽면에는 십대제자상과 십일면관음보살상을 부조하여 배치하고 이 부조 벽면 위에는 10개의 감실을 만들어 보살좌상을 안치하였다. 주실의 상부 천정은 돔구조로 되었는데 돔을 이루는 천정돌은 사이사이에 넣은 힘받이돌에 의지하도록 하고 천정의 정상부에는 원형의 연꽃을 조각한 돌로 마감하여 돔구조의 천정돌을 누르고 있어 그 구조성이 의장상으로나 구조공학상 거의 완벽에 가깝게 조성되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연도의 벽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배치되었고 전실에는 동·서쪽에 팔부중상을 배치하고 연도 입구 좌우 벽면에는 인왕상을 부조하였다. 또한 연도와 주실이 결합되는 부분에는 팔각석주를 세워 주실을 장엄하고 있어 더욱 무게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 석굴은 1914년 일인들에 의해 크게 수리되었으나 석굴 뒷쪽을 콘크리트로 막고 전실 앞쪽은 개방시켜 그동안 습기와 온도 차이에서 발생된 석굴 내부의 풍화작용과 콘크리트의 악영향으로 조각면에 백화현상이 발생하여 석굴 내부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1960년 석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를 거쳐 1963년부터 본격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때 전실 상부는 목구조로 만들어지고 굴 밖에는 2중의 돔이 만들어졌으며 기계설비를 갖추어 내부의 온습도를 조절하게 된 것이다.1275)문화재관리국,≪석굴암≫(1967).

 석조물:통일신라시대의 불교관계 석조물로서는 석탑·부도·석등·석비 등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신문왕 원년(681) 조성된 감은사 3층석탑을 비롯하여 고선사 3층석탑, 불국사 석가탑·다보탑, 천군리 절터 석탑, 원원사 석탑, 창녕 술정리 석탑, 화엄사 사자탑, 정혜사 13층석탑, 실상사 석탑 등이 있다.

 부도는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묘탑으로서 대표적인 부도는 염거화상의 부도를 비롯하여 대안사 적인선사부도, 봉암사 지증대사적조부도,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부도, 실상사의 증각대사부도와 수철화상부도 등이 있는데 형식은 하나는 원당형이고 다른 하나는 종형이다. 원당형 부도는 기단석·부도탑신·옥개·옥개장식으로 이루어지고 사리는 부도탑신에 넣었다. 종형은 기단석 위에 종모양의 부도를 올린 단순한 형식으로 조선시대까지 계속된 부도의 기본형이 되었다.

 석등은 주로 사찰의 불당 앞에 세운 석조구조물로서 통일신라시대에는 8각의 석등이 많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부석사무량수전 앞의 석등과 법주사 쌍사자석등, 화엄사각황전 앞 석등,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영암사지 석등 등이 있다.

 석비는 역사적 사실을 새겨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일종의 기념구조물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비로는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석비를 비롯하여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석비가 있다. 이 시대의 석비들은 거북을 조각한 구부를 받침대로 하고 그 위에 비신을 놓고 뚜껑돌로 용과 구름을 조각한 이수를 얹었다. 석비에 구부와 이수가 처음 나타난 것은 태종무열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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