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2) 발해와 일본의 신라협공계획과 양국교섭

2) 발해와 일본의 신라협공계획과 양국교섭

 발해의 대일 사신파견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양국간의 접촉은 한동안 소원하였다. 이러한 소원한 관계를 깨뜨리고 두 나라가 적극적인 교섭을 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신라 공격계획이었다.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양국의 사신왕래는 모두 발해가 먼저 파견한 것이었다. 다만 일본은 발해 사신의 귀국 때 送使를 2차례 파견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신라를 협공하기 위한 그들 자신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발해의 제4차 대일 사신파견은 일본에 대한 답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이른바 일본의「新羅征討計劃」(758?∼764)을237)和田軍一,<淳仁朝に於ける新羅征討計劃について>(≪史學雜誌≫35­11, 1924).
鳥山喜一,<渤海王國と日本との交涉>(≪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241∼253쪽.
石井正敏,<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新羅征討計劃との關連をめぐって->(≪史學論集 對外關係と政治文化≫1, 吉川弘文館, 1974).
酒寄雅志,<八世紀における日本外交と東アジア情勢-渤海との關係を中心として->(≪國史學≫103, 1977).
――――,<渤海國家の史的展開と政治文化>(≪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金恩淑,<8세기의 新羅와 日本의 關係>(≪國史館論叢≫29, 國史編纂委員會, 1991).
韓圭哲, 위의 책, 197∼211쪽.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먼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문왕 대흥 22년(758 ; 일본 天平寶字 2)에 양국간에 사신이 오고 갔다. 그 때 발해에 온 일본 사신은 과거 신라에 파견되어 신라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小野田守였다. 일본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그들의 신라정벌을 실천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太宰府에 명하여 行軍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장차 신라를 정벌하려는 것이다(≪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6월 임자).

② 배 500척을 北陸道의 여러 나라에서 89척, 山陰道의 여러 나라에서 145척, 山陽道의 여러 나라에서 161척, 南海道의 여러 나라에서 105척으로 나누어 한가한 달에 만들되, 3년 이내에 마치도록 하였는데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9월 임오).

 위의 내용대로라면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 했던 것은 적어도 759년 이전이었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 했던 758년부터 764년 사이의 발해와 일본간의 사신왕래는 매우 빈번하였다. 일본은 758년에 小野田守 등을 발해에 파견하였고 발해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같은 해 9월에 揚承慶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이듬해에도 일본이 高元度 등을 발해에 파견하자 발해는 高南申·高興福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760년에 일본이 고남신 등의 발해 사신을 전송하는 陽侯玲璆 등을 발해에 보내는 등 왕래가 계속되었다. 761년에도 일본은 高麗大山 등을 발해에 파견하였고 이에 대한 답방으로 발해는 문왕 대흥 26년(762)에 王新福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듬해에도 일본은 왕신복 등의 발해 사신을 전송하는 板振鎌束 등을 보냈다.238)金毓黻,<叢考>(≪渤海國志長編≫권 19).
王承禮 저, 宋基豪 역,≪발해의 역사≫(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178∼190쪽.

 이후 771년에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壹萬福·慕昌祿 등은 3년 뒤에 돌아왔다. 이처럼 양국간의 외교 재개는 발해가 먼저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이루어졌다.239)759∼771년까지의 관계기록은≪續日本紀≫권 31, 寶龜 2년 6월 27일·10월 14일·12월 21일 및 권 32, 寶龜 3년 정월 1일·정월 3일·정월 16일·정월 19일·정월 25일·2월 2일·2월 28일·2월 29일·9월 21일, 寶龜 4년 2월 20일·6월 12일·6월 24일·10월 13일.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무왕 9년(727)부터 대인선 14년(919)까지 34차례였다. 그런데 발해가 먼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경우가 30차례였고, 나머지 4차례만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었는데,240)물론 759년의 대발해 사신파견은 답방을 겸하고 있는 면도 있었으나 일본의 재차 파견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先派遣으로 간주하였다. 그 중 3차례가 바로 일본의 신라 정벌계획이 있었던 시기였다(758·759·761).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은 발해의 답방에 대하여 두 차례나 전송사신까지 파견하는 적극성을 보였다(760·763). 그러므로 758년에서 764년까지의 양국의 사신왕래는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발해를 신라정벌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발해에 대하여 적극 외교를 벌이게 되었던 또 다른 배경은 당에서 일어난 安史의 亂(758∼763)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 일본은 소야전수가 당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에 관하여 보고하자, 淳仁천황이 관계 朝臣들에게 그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하도록 명령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241)≪續日本紀≫권 21, 淳仁天皇 天平寶字 2년 12월 무신(10일).
鳥山喜一, 앞의 책, 241∼249쪽.
그리고 759년 순인천황이 高元度를 迎入唐使로 삼아 당 長安에서 遣唐使 藤原河淸을 맞이하도록 하였다는 점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에 대한 소식은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고 난 이후에 얻은 부수적인 수확에 불과하였다.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이 당의 내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발해에 대한 사신 파견의 1차적 목적은 신라정벌을 위해 발해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발해에 보내는 사신으로 소야전수가 발탁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경덕왕 12년(753)에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오만·무례하다고 하여 접견을 거부당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242)≪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2년.
≪續日本紀≫권 19, 孝謙天皇 天平勝寶 5년 2월.
이러한 전력을 가진 그를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는 것은 일본이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당에 대한 관심 역시 신라를 의식한 외교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정벌에 당이 개입한다면 발해의 도움까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발해관계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발해는 안사의 난 이후 요동지역 등 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영역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제안에 대하여 발해도 초기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발해가 문왕 대흥 22년(758)과 23년에 군사전문가인 武官을 일본에 파견하여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라 정벌계획에 관한 정보는 신라에도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는 경덕왕 21년 5월에 북쪽 변경지대에 五谷(황해도 瑞興)·鵂巖(鳳山)·漢城(載寧)·獐塞(遂安)·池城(海州)·德谷(谷山)의 6성을 쌓고 각각 太守를 두었는데,243)≪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21년. 이러한 조처는 곧 발해를 의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였던 것은 신라조정의 ‘無禮’가 명분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들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이전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본은 신라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동방의 蝦夷문제 해결에 큰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244)岸俊男,≪藤原仲麻呂≫(吉川弘文館, 1969), 261∼27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정벌을 계획하였던 것은 바로 그들 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전이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藤原仲麻呂는 권력을 독단하여 惠美押勝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반발세력이 커 정치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245)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野村忠夫,<奈良時代の政治過程>(≪岩波講座 日本歷史≫3), 95∼108쪽 참조. 혜미압승은 안으로 전제화를 추구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하여 신라정벌을 꾀하려 하였던 것이다. 혜미압승의 하이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모험은 둘 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으나 특히 신라 정벌계획은 처음부터 정치적 애드벌룬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발해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려 하였다든지, 신라정벌에 대비하여 여러 곳에서 나누어 배를 건조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애드벌룬 이상의 실천 가능성이 강한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하였던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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