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조직의 정비과정과 성격

1) 조직의 정비과정과 성격

 발해의 국가조직은 2대 武王 大武藝代(719∼737)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여 3대 文王 大欽茂代(737∼793)에 완비되어, 그 이후 10대 宣王 大仁秀代(818∼830)와 13대 大玄錫代(871∼894?)에 완성되었다.

 발해를 건국한 高王(698∼719) 大祚榮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날래고 용감하며 군사를 잘 부렸으나, 정치에 있어서는 조직을 정비할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이 때는 내정의 안정과 당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은 안으로 국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특히 당시는 주변의 여러 부락들이 발해에 복속되어, 정복을 위한 조직이 일정한 수준으로 정비되었다. 이러한 점은≪新唐書≫渤海傳에 전하고 있는 바와 같이 “武藝가 서자 영토를 개척·확대하여 東北의 여러 異民族들이 두려워서 이에 臣服하였다”고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도 安祿山의 亂(755∼763)을 계기로 이른바 小高句麗로 불리기도 하는 요동지역을 지배하에 넣는 등 대외 발전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는 수도를 2차례나 옮길 정도로 내정에 힘을 더 기울인 시기였다. 문왕은 수도를 中京 顯德府에서 上京 龍泉府로 옮겼다가, 다시 東京 龍原府로 옮겼다. 그런데 문왕대에 이렇게 수도를 자주 옮겼던 것은 대내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정치발전을 이룩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조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발해의 정치제도가 완비되었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편 문왕대에 발해는 당으로부터 ‘渤海郡’이 아닌 ‘渤海國’으로 인정받았다. 왕에 대한 책봉 작위가 ‘渤海郡王’이 아닌 ‘渤海國王’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발해국’을 ‘발해군’으로 불렀던 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것이었으나, 당이 이처럼 늦게나마 태도를 바꾼 것은 安史의 亂 등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린 당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외교적 조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발해가 건국 이후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켜 왔던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해의 국제적 지위가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문왕 이후에는 여러 왕이 즉위하자마자 곧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발해의 귀족층이었던 ‘國人’들의 권력쟁탈전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249)酒寄雅志,<渤海王權の一考察-東宮制を中心として->(≪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353쪽. 그러다가 발해는 고왕의 동생인 大野勃의 4世孫으로 알려지고 있는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권이 안정되고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부터 海北의 諸部가 토벌되어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전국을 5京, 15府, 62州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통치체제를 완성시킨 시기도 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발해는 13대 대현석대에는 ‘海東盛國’이란 칭호를 듣기에까지 이르렀다.250)≪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발해의 중앙정치제도는 專制的이고 자주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남아 있는 기록이 많지 않지만, 발해왕이 長子相續制를 시행하고 있었다든지, 발해가 고왕 때부터 줄곧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발해의 왕위계승은 왕자가 없다든지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장자상속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東宮制度가 성립되어 있어서 장자가 동궁(태자)으로 책봉되어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곤 하였다.251)酒寄雅志, 앞의 글 참조. 발해왕이 당으로부터 발해군왕 또는 발해국왕으로, 그 장자가 桂婁郡王 등으로 책봉되고, 이 양자가 모두 세습적으로 계승되어 간 사실도 동궁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252)≪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왕위의 장자상속에는 시련이 따르기도 하였다. 가령 무왕과 그의 동생 大門藝 사이에 있었던 대외정책의 대립과, 이로 인한 대문예의 당으로의 망명, 대문예를 살해하기 위한 무왕의 자객파견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왕위계승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253)酒寄雅志, 앞의 글, 358∼359쪽. 발해는 王弟의 왕위계승권을 원칙적으로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장자 아닌 다른 왕자들의 왕위계승권도 원칙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자를 동궁으로 책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자는 副王으로서 다른 일반 왕자와 구별되었고 또한 일정한 정치적 권력도 행사하였다.254)이와 흡사한 사실이 고구려에도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로써 발해의 이 제도는 고구려의 그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古代篇, 一潮閣, 1982, 352쪽 및 酒寄雅志, 위의 글, 359∼364쪽 참조).
발해가 장자상속제를 시행하였다는 것은 왕권이 전제적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발해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자주적이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발해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당나라에 朝貢使를 보내는 등 당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그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발해는 자주적인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전근대의 정치적 자주성은 연호사용 여부에서 일정하게 드러난다. 발해는 연호나 시호를 정함에 있어 독자적인 결정을 하였음이 중국측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玄宗 開元 7年(719)에 祚榮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諡號를 高王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武藝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仁安으로 고쳤다. ···무예가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武王이라 하였다.···欽茂가 죽으니 사사로이 시호를 文王이라 하였다(≪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발해 정치의 자주성은 이처럼 중국측에서도 ‘사사로이’ 결정하였다고 하는 연호와 시호의 사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해는 고왕 대조영이 ‘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255)발해 高王의 연호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僞書」논쟁이 있는≪桓檀古記≫에 실린≪太白逸史≫(조선 중종 때의 李栢 撰으로 알려짐)에 大祚榮代의 연호가 ‘天統’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천통’이란 연호는 魚允迪의≪東史年表≫(1915), 304쪽 및 震檀學會의≪韓國史年表≫(1959), 90쪽에도 채용되고 있다., 대체로 모든 왕들이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一世一元의256)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350쪽. 원칙이 지켜졌다. 즉 전하는 연호가 없는 경우도 있으나, 문왕대에는 大興,257)吉林 敦化의 六頂山古墳에서 발견된 貞惠公主墓誌는 文王이 大興 이외에 寶曆이란 연호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말년에는 다시 大興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閻萬章,<‘貞惠公主墓碑’的硏究>,≪考古學報≫1956­2 ; 崔茂藏 譯,<渤海 ‘貞惠公主墓碑’의 硏究>,≪高句麗·渤海文化≫, 集文堂, 1982, 참조). 成王代에는 中興, 康王代에는 正曆, 定王代에는 永德, 僖王代에는 朱雀, 簡王代에는 太始, 宣王대에는 建興 등과 같이 역대의 국왕들이 모두 연호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왕들이 각기 연호를 고쳐 쓴 것은 대흥이나 중흥, 태시, 건흥 등의 예에서 보듯이 정치개혁의 상징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선왕의 뒤를 이은 大彝震도 咸和라는 연호를 세웠다고 하지만, 그 이후의 기록에는 국왕의 연호사용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시호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연호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지 계속해서 이를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발해 정치의 전제성과 자주성은 발해왕이 황제의 칭호인 ‘皇上’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문왕의 둘째 딸인 貞惠公主와 넷째 딸인 貞孝公主의 묘지를 보면 문왕을 ‘황상’ 및 ‘大王’ 등으로 부르고 있다.258)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一潮閣, 1995), 101∼105쪽. 이것은 곧 발해가 시호를 왕으로 정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조정에서의 호칭은 황제 등으로 사용하였음을 나타낸다. 황제라는 호칭이 문왕대에만 국한하여 사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발해 조정에서 통치자를 황제라고 호칭하였던 사실은 발해가 자주적인 왕조였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발해국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문제되는 것은 발해왕이 당나라로부터 ‘左驍衛大將軍’이니 ‘忽汗州都督’이니 하는 관직과 함께 ‘渤海郡王’이나 ‘발해국왕’으로 책봉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중국학계에서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동아시아에서 책봉은 외교적 승인의 의미를 갖는 것일 뿐이지, 결코 이것이 당과 주변국의 외교적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특히 당의 인접국에 대한 책봉은 당의 일방적인 외교행위였다. 물론 발해는 당의 책봉을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의 책봉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당의 책봉이 곧 발해왕실의 비자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해는 책봉을 받은 뒤에도 자국의 이익에 어긋난다고 여겼을 경우에는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도 하였다. 대문예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를 보호하고 있던 당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예이다.

 한편 발해의 자주성과 관련하여 당에 대한 ‘朝貢’의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즉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200여 년 동안 1∼3년 사이를 두고 당에 조공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한다.259)王承禮 저, 宋基豪 역,≪발해의 역사≫(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159∼165쪽「발해와 당 왕조의 왕래 일람표」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중국학계에서는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 내지 ‘藩屬國’의 봉건신하로서 당에 조공하였다고 주장한다.260)王承禮 저, 宋基豪 역, 위의 책, 165쪽. 그러나 고대 동아시아사에서 조공이 갖는 의미는 ‘官營貿易’이나 ‘교류’ 및 외교적 승인을 위한 절차였다는261)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對하여-淸海鎭大使張保皐를 主로 하야->(≪震檀學報≫1, 1934).
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歷史敎育≫10, 1967).
李春植,<朝貢의 起源과 그 意味-先秦時代를 중심으로->(≪中國學報≫10, 1969).
점을 감안한다면, 조공의 유무를 들어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 내지 번속국이었다고 하는 주장은 역사적 실상과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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