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2) 한문학

2) 한문학

 발해인이 남긴 문학작품들은 중국과 일본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웠지만, 금세기에 들어서 金毓黻이 대부분을 수집하여 놓았기 때문에,405)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8, 文徵. 그 뒤의 연구에서 많이 활용되었다.406)발해 문학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조된다.
朱國忱·張泰湘·吳文銜·魏國忠,<關于唐代渤海國的文學藝術>(≪求是學刊≫1980­3).
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 1982), 214∼229쪽.
鄧偉,<論渤海文學>(≪學習與探索≫1984­3).
王承禮 저·宋基豪 역,≪발해의 역사≫(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236∼246쪽.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조선전사≫5(제2판,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1), 164∼168쪽.
金武植,<渤海 文學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碩士學位論文, 1992).

 발해인들이 얼마나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高元固와 관련된 글에서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다.407)≪全唐詩≫11函 1冊, 徐夤. 그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徐夤을 만나러 閩中(福建省 福州)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서인을 만나서 그가 지은<斬蛇劍賦>·<御溝水賦>·<人生幾何賦>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금으로 써서 병풍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들이 급제한 것이 892년이므로 그 시기는 10세기 초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러한 발해인들의 취향으로 보아서 많은 문학작품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극소수만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발해인의 문학작품으로 文章과 詩가 남아 있는데, 우선 문장부터 살펴보겠다. 문장은 私的인 것보다는 외교관계와 관련하여 국가 사이에 오고간 공식 문서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문장형식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騈驪文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散文도 있다. 발해는 당·일본·신라·거란·돌궐 등의 이웃 나라들과 외교 교섭이 있었지만 전해지는 문서들은 당 또는 일본과 오간 것들뿐이다. 그 숫자를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에 보낸 것이 1편, 당나라에서 발해에 보낸 것이 10편이 된다. 그리고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것이 23편,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것이 28편이다.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160차례 이상이 되지만, 발해가 당나라에 보낸 문서는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賀正表 1편만이 남아 있다.408)洪皓,≪松漠紀聞≫권 下. 이 글은 4·6句의 변려문 형식을 띠고 있고, 한 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23편의 문서 가운데에서 발해 국왕이 보낸 것이 16편이고, 발해 中臺省이 일본 太政官에 보낸 관청문서가 7편이다.409)宋基豪,<渤·日 國書를 중심으로 본 9세기의 발해사회>(≪汕耘史學≫7, 1993), 7∼9쪽 표 참조. 앞의 것은 일본 사료에서 書·啓·啓狀·別狀 등으로 칭해지는 것들이고, 뒤의 것은 牒으로 칭해지는 것들이다. 이들은 외교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대부분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서들을 통해서는 작자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이들을 분석해 보면 발해 초기에는 변려문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후기로 갈수록 對句가 적어지고 문장의 호흡이 자유로워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410)金武植, 앞의 글, 26쪽. 이것은 발해 문학의 전반적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 裴璆가 東丹國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조정에 사과하는 글을 올린 것이 있다.411)≪本朝文粹≫권 12. 이 때는 발해가 멸망한 지 4년이 되는 930년에 해당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遺民의 문장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가 주로 멸망 전에 활동하였으므로 발해 문학에 넣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典故를 끌어들이면서 四六(文)과 對句를 구사하여 훌륭한 문학적 재질을 보여주고 있다.412)金武植, 앞의 글, 31쪽.

 이상은 외교와 관련된 문장들이지만 개인적 목적을 위해서 쓰인 문장도 없지는 않다. 첫째는 발해 승려인 貞素가 靈仙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에 붙여진 序가 있다.413)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3, 開成 5년 7월 3일. 이 글은 산문으로 쓰여 있다. 둘째는 貞惠公主와 貞孝公主의 墓誌이다. 이들은 序와 銘을 갖추어 당나라의 전형적인 墓誌文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정효공주묘지는 전형적인 변려체 문장으로서, 12행의 서문과 5행의 銘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정혜공주묘지와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부분만 다르고 거의 대부분이 일치한다. 이 점으로 보아 당시에 文籍院과 같은 곳에 원본을 작성해 두었다가 개인적 신상에 관한 부분만 수정하여 문장을 작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실은 문왕 때에 당나라의 수준높은 문화를 습득하여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만들지 못하고 아직은 모방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제 漢詩로 눈을 돌려보자. 발해인의 시는 貞素가 중국에서 지은 1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일본 문인들과 시문을 교환하였던 발해 사신으로는 758년에 파견된 副使 楊泰師, 814년에 파견된 大使 王孝廉과 부사 高景秀414)≪文華秀麗集≫권 上, 和渤海入覲副使公賜對龍顔之作. 및 錄事 釋仁貞, 858년에 파견된 부사 周元伯, 871년에 파견된 대사 楊成規와 부사 李興晟, 882년에 파견된 대사 裴頲, 894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415)≪菅家文草≫권 5, 客館書懷同賦交字寄渤海副使大夫 및 和副使見詶之作. 907·919·929년에 파견된 대사 裴璆가 있다.

 일본에서는 이들 문인을 대하는 데에 대단한 신경을 썼다. 주원백이 파견되었을 때에 문장에 능한 嶋田忠臣을 加賀權掾으로 삼아 응대하도록 조처하였고,416)≪日本三代實錄≫권 2, 淸和天皇 貞觀 원년 3월 13일. 양태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 掌渤海客使로 임명된 都言道가 조정의 허락을 받아서 자신의 이름을 都良香으로 개명하였다.417)≪日本三代實錄≫권 21, 淸和天皇 貞觀 14년 5월 7일. 자신의 이름이 발해 사신을 접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雅化시킨 것이다. 또한 ‘七步之才’418)≪菅家文草≫권 7, 鴻臚贈答詩序.를 지녔다고 할 정도로 즉흥시에 능한 배정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일본조정에서는 임시로 菅原道眞을 治部大輔로 삼고, 嶋田忠臣을 玄蕃頭로 삼아 응대하도록 하였고,419)≪日本三代實錄≫권 43, 陽成天皇 元慶 7년 4월 21일. 문장에 능하지 못한 藤原良積이 연회 도중에 퇴장해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420)≪日本三代實錄≫권 43, 陽成天皇 元慶 7년 5월 10일. 이 때 그는 强仕(40세)가 채 되지 않았던 젊은 나이였다.421)繼和渤海裴使頭見酬菅侍郞紀典客行字詩의 “多才實是丹心使 少壯猶爲白面郞” 구절 다음에 “大使年未及强仕故云”이란 주가 달려 있다(≪田氏家集≫권 中). 12년 후 그가 다시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에 관원도진은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宰相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422)≪菅家文草≫권 5, 客館書懷同賦交字呈渤海裴令大使.

 이들 문인들이 파견된 시기는 양태사를 제외하고 모두 9세기였다. 특히 왕효렴 일행마저 제외한다면 9세기 중반 이후가 된다. 그리고 일본에서 발해 문인들을 대하는 데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도 9세기 중반 이후의 일로서, 이 무렵에 발해 사신의 문장에 대한 식견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양태사 2수, 왕효렴 5수, 석인정 1수, 석정소 1수로서 모두 9수가 있다. 시의 제목을 보면 양태사의<夜聽擣衣>·<奉和紀朝臣公詠雪>, 왕효렴의<奉勅陪內宴>·<春日對雨得情字>·<在邊亭賦得山花戱寄兩箇領客使幷滋三>·<和坂領客對月思鄕見贈之作>·<從出雲州書情寄兩箇勅使>, 석인정의<七日禁中陪宴>, 석정소의<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尙詩幷序>이다. 이 밖에 배정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시는 五言律詩 2수, 七言古詩 1수, 七言絶句 6수로 되어 있어서 발해인들이 7언시를 즐겨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내용으로는 일본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 있는가 하면, 멀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향수를 그린 것도 있다.

 고국을 그리는 시로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 양태사의<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라는 서정시이다.423)≪日本詩紀≫권 6. 이 시는≪經國集≫권 13에도 실려 있지만, 滋野貞主의 시와 뒤섞여서 잘못 편집되어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서리 기운 가득한 하늘에 달빛 비치니 은하수도 밝은데

나그네 돌아갈 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네

홀로 앉아 지새는 긴긴 밤 근심에 젖어 마음 아픈데

홀연히 들리누나 이웃집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

바람결에 그 소리 끊기는 듯 이어지는 듯

밤 깊어 별빛 기우는데 잠시도 쉬지 않네

나라 떠나온 뒤로 아무 소리 듣지 못하더니

이제 타향에서 고향 소리 듣는구나

방망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다듬잇돌 평평한지 아니한지

멀리서 가녀린 몸에 땀흘리는 모습 측은히 여기며

밤 깊도록 옥같은 팔로 다듬이질 하는 모습 보는 듯하네

나그네에게 따뜻한 옷 지어 보내려고 하는 일이지만

그대 있는 방 찬 것이 먼저 걱정이구려

비록 예의 잊어 묻기 어렵지만

속절없이 원망하는 그대 마음 모를 리야 있겠는가

먼 이역에 가 있네 그래도 새로 사귄 사람 없지

한 마음이기를 원하네 그러면서 길게 탄식하네

이 때 홀로 규중으로부터 탄식소리 들리니

이 밤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 고이는 것 그 누가 알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마음은 이미 그대에 젖어 있는데

또 들리누나 괴로운 이 마음

차라리 잠들어 꿈속에서 소리 찾아 가고 싶은데

다만 근심으로 잠 못드누나(<夜聽擣衣>)

 이 시는 일본에서 가을밤에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고국의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섯 번에 걸쳐 운을 바꾸면서 상념의 변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어서 높은 수준의 서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조정에서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는 왕효렴의<봄날에 비를 보고 情字를 얻어 지음>이란 시를 들 수 있다.

주인이 邊廳에서 잔치를 여니

上京에서처럼 심히 취하였네

아마 雨師도 聖意를 안 듯

단비가 촉촉이 내려 나그네 마음 적시네(<春日對雨得情字>)

 이상으로 발해 문학을 개관하여 보았다. 이 밖에도 발해遺民으로서 문학 작품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인물로서 遼나라 때의 天祚帝 文妃 大氏, 金나라 때의 王遵古·王庭堅·王庭筠·王萬慶 집안, 高衎·高憲 집안, 張汝爲·張汝能 형제 등을 열거할 수 있지만, 이들은 이미 발해 문학의 범주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해에 한자 이외에 고유 문자가 있었는지 간단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舊唐書≫渤海靺鞨傳에 “文字와 書記가 있다”고 한 기록과 기와에 찍혀 있는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들을 근거로 발해에 고유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고유 문자로 표기된 문장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발해인이 남긴 두 공주의 묘지나 詩文을 보면 이들은 한자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발해에 고유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宋基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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