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3. 예술
  • 1) 건축
  • (1) 성곽과 건물지

(1) 성곽과 건물지

 발해 성터에 대해서는 1933년과 그 이듬해에 일본의 東亞考古學會가 東京城(上京城)을 발굴하면서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었다. 그 뒤로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城이나 堡壘들이 상당수 조사되었는데, 만주 지역에서 80개 이상, 북한에서 20여 개, 연해주에서 28개 정도여서 전체 숫자가 120개를 넘는다.425)宋基豪,<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韓國史論≫19, 國史編纂委員會, 1989), 410∼413쪽.
엄장록,<연변지구 발해시기의 옛성터에 관한 고찰>(≪발해사연구≫1, 연변대학출판사, 1990), 120∼121쪽.
송기호,<北韓의 渤海史·統一新羅史 硏究>(≪北韓의 古代史硏究≫歷史學會 編, 一潮閣, 1991), 194∼195쪽.
에.붸. 샤브꾸노프,<沿海州의 渤海遺蹟>(≪中國 東北地方 및 沿海州에서의 韓民族史의 再構成≫제7회 韓國民族史 國際學術 심포지엄, 1994), 48쪽.
에.붸. 샤브꾸노프 엮음·송기호·정석배 옮김,≪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민음사, 1996), 84∼101쪽.

 이들 성터는 발해 때에만 사용된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이전에 만들어져 발해 때에 계속 사용된 것도 있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요·금나라 때에 수리되어 다시 사용된 것도 많다. 따라서 발해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면밀한 조사와 검토가 필요하지만 아직은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현재 편년 기준으로는 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의 양식이라는 두 가지가 이용되고 있는데, 앞의 경우에 성벽에 시설된 雉나 甕城 등의 유무가 주로 고려되고 있고, 뒤의 경우에는 기와와 陶器 양식이 주로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이 통일되지 않아 중국·북한·러시아에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면도 보인다.

 발해의 성은 입지 조건에 따라 平地城과 山城으로 분류된다. 예를 들면 上京城·八連城·西古城 등은 평지성에 속하고, 城山子山城·城墻砬子山城 등은 산성에 속한다. 기능에 따라서는 中心城과 이를 호위하는 衛城으로 분류되고 위성은 다시 堡壘·遮斷城 등으로 나누어진다. 성산자산성과 永勝遺蹟 주변에는 石湖古城·黑石古城·馬圈子古城·通溝嶺山城 등이 둘러싸고 있고, 강을 방어하기 위한 南臺子古城堡·大甸子古城堡·孫家船口古城堡 등의 보루도 있다. 서고성 주위에는 獐項古城·龍泉古城·紅星古城·河南屯古城 등의 위성이 자리를 잡고 있다.426)嚴長錄,<和龍縣西古城及其附近渤海遺迹調査>(≪博物館硏究≫1984­1). 함경도지역의 성을 예를 들면 靑海土城(北靑土城)은 중심성이고, 강미봉 보루나 노루목 보루 등은 강가에 축조된 보루에 속하며, 새덕 차단성이나 지방리 차단성은 차단성에 속한다.

 축성 재료를 기준으로 발해의 성곽을 분류하면 토성·석성·토석 혼축성이 있다. 평지성은 토성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산성은 석성과 토석 혼축성이 많고 그 중에서도 석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평면 형태에 따라 크게 長方形·正方形·不定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평지성은 계획적으로 축조되어서 여러 형태로 분류가 가능하지만,427)60여 개의 평지성에 대한 상세한 분류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리정봉,<발해국 평원성의 류형, 시기획분 및 그 특점>(≪발해사연구≫4, 연변대학출판사, 1993).
산성은 대체로 지형에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 부정형에 속한다. 장방형에 속하는 것에는 상경성·팔련성이나 서고성이 대표적이고, 정방형에 속하는 것에는 연길시 北大古城(延吉街 北土城)·돈화시 石湖古城 등이 있다. 연해주 크라스키노성터는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어 부정형에 속한다.

 발해는 전국에 5京·15府·62州 및 그 아래의 縣을 두어 다스렸고, 이러한 소재지마다 성을 쌓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기준에 따라 발해 성들을 都城·府城·州城·縣城으로 분류해 볼 수도 있다. 이 밖에 교통로의 요충지에 쌓은 성도 있다.

 도성에는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상경성(동경성)·서고성·팔련성이 있다.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은 吉林省 敦化市에 있는 초기 도읍지이다. 성산자산성은 大祚榮이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 東牟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영승유적은 발해 건국집단이 동모산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안정을 찾은 뒤에 평지로 내려와 중심지로 삼았던 장소로 유력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성터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서인지 종래에 지목하였던 敖東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상경성은 黑龍江省 寧安縣 동경성에 위치하고 있다. 756년초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가 되었던 곳이다. 서고성은 길림성 和龍縣에 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일시적으로 도읍을 삼았던 곳이며, 팔련성은 길림성 琿春市에 있는데 8세기 후반기에 10여 년간 도읍으로 정했던 곳이다.

 이러한 도성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경성이다. 이 성은 당나라 長安城을 본떠서 外城·宮城·皇城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은 동서로 긴 橫長方形의 평면을 하고 있고 북쪽 벽은 가운데가 밖으로 튀어 나와 있어서 전체적으로 ㅗ자형을 이루고 있다. 외성의 총 둘레는 16,296.5m이고, 10개의 성문이 시설되어 있으며, 성벽 밖으로는 垓字를 돌렸다. 외성 안에는 11개의 도로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의 坊을 이루고 있었다. 방의 전체 숫자는 81개 이상으로 추정되며, 4개의 방이 한 단위를 이루어 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일반 주택뿐 아니라 시장이나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성은 북쪽에 치우쳐 있고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도 五鳳樓라 불리는 궁성의 정문자리가 잘 남아 있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중심구역에는 7개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황성은 궁성 남쪽에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의 관청들이 있던 곳이다.

 府城으로 지목되는 것으로는 청해토성·蘇密城·大城子古城·유즈노 우수리이스크(Iuzhno Ussuriisk)성터 등이 있다. 南京 南海府의 소재지로 추정되는 청해토성은 함경남도 北靑郡에 있는데, 肅愼古城 또는 북청토성이라고도 칭해진다. 소밀성은 길림성 樺甸縣에 있고, 長嶺府의 소재지로 여겨지고 있다. 率賓府의 소재지로는 대성자고성 또는 유즈노 우수리이스크성터가 지목되고 있다.

 청해토성은 5경에도 속하던 곳으로서 전체 둘레가 1,342m인 방형 토성이다. 네 벽의 가운데에 성문이 서로 대칭되게 있고 성 안에는 이 문들을 연결하면서 十자 모양의 도로가 나 있다. 성벽에는 角樓와 옹성, 치가 설치되어 있다. 소밀성은 輝發河 남쪽 강가에 있으며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성은 내각이 직각을 이루지 않는 장방형으로서 둘레가 2,600m이고, 옹성과 각루가 시설되어 있지만 치는 없다. 외성 밖에는 해자가 두 겹으로 둘려져 있다.

 州城으로는 크라스키노(Kraskino)성터·溫特赫部城·薩其城·南城子古城·南湖頭古城 등이 거론되고 있다. 연해주 하산(Khasan)구역에 있는 크라스키노성은 동경 관할의 鹽州 소재지로 비정된다. 성 옆을 흐르는 강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얀치헤(Ianchikhe), 즉 鹽州河로 불렸기 때문이다. 혼춘시에 있는 온특혁부성이나 살기성도 역시 동경 관할의 慶州·穆州·賀州 등의 소재지로 추정되고 있다. 남성자고성은 獨奏州의 하나인 涑州의 소재지로 비정되고 있고, 남호두고성은 상경에 속하였던 湖州의 소재지로 거론되고 있다.

 크라스키노성은 불규칙한 원형 또는 반타원형에 가까운데 남북 400m, 동서 300m 정도이고 전체 면적이 14ha쯤 된다. 북·동·남벽에 각기 1개의 성문이 나 있고, 성문마다 장방형의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습지로 변해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려운데, 성 안에서는 절터와 기와 가마터 등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일본으로 파견되던 사신들이 배를 타던 항구 도시였다.

 縣城으로 비정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흑룡강성 영안현 城東鄕 土城子村에 있는 土城子古城이 상경 龍州 관할의 長平縣으로 보는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발해에는 5개의 중요한 대외교통로가 있었다. 당나라로 가던 營州道·朝貢道, 신라로 가던 新羅道, 일본으로 가던 日本道, 거란으로 가던 契丹道가 그것이다. 5京과 같은 주요 거점들을 서로 연결하던 내부 간선 교통로도 이러한 도로와 대체로 연계되어 있다. 동경에서 신라 국경지역까지 39개의 驛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주요 교통로에는 역을 설치하였고, 교통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요충지에는 城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이러한 성들에 대한 조사가 상당수 이루어짐으로써 구체적인 경로가 확인되고 있다.428)李健才·陳相偉,<渤海的中京和朝貢道>(≪北方論叢≫1982­1).
王俠,<琿春的渤海遺迹與日本道>(≪學習與探索≫1982­4).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吉林汪淸考古調査>(≪北方文物≫1985­4).
張殿甲,<渾江地區渤海遺迹與遺物>(≪博物館硏究≫1988­1).
劉曉東·祖延笭 저·박룡연 역,<남성자고성, 목단강변성과 발해의 흑수도>(≪발해사연구≫1, 연변대학출판사, 1990).

 발해 성터에 대한 연구로서는 고구려 및 당나라 성과 비교하여 발해 성의 변화과정을 언급한 것이 주목된다.429)주영헌,<발해 중경 현덕부에 대하여>(≪고고민속≫1966­2), 3쪽.
魏存成,<渤海城址的發現與分期>(≪東北考古與歷史≫1, 1982).
발해 성은 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처럼 초기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集安의 丸都山城과 國內城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다가 문왕이 8세기 중반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長安城을 모방하여 평지성 중심의 방어체계로 전환하게 된다. 상경성이나 서고성과 팔련성은 이러한 계통에 속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변화과정을 보면 발해의 성은 건국기에 고구려식을 계승하다가 문왕 시기쯤부터 당나라식으로 전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 내외에 건축되었던 건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조사되지는 않았다. 발해시대의 건물로서 궁전이나 관청자리·성문·정원·교량·우물 등이 조사되었고, 절과 탑자리도 많이 확인되었으며 평민 주거지도 조사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무덤 위에서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고, 건물 성격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24개석 주춧돌 유적도 여러 곳에서 10여 개가 발견되었다.

 궁전과 관청자리는 상경성에서 조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궁전은 모두 7개인데, 이 중에서 5개의 궁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건물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1궁전지는 속칭 金鸞殿이라고 하는데, 궁전의 기단은 높이 2.7m, 동서 길이 55.5m, 남북 너비 24m 정도이다. 그 뒤로 궁전들이 이어지는데, 제2궁전지 옆에는 八寶琉璃井이라 불리는 발해시대의 우물이 잘 남아 있다. 제4궁전지와 그 서쪽 건물에는 ㄱ자형의 온돌장치가 시설되어 있어서 寢殿址로 보이는데, 이러한 온돌장치는 궁성의 서쪽 구역에서도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관청자리는 거의 발굴되지 않아서 면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 밖에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속칭 御花園이라 불리는 禁苑址가 있는데, 이 곳에는 인공으로 만든 못과 산이 있고 정자터도 확인되었다. 상경성 부근의 牡丹江에서는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던 五孔橋, 七孔橋 등과 같은 교량 유적이 여러 개 남아 있다. 한편 성에서 벗어난 지역에서도 주거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평민 주택으로 보이는 반지하식 건물지들이 東寧縣 團結유적에서 발굴되었고, 연해주 일대에서도 성 안팎에서 화덕자리나 온돌장치가 딸린 반지하식 또는 지상식 주거지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琿春市 甩灣子村과 東六洞, 林口縣 烟筒砬子에서는 교통로에 위치한 특수한 용도의 기와 건물터가 조사되었다. 건물 축조에 사용되었던 기와와 벽돌을 굽던 窯址도 상경성 부근의 杏山과 크라스키노성터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이상의 유적들은 주춧돌이나 기단만 남아 있기 때문에 상층구조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다만 상경성 제2 절터에 있는 석등의 火舍石과 屋蓋石에 표현된 기둥, 枓栱, 기와 지붕과 같은 목조건물 양식은 건물 복원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리고 1987년에 연해주 하산구역에서 발견된 佛板에도 불상이 안치된 목조건물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이 방면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430)E.V. Sharvkunov, A.L. Ivliev 著·宋基豪 譯,<연해주에서 출토된 발해 佛板>(≪美術資料≫50, 국립중앙박물관, 1992). 鴟尾나 鬼面瓦, 그 밖의 기와 출토 현상을 통하여 건물 양식을 추정하기도 하고, 주춧돌의 평면 각도와 배열상태를 바탕으로 각기 기둥의 안쏠림과 안휘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제2 절터의 석등 竿柱石 형태에서 기둥에 배흘림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寶相華文塼과 같은 벽돌을 깔아 장식하였고, 발해에서 독특하게 기둥이 썩지 않도록 기둥밑 장식기와(柱礎裝飾瓦)를 기둥 둘레에 돌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료를 토대로 건물 원형을 복원해보려는 시도가 다각도로 행해지고 있다.431)장상렬, 앞의 글(1971) 및<부록 : 몇 개의 발해건축에 대한 외관복원>.
張鐵寧,<渤海上京龍泉府宮殿建築復原>(≪文物≫1994­6).
이 밖에 건축에 사용된 자(尺)가 고구려 자를 기본으로 하였는지 아니면 당나라 자였는지에 관해서도 논의되었다.432)村田治郞,<渤海王國の造營尺>(≪日本建築學會硏究報告≫15, 1952).
장상렬, 위의 글, 149∼160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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