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1. 중대에서 하대로
  •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2) 혜공왕 말년(780)의 정변 ― 중대의 종말

 중대의 역대 군주들은 권력집중을 목표로 하여 불교의 華嚴的인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면서 和平世界의 실현을 선전하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라를 위한 영속적인 질서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사실 聖德王 때까지는 이기적인 진골귀족들을 억누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여 표면상 화평의 세계를 謳歌하기도 했었다. 다만 그것은 왕실과 진골귀족세력 사이의 현존하는 긴장을 억제하는 데 불과했을 뿐이며, 긴장 그 자체를 해소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화평세계의 허상이 노출되고, 또한 이를 선전했던 국가권력이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만 하면 그 긴장은 거세게 폭발적으로 분출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이같은 불길한 징후는 景德王의 치세 후반부터 노출되기 시작했다. 왕은 본디 야심에 불타는 고집센 전제군주였다. 왕은 진골귀족 중심으로 운영되는 和白會議體를 견제하여 국왕 중심의 전제적 정치체제를 달성하려고 했다. 즉 신라 정치 전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백회의체에 대신하여 중국적인 군주제도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러자면 유교정치이념을 적극 도입하고 아울러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관료제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律令體制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교사상으로 무장된 관료집단의 양성이 요구되었다.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경덕왕이 주력한 것은 國學의 진흥이었다. 주지하듯 국학은 진덕여왕 5년(651)의 정치개혁 때에 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한 최고 학부였다. 다만 국학은 하급관료와 無位者를 대상으로 유학을 교육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진골귀족보다는 하급귀족, 특히 六頭品이 이에 가장 흥미를 보였다.004)李基白,<新羅 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1970 ; 위의 책, 226∼231쪽). 따라서 그간 큰 발전을 보지 못했다. 이에 경덕왕은 6년(747) 정월 국학에 博士와 助敎를 두어 유교경전을 가르치게 하였다. 더욱이 경덕왕은 국학에 文廟를 설치하여 소위 廟學制를 확립하기까지 했다. 경덕왕의 후계자인 혜공왕이 즉위 원년(765)에 국학에 行幸하여 교수관인 박사로 하여금≪尙書≫를 강의케 한 것이나, 동왕 12년 2월 다시금 국학에 가서 강의를 들은 것은 경덕왕 父子의 국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준다. 어쩌면 국왕의 幸學 때에는 문묘에서 釋奠祭를 거행했을 개연성이 크다.005)高明士,≪唐代東亞敎育圈的形成≫(臺灣國立編譯館, 1984), 336쪽.

 중국식의 복잡한 儀禮主義的인 제도국가를 지향한 경덕왕의 시도는 진골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화백회의체의 의장인 上大等 金思仁은 경덕왕 15년 2월 왕의 개혁정치에 제동을 거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그는 당시 잇따라 발생하고 있던 災異현상을 표면상의 이유로 내걸었으나, 실상 유교정치사상에서는 재이현상 자체를 국왕의 失德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 설명했던 것이다.006)李熙德,<古代의 自然觀과 儒敎政治思想>(≪韓國古代自然觀과 王道政治≫, 韓國硏究院, 1994) 참조. 하지만 경덕왕은 자신의 개혁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사인은 이듬해 정월 신병을 구실로 상대등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경덕왕은 심복인 金信忠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본디 상대등은 국왕과 거취를 같이 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국왕에 의한 상대등의 견책성 교체란 신라의 정치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매우 異例的인 일이었다. 경덕왕의 先代 왕들은 화백회의체를 잘 조종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경덕왕은 상대등 교체라는 강경책으로 나온 것이다.

 경덕왕은 상대등을 교체한 직후 한편으로는 진골귀족에 대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한 듯하다. 일찍이 삼국통일 직후인 神文王 9년(689)에 혁파한 바 있는 祿邑을 16년(757) 3월에 부활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고 짐작된다. 하지만 왕은 이 해 12월 전국 9州 및 그 예하의 117郡·293縣의 이름을 모두 漢式으로 고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어 1년쯤 지난 뒤인 18년 정월부터 2월에 걸쳐 거의 모든 관청 및 관직의 이름을 역시 한식으로 고쳤다. 신라 고유의 지명과 관명을 한자 어휘로 개명한 이 漢化政策이 함축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대 왕권이 골품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줄기차게 시도한 專制化 경향의 상징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007)李基白,<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社會科學≫2, 1958 ; 앞의 책, 1974, 246∼247쪽).

 경덕왕대 후반기는 국제정세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경덕왕 14년 중국에서 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 唐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신라 朝野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찍이 당과의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든 望德寺 13층탑이 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진동하고 開合하여 며칠 동안 쓰러질 듯하였던 사실을 놓고 신라인들이 안록산의 난과 결부시켜 해석했다는≪新羅國記≫의 기사를 보더라도 이 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골귀족과의 권력투쟁에 지칠대로 지친 경덕왕은 만년에 의욕을 잃고 宴樂에 탐닉했다. 그 결과 왕의 정치개혁을 지지하던 측근의 寵臣들까지도 하나씩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다. 경덕왕 22년 8월에는 왕당파의 거두인 김신충마저 상대등직에서 물러나 怨歌를 지어 실의의 말년을 자위했다. 심한 고독 속에서 경덕왕은 재위 24년 6월 세상을 떠났다.

 경덕왕의 뒤를 이어 태자이던 乾運이 즉위하여 혜공왕이 되었다. 즉위 당시 왕은 8세였다. 이에 母后가 섭정했지만 선왕 때부터 노출되기 시작한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억제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다. 왕이 즉위한 이듬해 정월 두 해(二日)가 출현하여 불길한 장래를 예고했는데, 과연 동왕 4년(768) 7월에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 一吉湌 大恭은 그 아우인 阿湌 大廉과 함께 무리를 모아 왕궁을 33일간이나 포위한 끝에 진압되었다.≪三國遺事≫에 이 때 王都 및 5道 州郡의 96角干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워졌다고 한 것을 보면 내란은 전국에 걸친 대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新唐書≫ 新羅傳에는 이 때의 대란이 3년만에 진정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혜공왕 6년(770) 8월에 일어난 대아찬 金融의 반란까지를 연속적인 것으로 오해한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대공의 반란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는 결국 혜공왕대의 동란을 예고하는 적신호였다. 그 뒤 조정은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끊임없이 동요했다. 그러던 중 혜공왕 10년 9월 金良相이 상대등이 되면서 정치상의 실권은 反王派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친왕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1년 6월의 金隱居의 거병이라든지 8월의 廉相 등의 거병은 모두 親衛 쿠데타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008)李基白, 위의 책, 232∼236쪽. 하지만 이같은 국왕의 권력 만회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김양상 일파는 12년 정월에 경덕왕이 고친 百官의 칭호를 17년만에 모두 복구시키는 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단순히 경덕왕의 개혁정책에 대한 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실로 이같은 조치는 중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뜻하는 대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009)李基白, 위의 책, 244∼247쪽.

 혜공왕 16년 2월 김양상 일파와 대립하고 있던 金志貞이 무리를 모아 궁궐을 포위했다. 국왕은 그의 거병을 내심 반겼을 터이다. 그러자 失權의 위기에 몰린 김양상은 金敬信 등의 협력을 얻어 이 해 4월 君側의 惡漢을 숙청한다는 구실 아래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은 김지정의 군대를 토벌한 뒤 혜공왕까지 시해하였다. 이로써 중대는 최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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