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1) 신분제도

 발해의 사회 신분은 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평민(백성), 그리고 하층민인 部曲 및 奴婢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 신분을 다시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으로 구별하는 것은 姓氏의 有無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南宋의 洪皓는≪松漠紀聞≫에서 발해의 王姓은 大氏이고, 유력가문의 성은 高·張·楊·竇·烏·李氏 등 불과 몇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부곡과 노비 등 성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주인을 따랐다고 하였다.282)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國.
≪송막기문≫의 기록은 姓이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한 신분제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이며(鈴木靖民,<渤海の首領制-渤海の社會と地方支配->,≪歷史學硏究≫547, 1985 ;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1990, 128쪽), 7세기말에서 10세기 초엽에 걸쳐 성씨를 가졌던 사람들은 발해사회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로 볼 수 있다(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南北國의 形成과 展開-≫, 신서원, 1994, 241쪽). 그리고 이 기록에서 평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이들이 성이 없는 부류지만 부곡이나 노비와 같이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사회에서도 백성은 성(씨)가 없이 이름만 있었다(≪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왕족인 대씨 집단은 발해의 최고 통치계층으로서, 왕을 비롯한 그 가족들은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예를 들면 신하와 백성들이 왕을 일상적으로 지칭할 때에는 ‘可毒夫’라 하였고, 왕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基下’라 하였으며, 왕의 앞에서는 ‘聖王’이라 호칭하고 그의 명령은 ‘敎’라고 하였다. 또한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처는 ‘貴妃’, 맏아들은 ‘副王’이라 하고, 그 아래의 자식들은 ‘王子’라고 하였다.283)≪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傳.
≪冊府元龜≫권 962, 外臣部, 官號.
이 밖에 발해 3대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墓誌에서 ‘公主’란 칭호도 확인되었다. 또한 副王은 太子 혹은 東宮이라고도 불렸는데, 발해의 동궁제는 적어도 8세기 중엽 무렵에는 실시되었다고 한다(酒寄雅志,<渤海王權の一考察-東宮制を中心として->, 旗田巍先生古稀記念會 編,≪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145∼146쪽).
武王 때부터 역대 왕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사후에는 여러 가지 諡號를 달았다. 특히<貞惠公主墓誌>와<貞孝公主墓誌>에 의하면 文王은 재위기간중에 ‘聖人’·‘皇上’ 혹은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로 지칭되고, 이것을 기록할 때에는 한 칸을 비우는 방식으로 특수한 존경이 표시되어 있다.284)문왕의 여러 칭호 및 존호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방학봉,<정효공주묘지의 ‘대왕’‘성인’‘황상’에 대하여>(≪발해문화연구≫, 이론과실천, 1991).
宋基豪,<발해 文王代의 개혁과 사회변동>(≪韓國古代史硏究≫6, 1993), 57∼62쪽.
한편 발해에서는 왕위계승이 부자간의 直系嫡子繼承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적자가 없거나 재위기간이 짧은 경우에는 적자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제계승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285)酒寄雅志, 앞의 글(임상선 편역, 앞의 책, 142쪽).

 귀족 가운데 고·장·양·두·오·이씨의 성을 지닌 右姓望族들은 발해 정권에서 관직이 높고 권세가 막대한 유력가문이었다.286)현재 알려져 있는 발해인은 유민을 포함하여 380명인데, 이 가운데 대씨가 117명, 고씨 63명, 장씨 20명, 양씨 8명, 오씨 13명, 이씨 21명, 두(賀)씨는 4명으로서 전체 발해인의 65%인 246명이 왕실과 유력귀족 가문이다(宋基豪,≪渤海의 歷史的 展開 過程과 國家 位相≫, 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5, 69쪽).
右姓家門의 출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宋基豪, 위의 책(1995), 69∼70쪽.
白鳥庫吉,<渤海國に就いて>(≪史學雜誌≫44­12, 1933 ; 임상선 편역, 앞의 책, 92쪽).
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6, 族俗考.
金鍾圓,<渤海의 首領에 대하여-地方統治制度와 關聯하여->(≪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220∼221쪽.
고씨는 고구려 계통으로서 대조영집단과 함께 행동하였거나 요동지방에서 발해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후예일 것이다. 장씨도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양씨는 말갈인으로 추측된다. 두씨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賀氏의 잘못일 가능성이 많다. 오씨도 발해 건국 때 공을 세웠기 때문에 지배층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한편 문왕 사후 大元義를 몰아내고 大華璵(成王)를 왕으로 추대한 ‘國人’의 실체도 右姓 가문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287)‘國人’층은 8세기말 문왕을 중심으로 上京지역에 기반을 가진 세력으로서 東京지역에서 일본과의 무역을 통하여 富를 축적한 원의계와는 대립적인 입장에 있었다. 나아가 국인층이 왕권을 좌우할 정도의 세력이었다면 귀족층 중에서도 우성가문이 여기에 가장 근접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魏國忠·朱國忱,<渤海政治制度述略>(≪求是學刊≫1981­3 ; 김정배·유재신 편,≪발해국사≫(1), 정음사, 1988, 101쪽).
酒寄雅志, 앞의 글(임상선 편역, 앞의 책, 151쪽).
林相先,<渤海의 遷都에 대한 考察>(≪淸溪史學≫5, 1988), 44∼46쪽.
韓圭哲, 앞의 책, 106쪽.
. 우성망족을 제외한 일반 귀족으로는 다음의 49개 성씨가 확인되고 있다.

賀·王·任·馬·馮·呂·裵·崔·已·慕·郭·木·史·辛·解·趙·劉·朱·衛·吳·洪·林·申·夏·梁·羅·文·安·朴·胥·茹·卯·門·隱·周·列·公·多·聿·受·智·壹·葱·古·阿·達·冒·謁·渤海(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6, 族俗考).

 위의 성씨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이 발해국의 주민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을 암시하여 준다. 왕씨는 漢族일 가능성이 많으며, 박·최씨는 신라와 관련된 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茹·율·지·다·이·慕·총·공·고·아·冒·알 등의 성씨와 이름의 끝에 德·蒙이 있는 인물들은 다수가 말갈 출신일 것이다. 이들 관료와 귀족들에게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높고 낮은 등급을 규정하는 품계가 있었는데, 등급에 따라 직권뿐만 아니라 대우도 달라 입는 옷의 색깔, 笏, 장식 등이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다. 발해에는 또 왕과 부왕 아래에 적어도 公·侯·伯·子·男 등 5개 작위의 등급이 있었다.288)王承禮 저·宋基豪 역,≪발해의 역사≫(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127쪽.
魏國忠·朱國忱, 앞의 글(김정배·유재신 편, 앞의 책, 107∼109쪽).

 평민은 성이 없는 신분으로서 編戶 혹은 百姓289)≪類聚國史≫에는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고구려인이 적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의 백성에 대해서는 平民으로 보는 경우(盧泰敦,<渤海國의 住民構成과 渤海人의 族源>,≪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264쪽 및 최태길,<발해국에서 사용한 “百姓”이란 단어에 대하여>,≪발해사연구≫3, 연변대학출판사, 1992, 279∼288쪽)와 庶官(百官)의 칭호로 보는 견해(金毓黻, 앞의 책, 권 15, 職官考, 雜職 및 張博泉·程妮娜,<論渤海國的社會性質>,≪學習與探索≫1982­5 ; 김정배·유재신 편, 앞의 책, 117쪽)가 있으나 후자의 경우라면 발해의 관리 중에 말갈인이 고구려인에 비해 다수라는 논리로 귀결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한편 백성을 姓을 가진 在地首長層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大隅晃弘,
<渤海の首領制-渤海國家と東アジア世界->,≪新潟史學≫17, 1984, 114쪽), 이것 역시 타당한 설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라고도 하며, 고구려인에 비하여 말갈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민은 국가호적에 편입된 자들로서 농민이 위주이고 그 외에 상인과 수공업자 등이 있었다. 이들은 租와 徭役, 兵役 등을 담당하는 계층이었다.290)그런데 발해 宣王 9년(826)에 축조된 함경북도 명천군 보촌리의 開心寺에서 1980년대에 발견된 글쪽지에는 절을 만든 木手가 팽가와 석가라고 하여 수공업자 중에는 성이 있는 부류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해서는 송기호,<開心寺 出土 글쪽지>(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III,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481∼482쪽 참조.

 한편 발해의 신분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것은 部曲과 奴婢이며, 이들도 평민과 마찬가지로 姓이 없었다. 이들은 중앙 귀족세력이나 지방 토착세력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특히 지방 토착세력인 首領層의 세력기반이기도 하였다.291)宋基豪,<渤海의「多人葬」에 대한 연구>(≪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81쪽. 부곡은 원래 군대 편제의 호칭이었으나, 唐에 이르러 주인에게 예속된 家僕으로 되었고, 주인의 放免을 거쳐야 평민으로 될 수 있었다. 부곡의 신분은 평민보다 낮고 노비보다는 높았지만, 마음대로 주인을 떠나지 못하는 예속된 존재였던 점에서는 노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부곡은 아마 신라보다는 당의 그것과 같이 개인에게 예속된 천민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92)王承禮 저·宋基豪 역, 앞의 책, 127쪽
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古代篇(一潮閣, 1982), 354쪽.

 노비는 아무런 인신자유와 재산이 없는 존재로서 착취와 압박을 가장 심하게 받는 계층이었으며,293)발해사회의 노비도 관노비와 사노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방학봉,<발해 대원의가 피살된 사회적 배경과 그 성격에 대한 연구>,≪발해사연구≫, 정음사, 1989, 110쪽 및 張博泉·程妮娜, 앞의 글, 118쪽). 주인의 무덤에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발해사회에서 노비가 대부분 주인에게 예속된 小作農(佃戶)과 수공업자들이었다는 주장294)孫秀仁·干志耿,<論渤海族的形成與歸向>(≪學習與探索≫1982­4 ; 김정배·유재신 편, 앞의 책), 126∼139쪽.도 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들 부곡과 노비는 경제적인 이유거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이유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몰락하여 천민화하거나 혹은 그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부류였다고 해야겠다.295)李基白·李基東, 앞의 책, 354∼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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