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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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권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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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체육

(2) 체육

 삼국시대는 정복적 군사적 성질이 명확하여 대내외의 전쟁에 응할 수 있는 인재, 다시 말하면 힘이 강하고 용감한 무사의 양성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장사·병사의 양성은 교육목적의 하나로 되었다.1333)南宮龍權,≪敎育史≫(學文社, 1981), 27쪽. 체육은 무예에 수반하는 전투능력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1334)羅絢成,≪韓國體育史≫(敎學硏究社, 1983), 30쪽.

 전투능력의 양성은 일종의 기능훈련으로 일상의 노동·투쟁·자유유희 등을 통해 행해지기 때문에 합리적이며 교육적인 의도와는 그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신체운동을 통한 인간형성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花郞徒를 들 수 있다. 국가 비상시에 조직된 화랑도는 귀족적 우월의식과 전사적 덕목의 성취를 위해 일치단결하여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그들의 傳記에 상세하게 쓰여 있다. 어떤 화랑은 무예로 어떤 이는 歌樂으로 어떤 사람은 忠孝로 그들의 꽃다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이것은 화랑의 교육에 체육·음악·도덕이 포함되어 있어 그 교육의 목적이 身心의 조화가 잡힌 유용한 인재의 육성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1335)李鎭洙,≪新羅花郞의 體育思想硏究≫(保景文化社, 1990), 151쪽.

 화랑은 남성이면서도 신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화장까지 하였으므로 이것은 화랑이 추구하던 것이 身體美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들이 명산대천을 유오하고 노래와 춤을 행하였음은 몸과 마음의 조화적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이었다.≪三國史記≫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혹은 서로 도의를 닦고 혹은 서로 歌樂으로 즐겁게 하고 산수에서 즐겨 놀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37년).

 화랑도들이 행한 체육운동으로는 당시의 한반도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신체운동-무술·유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사료의 빈곤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단편적인 사료를 종합해 보면 화랑의 체육교재로는 단독입산과 같은 修行과 遍歷·蹴鞠1336)축국에 관해서는≪한국사≫8(국사편찬위원회, 1998), 제4장 제7절 무용·체육조 참조.·狩獵·劍術·槍術·弓術·馬術 등의 신체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독 입산수행으로 유명한 화랑은 金庾信이다. “그는 단독으로 中岳의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맹세하며 4일간의 고행 끝에 한 노인을 만나 方術을 전수 받는다.1337)≪三國史記≫권 41, 列傳 1, 金庾信. 또 다른 화랑의 入山修行을 말하는 것으로는 寶川(寶叱徒)太子에 관한 설화가 있다.1338)≪三國遺事≫권 3, 塔像 4, 台山五萬眞身. 그 수행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매일 새벽 寅時(4시경)에 기상한다.

② 산의 정상에 올라가 36形으로 변하는 文殊大聖을 예배한다.

③ 산의 정상에 오를 때 동굴의 물을 길어가 煎茶를 부처님께 공양한다.

④ 밤에는 암자에서 수련한다.

 이 수행방법이 김유신의 그것보다 종교적이라 할 수 있으나 입산하여 혼자 수련하였다는 것, 기도를 함께 하는 고행이라는 점에서 동일형식의 신체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수행의 결과 김유신은 검에 靈光이 드리우는 기적을 얻었으며, 보천은「肉身飛空」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편력에 관한 史料는≪三國史記≫의 ‘산수에서 즐기고 놀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다’의 기록을 들 수 있다. 李穀(1298∼1351)은 그의≪東遊記≫속에서 화랑도 가운데에서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述郞·永郞 등의 四仙이 유오한 동해안의 명승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叢石亭의 四仙峰, 通州의 金蘭窟, 三日浦, 鏡浦臺, 寒松亭, 越松亭 등의 승지가 화랑의 유오지로서 알려져 있다. 해변에 있는 경승지뿐만 아니라 내륙방면의 五臺山·金剛山·智異山도 화랑도들의 유오지였다.

 신라사회에서 화랑도들의 편력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은≪삼국유사≫의 融天師彗星歌로서도 알 수 있다.1339)≪三國遺事≫권 5, 感通 7, 融天師彗星歌 眞興王代. 즉 화랑도들의 楓嶽에의 편력은, 천재나 적국의 침입같은 비상시에도 변경할 수 없는 행사로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夫禮郞을 화랑으로 추대한 珠履千徒는 그 이름 그대로 구슬신을 신은 천명의 화랑도들로 경주에서 지금의 강원도 通川까지 편력을 감행하고 있다.1340)≪三國遺事≫권 3, 塔像 4, 栢栗寺. 화랑도들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변경지역에까지 편력하여 적정탐색 등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입수하여 國政에 반영시키기도 하였다. 편력을 통해 화랑도들은 世情의 좋은 것, 나쁜 것을 식별하고 경험하여 풍부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화랑으로 편력을 끝마치고 임금이 된 景文大王의 예는 이를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다.1341)≪三國遺事≫권 2, 紀異 2, 四十八 景文大王.

 화랑도의 수렵에 관해서는≪삼국유사≫권 4, 義解 5, 二惠同塵조에 보인다. 이 설화는 수렵이란 신체운동을 통한 仁人君子의 덕성 함양에 관계하고 있다. 수렵이 동물을 잡아 스스로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다른 생명의 존귀함을 알도록 하는 데 있음을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렵 모습을 전해주는 것으로는 1934년 경주시에서 발견된 狩獵文塼이 있다. 수렵의 방법은 고구려에서 보이는 것처럼 騎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342)羅絢成이 무사수업의 중심적 놀이가 기사를 통한 수렵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같은 특징을 고찰한 결과 나온 견해일 것이다(羅絢成,≪韓國體育史硏究≫, 文泉社, 1974, 22쪽). 고구려의 수렵대회가 혹심한 자연조건과 싸워 이기기 위한 신체운동이었다면 신라의 그것은 빠른 시기에 이미 여유있는 스포츠적 활동으로 발전되었다. 수렵을 통해 화랑도들은 다른 생물도 불쌍히 여기는 ‘殺生有擇’의 덕목을 배우는 체험학습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무술의 종류는 劒·弓·騎射·騎槍의 4가지이다. 화랑 김유신은 국선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마치 검술의 습득에 있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세가 되어 검술을 修得하여 國仙이 되었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金庾信).

 한국에서는 鐵劒이 기원전 1∼2세기경에 나타나고 있어, 김유신의 시대에 이르면 기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의 검은 直劒이었는데 이것은 전쟁용으로는 불편하였다. 때문에 삼국시대가 되면 素環頭의 大刀가 많이 사용된 듯하다. 삼국시대 검의 출토물을 보아도 직검의 수는 적으나 대도의 출토는 많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같은 당시의 상황은 劒法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절호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되나 확실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어떻든 김유신의 검법은≪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탁월하였다.

跨馬拔劒하여 坑을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적장을 베어 그 머리를 들고 돌아왔다(≪三國史記≫권 41, 列傳 1, 金庾信).

 화랑 金欽運도 劒을 들고 적과 싸우다 전사하고 있다.1343)≪三國史記≫권 47, 列傳 7, 金欽運. 검이 화랑들의 주요 무기의 하나였으며, 그들이 검술의 수련에 노력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당시의 劒法體系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김유신의 ‘試斷大石’, ‘斬所乘馬’, ‘斬將軍’ 그리고 김흠운의 ‘拔劒揮之’의 동작으로 보아 당시 검법의 주류가 자르고 베는 형식이었음을 추찰할 수 있을 뿐이다.

 화랑이 실시한 무술의 하나로는 弓術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화랑 官昌에 관한 다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나이가 16살에 騎馬彎弓에 능하다(≪三國史記≫권 47, 列傳 7, 官昌).

 여기에 보이는 ‘기마만궁’의 문구는 해석에 따라서 그 의미가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다. 그 하나는 기마만궁을 함께 해석하여 하나의 신체운동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마와 만궁을 분리하여 보는 견해이다. 앞의 것은 騎射라고 하는 무술의 한 영역이 되었으며, 뒤의 것은 기마술과 궁술로 나눌 수가 있다.

 삼국은 모두 궁술을 중요시하여, 이것에 의해 인재를 선발하고 있었다. 元聖王 4년(788) 봄에 讀書出身科를 정하기 이전에는「弓箭法」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던 것이다.1344)≪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4년 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의 100여 년까지도 ‘궁전’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궁술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화랑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신라의 화랑은 신체운동을 통하여 원만하고 유용한 청소년을 육성하였으며 이것은 한국체육의 전통사상으로 현재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李鎭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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