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5. 예술
  • 6) 음악
  • (1) 역사적 배경

(1) 역사적 배경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국사의 새 지평을 열었고, 또한 민족음악사의 새 전기를 마련하였다. 왕통의 전환에 따라서 통일신라는 왕권의 전제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곧 聖骨계의 왕통이 眞德王(647∼653)대에서 끊기자, 眞骨계 왕권의 전제화가 太宗武烈王(654∼660)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 정치적 흐름이 크게 바뀌었다. 진골계 왕권의 전제화에 따라서 六頭品 귀족 출신의 정치세력이 통일신라의 骨品制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6두품 귀족들이 통일신라시대 음악문화의 주된 향수층이었고, 그들이 통일신라사회의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는 군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존경을 받았던 종교였다. 慈藏·義相·圓測·慧超·元曉는 불교를 신라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이끌어간 신라고승들이었고,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신라의 불교음악은 꽃피울 수 있었다. 한편 神文王 2년(682) 國學의 설립 이후 차츰 6두품 출신의 자제들이 교육을 받음으로써, 유교가 불교에 대항하여 독립된 사상으로 대두되었으니, 强首나 薛聰 같은 인물이 바로 국학 출신의 6두품 귀족들이었다.

 융성한 불교의 사회적 배경 아래서 건조된 불국사와 석굴암, 봉덕사의 梵鍾이나 상원사의 범종은 통일신라사회에 꽃피었던 불교문화의 백미로서 신라인의 審美感과 調和美의 극치를 보여주는 뛰어난 예술품들이다. 우리말 노래인 鄕歌의 등장과 발전이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문학사에 있었으니, 月明師의<兜率歌>나<祭亡妹歌>그리고 忠談師의<安民歌>나<讚耆婆郞歌>는 향가문학의 노른자들이다.

 이 시대 통일신라사회의 음악문화는 향토색이 진한 가무전통의 기반 위에 이웃 나라의 음악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발전단계에 진입하였다. 통일신라의 향악은 고구려악기와 백제악기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성립된 三絃(거문고·가야금·향비파)과 三竹(대금·중금·소금)으로 대표될 수 있다. 가야국의 가야금 및 고구려의 거문고와 향비파가 통일신라의 삼현으로 정립되었고, 백제의 笛 또는 橫笛 및 고구려의 횡적은 삼죽의 뿌리가 되었다. 백제악기와 고구려악기들이 이렇게 신라사회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통일신라는 가야국과 삼국의 향악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한편 일본 궁중에 파견되었던 삼국의 악사와 악생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오래도록 三國樂을 이어 나갔다. 따라서 일본조정의 삼국악은 한국고대음악사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