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Ⅱ. 발해의 변천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1) 대연림의 흥요국

(1) 대연림의 흥요국

 후발해의 烏氏政權이 거란의 공격으로 무너진 뒤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구심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발해의 귀족 유민들이 주도했던 발해의 부흥운동이 이제는 그 힘을 상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生女眞으로 기록되는 발해의 피지배 유민들의 반거란적 저항운동과 친고려적 대외 활약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 (생)여진부락들의 대외 활동은 주로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어서, 고려에 대해서는 친선과 약탈이라는 양면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들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사람 얼굴에 짐승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비추어지기까지 하였다.186)발해유민이라는 시각은 아니지만, 당시 여진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金庠基,<여진 관계의 시말과 윤관(尹瓘)의 북정>(≪국사상의 제문제≫4, 국사편찬위원회, 1959 ;≪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金渭顯, 앞의 글, 131∼156쪽.
李東馥,<遼末 女眞社會의 社會構成-三十部女眞의 問題-(Ⅲ)>(≪人文科學論集≫3, 淸州大, 1984 ;≪東北亞細亞史硏究-金代女眞社會의 構成-≫, 一潮閣, 1986).

 발해의 또 다른 부흥운동은 고려와 거란이 3차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치른 뒤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쓰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 1029년(거란 聖宗 太平 9) 大延琳이 일으킨 이른바 興遼國이 그것이다. 대연림은 발해의 왕손으로서 거란에서 東京 遼陽府의 大將軍(東京舍利軍 詳穩)으로 활약하던 친거란파의 발해유민이었다. 그런데 대연림은 당시 동경 요양부의 戶部使 韓紹勳과 戶部副使 王嘉 등의 失政으로 인해 야기된 민심 동요를 틈타 거사하였다. 대연림은 東京留守 駙馬 蕭孝先과 남양공주를 가두고 한소훈·왕가 등을 살해한 뒤 이곳에서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흥요국이라 하고 연호를 天慶이라 하였다(1029).187)≪遼史≫권 17, 本紀 17, 聖宗 8, 太平 9년.
≪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9월 무오.
≪高麗史節要≫권 3, 현종 20년 9월.
그런데≪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는 興遼國의 연호는「天興」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대연림의 거사는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1029년 당시 발해의 옛 지역은 이미 거의 거란의 지배밑에 들어가 있었고, 피지배층의 발해 후손들 역시 발해에 대한 왕조 의식이나 종족 의식이 쇠퇴하거나 소멸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연림과 같이 계획을 세웠던 왕도평이 대연림으로부터 도주하였는가 하면, 保州(현 義州)의 발해 출신 太保 夏行美도 거란에 대연림이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밀고하여 억울하게 발해 출신의 병사 8백여 명을 죽게 하였다.188)≪遼史≫권 17, 本紀 17, 聖宗 8, 太平 9년 기축. 오직 대연림 등에게 힘이 될 수 있었던 세력은 남북의 여진부락과 수 차례의 전쟁을 치렀던 고려뿐이었다.

 대연림의 발해국 부흥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흥요국과 고려와의 관계이다. 즉 대연림이 끈질기게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이는 발해와 고려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아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까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흥요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흥요국에 관한 고려측의 기록이다.

① 契丹 東京將軍 大延琳이 大府丞 高吉德을 파견하여 건국한 것을 알리고 아울러 구원을 청하였다. 대연림은 발해 시조 大祚榮의 7대손인데, 이 때 그는 거란을 배반하고 일어나서 국호를 興遼라 하고, 연호를 天興이라 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9월 무오).

② (顯宗) 20년에 興遼가 난을 일으키니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원조를 구하므로 郭元이 몰래 (왕에게) 아뢰기를, ‘압록강 동쪽 기슭지역을 거란이 保障하고 있으나 이제 기회를 타서 빼앗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崔士威·徐訥·金猛 등이 모두 글을 올려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곽원이 고집하여 군사를 보내어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므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죽었다(≪高麗史≫권 94, 列傳 7, 郭元).

③ 거란의 동경장군 大延琳이 난을 일으켜 興遼國이라 자칭함에 刑部尙書 郭元이 기회를 틈타서 압록강 동쪽 기슭지역을 취하기를 청하였다. 崔士威가 徐訥 등과 더불어 글을 올려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곽원이 고집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싸우다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여러 輔臣과 의논하는데 최사위가 平章事 蔡忠順과 더불어 말하기를 ‘兵은 위험한 일이라 가히 삼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저들끼리 서로 치는 것이 어찌 우리에게 이익되지 않을 줄 알리오. 다만 城池를 修築하고 烽燧를 삼가하게 하여 그 변을 관망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것을 따랐다(≪高麗史≫권 94, 列傳 7, 崔士威).

④ 이 때 興遼國 大師 大延定은 東北女眞을 이끌고 契丹과 더불어 서로 싸우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애걸하였다. 왕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길이 막혀 거란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12월).

⑤ 興遼國이 또 水部員外郞 高吉德을 파견하여 글을 올려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애걸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1년 정월 병인).

⑥ 契丹의 水軍指麾使虎騎尉 大道·李卿 등 6명이 내투하였다. 이로부터 契丹·渤海사람들의 來附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1년 5월 을축).

⑦ 興遼國 行營都部署 劉忠正은 寧州刺史 大慶翰을 파견하여 글을 올려 구원해 주도록 애걸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1년 7월 을축).

⑧ 興遼國 郢州刺史 李匡祿이 와서 위급함을 말하며 구원을 청하였다. 마침 나라가 망하였다는 말이 들리자, 그는 드디어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갑술에 金哿如를 거란으로 파견하여 동경을 수복한 것을 축하하였다. 을해에 거란 왕은 千午將軍 羅漢奴를 파견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래하지 못한 것은 길이 막혔던 까닭인데, 지금 발해가 偸主하였다가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陪臣을 파견하여 빨리 와서 赴國하면 반드시 나라에 우려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월 신사 초하루에 韓祚를 西京留守事로 삼았다. 이 달에 거란의 奚哥와 발해민 500여 명이 내투하므로 강남의 州郡에 보내어 살게 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1년 9월 병진).

⑨ 이 때에 契丹渤海民 40여 명이 내투하였다(≪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2년 3월 갑인).

 위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대연림이 무려 5차례나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1차에는 대부승 고길덕을(1029), 2차에는 대사 대연정을(1029), 3차에도 다시 수부원외랑 고길덕을(1030), 4차에는 영주자사 대경한을(1030),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주자사 이광록을 파견하여 고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지원 불가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이러한 대연림의 원조 요청에 대하여 찬반 양론의 격론이 있었는데, 형부상서 곽원이 이 기회를 틈타 압록강 동쪽 연안의 거란병을 몰아내어 고려의 숙원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하시중 최사위와 서눌·김맹 등이 이것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결국 대연림의 발해 부흥운동은 고려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1030년 대연림은 그의 부하였던 楊祥世가 거란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으므로 거란에 사로잡혀 거사한 지 1년 만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189)≪遼史≫권 17, 本紀 17, 聖宗 太平 10년 8월 병오. 이에 따라 거란은 발해국 부흥운동의 싹을 없애고 그들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발해유민들을 강제로 거란의 上京 臨潢府지역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190)≪遼史≫권 17, 本紀 17, 聖宗 太平 10년 11월.

 그러나 흥요국의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에 망명하였는데, 위의 사료들을 비롯해서 이후 덕종 2년(1033)까지 고려로 내투·내부하는 발해·거란사람들은 이들이 아니었던가 한다.191)李鍾明, 앞의 글, 213쪽.
李龍範, 앞의 글, 89∼90쪽.
특히 이 때「渤海」人으로 표기되는 사람들 이외「契丹」人으로 표기되는 사람들도 대부분 발해 후손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는 다음 3節 참조.
이와 같은 발해유민의 고려로의 망명은 단순한 정치적 망명의 성격을 넘어, 대연림이 그들의 도움 요청 대상으로 고려를 끈질기게 기대하고 있었던 점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고려 태조가 발해를「親戚之國」으로 인식하였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는 994∼1016년에 이어 1022년부터 1116년까지는 줄곧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거란과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관계는 고려의 親宋的 이중외교와 마찰을 빚어 거란과 3차에 걸친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려는 거란과 단교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려왕은 거란의 책봉을 받고 謝恩使를 파견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책봉을 통한 외교적 승인은 대개 唐·宋 등 중국 왕실과의 관계에서 행해지던 절차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과의 3차 전쟁 이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관계 개선을 수락하고, 이후 역대 왕들이 거란으로부터 책봉을 통한 외교적 승인까지 받아왔다.192)≪高麗史≫권 6, 世家 6, 靖宗 9년 11월 신사·권 7, 世家 7, 문종 원년 9월 임오·권 10, 世家 10, 선종 2년 11월 계축·권 10, 世家 10, 헌종 즉위년 및 권 12, 世家 12, 예종 3년 2월 병오.

 따라서 거란에 반대하여 발해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발해유민의 고려 내투는 결코 고려와 거란 관계를 좋게 만들 수 없었다. 특히 대연림 등이 고려와 내통했던 사실은 거란이 이를 알았든 몰랐든간에 양국 관계가 악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거란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에서는 비록 그 명분이 현실적이었으나 곽원 등에 의하여 대연림을 돕자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흥요국 실패 이후 많은 유민들이 고려를 그들의 망명처로 삼았다. 그들이 송나라를 망명처로 삼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지리적인 불편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에 대연정·고길덕 등을 보내어 발해 부흥운동을 도와 달라고 했던 명분과 같은 이유에서 고려를 그들의 망명처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흥요국의 발해국 부흥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발해가 멸망한 지 100년이 지난 후 발해유민들의 생각과 고려 사람들의 생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첫째는 그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발해유민들은 발해국에 대한 국가의식이 상실되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려가 명분상으로나 실질적 면에서 발해계 거란인들을 발해유민이 아닌 거란인들로 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발해유민들이 그들의 조상이었던 발해의 국호를 직접 쓰지 못하고 거란의 遼를 쓰고 있었던 사실은 발해유민들이 상당한 정도로 契丹化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연림의 흥요국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큰 발해국 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연림이 고려에 수차에 걸쳐 원군을 청했던 사실은 아직까지 그들에게 남북국시대의 역사의식이 일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전의 발해시대에 발해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가 승낙을 받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193)韓圭哲,<발해와 신라의 교섭관계>(≪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신서원, 1994) 참조. 즉 대연림이 단순히 고려가 거란과 인접하였고, 수년간 전쟁을 치렀기에 이 때를 이용하여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는 현실적 이유만으로 고려에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음으로는 흥요국의 도움 요청을 받았던 고려 조정의 태도가 문제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 발해를 ‘친척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나서 고려는 단순히 잃어버린 땅을 찾겠다는 명분만으로 흥요국의 발해 부흥운동을 인식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발해멸망시 신라인들이 발해를 돕겠다고 약속하였던 그런 역사적 명분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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