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2. 발해의 발전
  • 1) 대외적 팽창

1) 대외적 팽창

 목단강유역에 자리잡은 뒤 대조영은 우선적으로 당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하였다. 건국 직후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던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였다.

 한편 당은 거란족의 봉기를 진압한 뒤에도 돌궐의 세력이 요서지방을 압박하고 있어 우선 그에 대처해야 했으므로, 동북아지역에 깊숙이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705년 則天武后가 죽고 中宗이 즉위함을 계기로 하여 사신을 보내어 대조영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회유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以夷制夷策이나 遠交近攻策의 입장에서, 발해를 요서지역의 돌궐·거란 등에 대한 공략에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대조영도 그의 둘째 아들인 大門藝를 당에 보내어 이에 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대조영으로서는 당과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필요하였고, 나아가 唐朝의 권위를 발해의 건국 사업에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713년에는 당이 郎將 崔忻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였다. 이듬해 최흔이 귀국길에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 황금산에 남긴 石刻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713년 당의 사신파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그 전해에 당군이 요서지역에서 奚族에게 대패한 사건이었다고 여겨진다.042)≪조선전사≫5-중세편 발해 및 후기신라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29쪽. 당시 요서지역의 거란족과 해족 등은 돌궐의 세력 아래 복속되어 있었는데, 당이 재차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당은 다시 돌궐 등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 동쪽에서 한창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발해에 주목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정식 책봉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대조영은 ‘渤海’를 정식 국호로 삼았고, 발해와 당 사이에 교역이 열리고 발해의 사절이 당에 빈번히 왕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714년 4월 당의 거란에 대한 공격에 가담하지 않는 등 어떠한 국제적 분쟁에도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한 대외적 안정책은 발해의 성장에 유리한 조건이 되어 동북아지역에서 급속한 세력확대를 도모해 나갈 수 있었다.

 719년 高王 대조영이 죽은 뒤 그의 아들 大武藝가 왕위에 올라 武王이 되었다. 이 때 연호를 仁安이라 하고 국가적인 체제를 확충해 나갔으며 또한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당시 발해의 영토 확장 범위는 727년 일본과 처음 통교하면서 보낸 국서에 잘 나타나 있다.

…무예가 외람되이 列國을 주관하고 諸蕃을 거느려,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遺俗을 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어 길이 막히고 海路가 아득하여 지금껏 소식을 통하지 못하여 길흉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옛날의 예에 맞추어 善隣을 도모코자 사신으로 寧遠將軍 郎將 高仁義…등 24인을 狀과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續日本紀≫권 10, 聖武天皇 神龜 5년 정월 갑인).

 여기에서 ‘열국을 주관하고 제번을 거느려,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발해가 雄國이 되었음을 과시하려는 다소 修辭的인 표현이겠지만, 이 무렵 발해가 중동부 만주지역의 고구려유민과 다수의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구체적으로 당시 발해의 세력 판도를 살펴보면, 8세기초 발해에 복속된 말갈족에는 隋代의 말갈 7부 가운데 ‘고구려 멸망 이후 분산 미약해져 발해의 편호가 되었다’는 백돌·안거골·호실부 등이 포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말부 출신의 걸사비우집단이 발해 건국에 참여하였고, 백산부의 거주지는 발해 건국지가 되었던 만큼 속말부와 백산부의 잔여세력들도 이미 발해에 귀속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외에 흑수부와 불열부 및 고구려멸망 이후 두각을 나타내었던 鐵利部·越喜部 등 동류 송화강 중하류지역과 흑룡강 하류 등지에 있던 말갈족은 당에 조공사를 보내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발해의 세력권 밖에 존재하였다. 위의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고 했는데, 옛 고구려인들의 거주지역 확보와 관련하여 다음 사실이 유의된다. 즉 신라는 성덕왕 17년(718)에 漢山州 관내에 성들을 수축하였으며, 3년 후에 다시 何瑟羅道의 人丁을 동원하여 북쪽 경계에 장성을 쌓았다.04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7년 및 20년. 이렇게 평양 방면과 동해안의 함흥 방면의 방어체계를 강화한 일련의 조처는 발해의 남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무왕 14년(732) 당과의 전쟁에서 당의 登州를 공격한 발해의 해군은 압록강을 통해 출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720년대에는 발해의 세력이 압록강 중류유역과 한반도 북단까지 뻗쳤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자연 그 북쪽인 두만강유역과 북류 송화강유역 및 휘발하유역도 발해의 세력권 아래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듯 건국 후 불과 20여 년 만에 동북아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발해가 두각을 나타내며 팽창해나가자, 인접한 당과 신라는 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한편 그 동안 돌궐에 굴종해 있던 거란족과 해족이 715년 이탈하여 당에 귀부했으며044)≪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契丹., 716년에는 묵철가한이 전사한 후 돌궐 내부에서는 일시 혼란이 일어났다.045)≪舊唐書≫권 194 上, 列傳 144 上, 突厥 上. 당은 이러한 유리한 계기를 이용하여 요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717년 영주 유성현에 영주도독부를 다시 설치하였다.046)≪舊唐書≫권 39, 志 19, 地理 2, 河北道 營州上都督府.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발해를 압박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취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당은 발해의 배후에 있는 흑수말갈을 포섭하여 726년 그 지역에 黑水府를 설치하고 당의 관리를 파견하여 흑수말갈족들을 감독·조종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종래 흑수말갈은 발해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발해의 양해를 얻은 뒤에 대외적 교섭을 하였다. 돌궐과 교류하여 흑수말갈에 돌궐의 관리인 吐屯을 두었을 때에도 사전에 발해의 승락을 받았었다.047)≪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渤海靺鞨. 그런데 이번에는 발해와 사전 상의없이 독자적으로 당과 교류하며 그 관부를 설치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과 흑수말갈이 연결된다면 그것은 앞뒤에서 발해를 압박하는 형세가 되고, 만약 이를 용인하게 되면 발해의 세력 아래 있는 다른 말갈 부족들도 같은 형태를 취해 당의 영향권 안으로 귀속해 갈 수 있다. 이는 발해의 존립에 치명적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어서 이에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단행키로 하였다.

 흑수말갈에 대한 원정은 당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이는 또한 발해의 국운을 걸어야 하는 중대사안이다. 이에 대해 발해 조정 내에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그 대표가 무왕의 동생인 大門藝였다. 그는 일찍이 당에 파견되어 오랫동안 당에 거주한 바 있어, 당의 국력에 압도되었고 당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발해보다 몇 배로 강하였던 고구려가 당과의 전쟁으로 망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당과의 전쟁을 초래할 흑수부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였다. 무왕은 반대 의견을 일축하고 대문예를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대문예가 국경에 이르러 다시 재고할 것을 요청하자, 무왕은 그를 파면하고 사령관을 교체하여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원정에서 흑수말갈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흑수말갈과 당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나아가 여타의 말갈 부족들에 대하여 당의 영향력이 더 이상 깊이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흑수부에 대한 공격으로 당과의 관계가 긴장되자, 있을 지도 모르는 당의 공격에 대한 대비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아울러 발해의 남쪽 국경지대에 성을 쌓는 등의 움직임을 보여온 신라와 당이 동맹하여 공격해 올 경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수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이듬해인 727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였던 것도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방략에서였다.048)酒寄雅志,<八世紀における日本の外交と東アジアの情勢-渤海との關係を中心として->(≪國史學≫103, 1977). 당과의 긴장된 관계에 전쟁의 불씨를 당긴 구체적 계기는 대문예 문제였다.

 726년 이후 발해의 조정에서 몰리게 된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하였다. 당의 조정은 그를 우대하며 발해의 내부분열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려 하였다. 이런 당의 동향에 대해 무왕은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며 강력히 반발하였다. 당이 대문예의 송환을 거부하자 무왕은 732년 해군을 보내어 당의 登州를 공격하였다. 이에 양국은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양국관계의 진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 양국이 발해를 협격하는 방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신라로서는 신흥 발해의 위협을 막고 나아가 7세기 후반처럼 또 한 차례의 영토팽창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676년 이후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한 것을 승인하지 않아 당과 이면적 대립이 지속되어 오고 있는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이 동맹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당은 733년 대문예를 앞장 세워 발해 원정군을 동북방으로 진공시켰다. 신라는 남으로부터 발해를 공격해갔다. 대문예와 葛福順 등이 이끈 당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하였고, 오히려 발해군이 산해관 근처의 馬都山지역을 공격해오자 당의 平盧先鋒 烏承玼가 방어에 급급하다가 흑수말갈과 室韋군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이를 격퇴하였다.049)이 때 발해군은 해로로 마도산지역을 공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古畑徹,
<張九齡作‘勅渤海郡王大武藝書’と唐渤紛爭の終結-第二·三·四首の作成年代を中心として->,≪東洋史論集≫3, 1977).
신라군은 발해군의 저항과 추위로 다수의 凍死者를 내고 퇴각하였다.

 당과 신라의 침공을 격퇴한 후, 발해는 다시 당과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 만약 당이 더 이상 동북아 방면으로 팽창해오지 않는다면, 당과 지속적으로 대결하는 것이 발해의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는 데 이익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733년 毗伽可汗이 사망하자 내부 분란이 심해져 돌궐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당을 측면에서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당과 계속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발해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신라와의 대결에서 일본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733년의 戰役에서 경험한 바였다. 당도 발해에 대한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고, 동북아지역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현상유지책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어 발해와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이에 양국간에는 국교가 재개되었는데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한 뒤 발해와 당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한편 당은 735년에 신라가 대동강 이남지역을 차지한 것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이후 당은 신라와 발해가 서로 대립하도록 유도하면서, 현상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평양과 황해도지역의 군현화에 주력하였고 더 이상의 북진은 꾀하지 않았다. 그 결과 7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한반도 통일 및 발해의 건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동하던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보다 안정된 구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구도는 10세기초까지 이어졌다.

 한편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신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발해는 그 배후에 있는 미복속 말갈 부족들에 대해 압박을 가하였다. 철리부·불열부·월희부·흑수부 등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 부족들은 8세기 초반 당에 빈번하게 조공하면서 독자적 움직임을 보여 왔고, 당과 발해간의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집단들이었다. 이들을 제압하는 일은 발해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이제 당의 세력이 후퇴하자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들 부족들에 대한 발해의 공격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다. 단 이들 부족들의 당에 대한 조공이 불열부와 월희부는 741년, 철리부는 740년을 경계로 하여 두절되었다. 그 뒤 802년에 월희부가, 841년에 불열부와 철리부가 각각 한 차례씩 당에 조공을 한 사실이 전해질 뿐이다. 철리부에 의한 그 전과 같은 지속적인 조공은 발해 멸망 후에 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면은 곧 이들 집단이 8세기 중반에 발해의 세력권으로 귀속되었음을 의미한다.050)≪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黑水靺鞨. 746년 발해인과 철리부인 천백여 명이 일본에 건너간 일이 있었다.051)≪續日本紀≫권 16, 聖武天皇 天平 18년. 이는 철리부의 대당 조공의 두절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발해가 철리부를 병합함에 따라 생겼던 현상으로 여겨진다.052)鳥山喜一,≪渤海史上の諸問題≫(風間書房, 1968), 237∼240쪽. 단 흑수부의 경우 740년 이후 여러 차례 당에 조공한 기사가 보여 이 시기에 발해에 완전 복속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로써 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발해는 그 영토가 송화강 하류에까지 미치게 되어, 건국 이래로 추구해오던 대외 팽창정책이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발해가 한번 더 대외적 팽창을 한 것은 9세기 전반 宣王代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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