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2. 당과의 관계
  • 3) 전쟁의 경과와 신라·발해의 대립

3) 전쟁의 경과와 신라·발해의 대립

 발해와 당의 전쟁은 무왕 인안 14년(732) 9월 張文休 등을 해상으로 보내어 당의 登州를225)박영해는 발해가 바닷길로 登州와 萊州를 불의에 공격한 것으로 그 범위를 넓게 보고 있다(박영해,<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하여>,≪력사과학론문집≫12, 1987, 196쪽).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발해는 돌궐의 원병을 얻어 당을 공격하던 거란을 도와 遼西지방의 馬都山(都山)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226)≪資治通鑑≫권 213, 唐紀 29, 玄宗 開元 21년 정월 정사.
≪新唐書≫권 136, 列傳 61, 李光弼 附 烏承玼.
박영해, 위의 글, 195∼196쪽.
古畑徹, 앞의 글(1986a), 20∼22쪽.
발해와 당의 마도산전투는 발해가 등주 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발해가 당시의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여 당을 공격하였다는 점, 즉 발해와 당 사이의 전투가 단순히 발해와 당의 관계만이 아닌 돌궐·거란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셈이다. 그러나 발해가 당을 공격하게 되었던 직접적 원인이 대문예의 망명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보다 근본적 원인은 발해와 신라의 대결관계에 있었다.

 등주를 공격한 장문휴는 登州刺史 韋俊을 살해하고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도 이에 맞서 左領將軍 蓋福順(葛福順) 등으로 하여금 발해를 치도록 하였으나 이들이 등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발해의 군대는 철수한 뒤였다. 그리고 당은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당은 그 곳에 와있던 신라인 金思蘭까지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요구하였다.227)≪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이것이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에 신라가 개입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발해와 당의 전쟁 결과 양국의 대결이 더욱 심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해와 신라의 대결이 심화되었다는 데에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있다. 신라는 당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그 이후에도 당과의 연합이 아니라 신라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三國史記≫신라본기와 金庾信傳에228)≪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32∼35년 및 권 43, 列傳 3, 金庾信 下. 의하면 성덕왕 32년(733) 7월 김사란이 당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같은 해 겨울 김유신의 손자였던 金允中·金允文 등 4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당병과 만나 발해의 남쪽 경계를 치게 했지만 악천후로 실패하였다. 다음해 2월 당에 있던 숙위 金忠信(信忠)이 현종에게 글을 올려 다시 한번 발해 토벌의 명령을 신라에게 내려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신라 출병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이를 계기로 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성덕왕 34년 정월에 金義忠이 당에 새해 인사를 하는 것으로서 양국간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의충이 당에 갔을 때 당의 신라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신라가 실질적으로 그 지배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당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浿江 이남에 대한 지배권을 비로소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 때부터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 이후 지속되었던 당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 과거 무열왕대와 같은 상호 협조관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성덕왕 32년 신라에 대하여 당이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자 그 해 12월에 신라에서 당에 謝恩使를 보냈다. 이 때의 사은사 파견은 일종의 외교적 의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에 ‘사은사’를 파견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 당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고 싶어했던 사실을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듬해 정월 성덕왕의 사촌 동생으로 726년에 당에 賀正使로 갔다가 숙위로 머물러 있던 김충신이229)金忠信은 성덕왕의 從弟였으며 경덕왕 16년(757)의 漢化정책을 주도하였던 金信忠과 동일인이라고도 한다(金壽泰,<統一新羅期 專制王權의 崩壞와 金邕>,≪歷史學報≫99·100, 1983, 22쪽 및 申瀅植,<新羅 中代 專制王權의 展開過程>,≪統一新羅史硏究≫, 三知院, 1990, 138쪽 참조).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 현종에게 글을 올렸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신라가 당과의 비밀협상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였던 김춘추의 대당 비밀외교를 연상시킨다.230)≪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진덕왕 2년 및 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7월의 薛仁貴 편지 참조. 그러나 이 때는 신라와 당 사이의 비밀협약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즉 신라가 그 때와는 달리 당과 연합작전을 도모하지 않고 신라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그 때까지 발해 공격의 명분을 어떻게든 찾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발해 공격의 의지가 강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대당외교가 발해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반증이며, 이 사실은 이 사건 이후 발해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고 오히려 발해와 신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신라는 성덕왕 31년 이전에도 당과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당의 관계는 일시에 개선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나라가 과거 신라와 당 사이에 있었던 전쟁을-즉 당의 침략 거점이었던 安東都護府를 신라를 비롯한 삼국민이 평양에서 요동지역으로 쫓아내었던-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당이 신라를 경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패강 이남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성덕왕 34년에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였던 사건 이후에야 승인하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당의 현실적 대외문제로서, 돌궐 등과 대치하고 있던 당으로서는 외교의 비중을 신라보다는 돌궐과 거란에 더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이 북방의 여러 민족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위험을 없애고 실리를 취하기 위해서는 돌궐과 거란·발해·신라의 순으로 대외정책의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231)古畑徹, 앞의 글(1986b), 98∼100쪽. 당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신라는 소홀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와 당과의 관계는 신라의 대당접근에도 불구하고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당은 흑수말갈사건으로 인하여 발해와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숙위를 파견하겠다는 요청에 동의하였다.232)흑수말갈사건 이후 발해가 당을 공격하기까지 즉 927년부터 932년 이전에 신라의 對唐 사신파견은 7차례였고, 발해의 대당 사신파견은 15차례 정도였다. 특히 발해는 武王의 동생 大寶方·大胡雅·大琳 등 왕족들을 당의 숙위로 많이 파견하는 등 대당외교에 있어서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金毓黻,<大事表>, 앞의 책, 권 7 및 王承禮 저, 宋基豪 역,≪발해의 역사≫, 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155∼171쪽). 무왕이 자기 동생들을 이렇게 당의 숙위로 파견한 것은 자기의 정치적 牽制勢力을 제거하기 위한 內政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겠지만, 이와 함께 당과의 교섭을 중요시하고 있었다는 증거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성덕왕 31년 이전 신라의 대당 접근은 많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양국관계가 삼국 통일전쟁 당시의 협력관계로 회복된 것은 발해와 당의 전쟁을 계기로 하여 신라와 당이 발해를 협공하면서부터였다고 하겠다.

 신라의 삼국 통일전쟁 당시의 협조적인 양국관계로 개선되기를 희망하는 발언은 당으로부터 먼저 나왔다. 당나라가 신라에 발해를 쳐야 할 장수로서 김유신의 후손인 김윤중을 지명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것은 신라와 당의 연합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추억을 신라에 환기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의 이와 같은 태도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그들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결국 발해를 견제하려는 신라와 당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져 양국은 7세기에 그들이 연합하였던 상황 수준으로 관계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관계개선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韓圭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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