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요·금대의 발해인과 여진인

1) 요·금대의 발해인과 여진인

 발해국의 주민구성을 전해주는 발해 존립 당시의 기록은 매우 적다. 그 리하여 대조영집단의 出自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 왔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발해국의 멸망 후 그 주민들이 遼와 金의 통치 아래에서 어떤 양태로 존재하였던가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보다 많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는 발해국을 멸망시킨 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발해국 주민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발해의 중심지에 설치하였던 東丹國의 왕으로서 요의 태종의 형인 倍와 태종간의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발해의 주민을 대규모로 요동지역에 강제 이주시켰다. 그런데 요동지역으로 옮겨져 요의 지배를 받게 된 옛 발해국의 주민은 ‘渤海人’과 ‘女眞人’으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당시 양자는 서로 근접한 곳에 살았고, 생업면에서 요동지역의 여진인도 농업을 행하였고 그 경작 방식이 발해인과 외형상 유사하였는데도, 발해인과 여진인은 요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었다. 양자에 대한 요의 지배방식도 차이를 보였다. 요의 영역 내에 강제 이주된 발해인의 대다수는 州縣民으로 편제되었다. 그에 비해 요의 영역 내에 있는 여진인 즉 熟女眞의 경우, 대개 부족 및 부락 단위로 집단적으로 예속되었다. 이들 여진인들은 일정한 조세나 역이 부과되지 않았으며, 전쟁이 있을 때 그 병력이 차출되었고 때때로 특산물을 바쳤으나 일상 생활은 자치에 맡겨졌다. 부족 내에서 재래의 조직과 생활을 유지하면서 그 수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요에 예속되었다. 요의 영역 밖에 있던 生女眞 부족의 경우, 요에 부족 단위로 附庸해 때때로 공납을 바쳤지만 叛服이 無常하였다.064)盧泰敦,<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韓國 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참조.

 발해인과 여진인이 요의 지배 아래에서 그 예속 형태에 뚜렷한 차이를 나타냈던 것은 소수 민족인 거란족이 그 영내의 다수의 여러 족속들을 가능한 한 서로 분리시켜 지배하려는 정책적 의도에서 비롯된 면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장기간에 걸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두 집단간에 사회적 상태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여진인은 부족 및 부락 단위의 결집을 이루는 공동체적 관계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상태였으므로 이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그 족장을 통해 지배하는 간접적 지배방식을 취하였다. 그에 비해 발해인 사회에서는 이미 계급 분화가 진전되어서 그러한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주현민으로 편제하여 요의 지방관을 통해 직접 지배하였던 것이다. 요는 발해인을 통치하는 데 漢法을 적용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 발해인 사회의 성격이 漢人의 그것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정책을 취하였고, 또 그것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발해인과 한인을 모두 주현민으로 편제하였고, 양자가 일정지역에서 서로 섞여 살았던 경우가 많았음도 그러한 측면을 말해준다.

 金代에 들어서도 발해인과 여진인의 구분은 여전하였다. 금이 흥기할 때 阿骨打는 요동 일대의 발해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여진과 발해가 본래 한 집안이었다”고 선전하였으나, 실제적으로 양자간의 구분과 차별은 뚜렷하였다. 그런 면은 그 뒤까지 지속되었고 실제 생활에서 발해인은 漢人과 비슷하게 처우되었다.065)위와 같음.

 이처럼 발해국 멸망 후 그 주민들은 발해인과 여진인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서로 다른 존재양태를 보였고, 발해인은 요·금대를 통하여 여진인·한인 ·거란인 등과도 다른 독자적인 하나의 족속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같은 발해국의 주민이었던 발해인과 여진인이 언제부터 서로간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일단 그 차이성이 발해국 멸망 이후에 비롯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요에 의해 발해국의 주민이 강제 이주될 때에 주현민으로 편제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 구분되었다. 이미 발해국 존립 당시부터 양자간에 구분이 있었고 그 차이성에 의거하여 요의 徙民策이 시행되었던 것이다.≪高麗史≫에서도 발해지역으로부터 넘어온 이들을 처음부터 발해인과 여타의 女眞系 사람들을 뚜렷이 구분하여 명기하였다. 구체적으로 발해국의 주민이 두 부류의 족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발해국 존립 당시부터 확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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