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5.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1) 귀족 및 사원의 농장경영과 왕경의 번영

 신라통일기를 통해서 진골귀족들의 압도적인 우세를 지탱시킨 기초에는 그들의 대토지 경영이 있었다. 삼국통일을 성취할 때까지 신라는 1백 년 이상 가혹한 생존전쟁을 체험한 까닭으로 귀족 역시 긴장과 고난의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귀족들은 이 기간 동안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윽고 통일이 달성되자 귀족들은 포로와 말 등 많은 戰利品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통일 직후인 神文王 9년(689), 그간 진골귀족들의 사적 기반이 되어 온 祿邑이 폐지되어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이 녹읍은 일정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물과 더불어 그 곳에 거주하는 백성의 노동력까지를 징발할 수 있는 일종 食邑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대 말기인 景德王 16년(757)에 녹읍이 부활되었다. 비록 이「후기녹읍」은 그간 국가가 孔烟制라든가 9등호제, 특히 計烟의 설정 등을 통해서 백성의 경제력을 속속들이 파악한 데서 나온 자신감의 표시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귀족관료들이 후기녹읍에서 주민과 토지에 대한 총체적 지배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이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057)金基興,≪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역사비평사, 1991), 156∼157쪽. 한편 녹읍의 부활을 주도한 세력이 전제왕권 아래서 새로이 성장한 관료적 진골귀족이었다는 견해도 있다(李喜寬,≪統一新羅 土地制度硏究―新羅村落帳籍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94, 74∼77쪽 참조). 곧 이어 하대가 개막되었고 전반적으로 국가권력이 쇠퇴하자 진골귀족들은 녹읍 이외에 토지 겸병 혹은 개간 등의 수단을 통해서 점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新唐書≫新羅傳에 “재상 집에는 祿이 끊이지 않고 奴僮이 3천 명이나 되고 甲兵과 牛·馬·돼지 등도 이와 맞먹는다. 가축은 海中의 산에 放牧을 했다가 필요할 때면 활을 쏘아서 잡는다”고 한 것은 당시 귀족들의 농장경영 실태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생생한 자료이다. 다만 이 기록은 얼마쯤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본 승려 圓仁의≪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會昌 7년(847) 9월 6일자의 기록에서 보듯 신라 제3재상의 放馬處가 무주의 남쪽 경계인 黃茅島의 奧地에까지 놓여 있을 정도로 진골귀족의 목장은 전국에 걸쳐 존재했다. 당시 絶影島는 말 사육장으로 유명하여 훗날 후백제왕 甄萱은 이 곳 駿馬를 고려 太祖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대토지경영은 비단 귀족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와 왕실, 귀족들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성장해 온 사원세력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文武王 4년(664) 조정은 사람들이 함부로 財貨와 田地를 사원에 기부하는 행위를 금지했으나 통일기에 들어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사원에 토지와 노비를 기부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원 소유의 토지는 免稅의 특전을 누렸다.

 그런데 佛事활동에 열성적인 귀족들 중에는 직접 出家하거나 혹은 가족을 출가시켜 사원을 관리하게 하는 등 사원 사유화 및 그 소유권의 세습현상을 나타내기도 했다.058)郭丞勳,<新羅 中代 末期 中央貴族들의 佛事活動>(≪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368∼375쪽). 특히 하대에 들어오면 哀莊王 7년(806) 3월 불사의 新創을 금지하는 조정의 布告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다투어 願刹을 건립했는데, 여기에는 재산 도피의 목적도 일부 작용했다. 또한 살던 집을 精舍로 만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밖에도 왕실과 귀족들로부터 佛像이나 탑을 조성하기 위해 재물을 헌납하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三國遺事≫권 3, 塔像條를 보면 당시 사원들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 소위 莊舍를 설치하고 관리인으로 知莊을 파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五臺山 眞如院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화엄경 轉寫 비용을 마련할 요량으로 매년 가까운 州縣으로부터 倉租 1백 石과 淨油 1石을 받았으며 이와는 별도로 부근의 柴地 15結과 栗枝 6결, 坐位 2결을 받아 장사를 두었다고 한다. 또한 9세기 전반경에 世達寺는 溟州 捺李郡(현재의 寧越)에 장사를 두고 승려 調信을 보내어 지장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신은 뒤에 京師로 돌아가 私財를 기울여 淨土寺를 창건한 바 있었다.

 통일기 신라의 모든 富는 왕경에 집중되었다. 당시 왕경은 5개의 지방도시인 小京에 대하여 大京이라 불려졌는데,≪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전성시대 왕경의 戶口數는 17만 8,936호였다고 한다. 한 집에 평균 5명으로 계산하면 이는 90만 명에 달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따라서 17만이라는 숫자는 호구수가 아닌 인구수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당시로서는 거대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삼국통일 초기인 孝昭王 4년(695)에 종전의 東市 이외에 새로이 시가지의 서쪽과 남쪽에 공영시장을 개설한 것도 당시 왕경의 인구증가에 따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왕경의 도시행정을 담당하는 典邑署(경덕왕 때 典京府로 개칭됨)에는 木尺이라 불려진 70명에 달하는 토목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왕궁의 건축과 영선 이외에도 시가지의 측량과 조성을 담당했다.

 신라조정은 통일 직후부터 唐의 長安城을 모방하여 본격적으로 시가지 확장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6部·55里·360坊이라는 실로 정연한 도시 구획이 일단 완성되었다. 오늘날에도 경주시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평야지대에서는 마치 바둑판 모양의 동서남북이 매우 규칙적으로 평행되는 크고 작은 도로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복원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가지의 동서 길이는 3.9km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남북의 길이는 비록 확실한 수치를 알 수 없으나 대략 4.3km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동서 길이 9.7km, 남북 길이 8.2km에 달하는 장안성에 비하면 약 1/5 정도의 크기이지만 8세기 일본의 수도인 奈良 平城京과는 대략 비슷한 규모이다. 다만 수도의 심장부라고 할 宮城을 왕경의 북쪽 끝 중앙에 두려는 당초의 시도는 北川의 잦은 범람으로 궁궐문이 떠내려가는 등 그 유지 관리가 어려워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경의 중앙 남쪽에 위치한 본래의 月城을 계속 궁성으로 사용했다.059)金秉模,<신라 수도로서의 경주―도시계획>(≪歷史都市 慶州≫, 悅話堂, 1984), 123∼134쪽.

 신라 말기에 속하는 헌강왕 6년(880) 9월에 국왕은 측근의 신하 몇 명을 거느리고 月上樓라고 하는 이름난 누각에 올라가 왕경 시가지를 내려다 본 일이 있다. 이 때 왕이 시중 敏恭과 문답한 것을 기록한≪삼국사기≫에 의하면 즐비하게 늘어선 民家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또한 나무가 아닌 숯으로 취사했다고 한다. 하긴 왕경 내 모든 백성들이 윤택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말한다면 중류 이상의 왕경인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던 것 같다.

 하대에 들어와 왕경의 사치풍조는 매우 심각했다. 이같은 풍조는 왕실이 앞장을 서서 몰고 갔으며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삼국통일이 대개 달성될 무렵인 문무왕 14년(674) 2월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인공섬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현재의 雁鴨池가 바로 그것인데, 그 뒤 못가에 臨海殿을 새로이 짓고 역대 왕들은 이 곳에서 궁중 연회를 자주 열었다. 왕실은 이 밖에도 사철따라 거처하는 국왕 일가의 별장을 왕경 주변의 산언덕 전망이 좋은 곳에 마련했고, 따로이 시내에는 離宮이 몇 채 있었다. 하지만 하대 진골귀족의 사치생활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건물에 金箔을 한 소위 金入宅이라고 불린 호화주택이었다. 이 금입택은 왕경 안에만 39채나 되었다.060)李基東,<新羅金入宅考>(≪震檀學報≫45, 1978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83∼208쪽). 사실 조정은 막대한 양의 금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서 哀莊王 7년(806) 왕명을 내려 금은으로써 器用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鐵原 到彼岸寺나 長興 寶林寺의 毘盧遮那佛像에서 볼 수 있듯 9세기 후반경부터 종래의 金銅佛 대신 鐵佛이 유행하게 된 것도 구리의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興德王 9년(834) 조정은 귀족들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던 사치풍조를 규제하기 위해서 광범위한 부문에 걸친 생활 간소화 법령을 공포하기까지 했다. 하긴 이 법령은 지방의 일반 백성까지를 그 규제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나, 역시 주된 대상은 진골귀족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법령 중에서 진골귀족의 주택에 대한 규제 내용을 살펴보면, 지붕에는 막새기와(唐瓦)를 덮지 못하며, 서까래 끝이나 문틀 주위를 금과 은, 혹은 양질의 銅으로 장식하지 못하며, 주택의 基壇石으로는 잘 다듬은 석재를 쓰지 못하며, 담벽에는 石灰를 칠하지 못하게 하는 등 자못 철저했다. 하지만 이 간소화 법령도 금박의 사용 금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그것은 앞서 보았듯이 이로부터 50여 년쯤 지난 뒤인 憲康王 6년(880) 왕경 민가의 실태가 잘 보여주고 있다.

 흥덕왕 9년(834)의 교서에는 궁중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外來 사치품의 이름이 다수 열거되어 있다. 이를 보면 타슈켄트와 아랄海 지방에서 나오는 보석인 瑟瑟, 양모를 주성분으로 한 페르시아산 고급 모직물, 캄보디아산인 翡翠毛, 보르네오·자바산 玳瑁, 자바·수마트라산의 향내나는 紫檀 등 여러 가지가 있다.061)李龍範,<三國史記에 보이는 이슬람 商人의 貿易品>(≪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96∼101쪽. 이같은 외래품을 선호하고 있던 당시 왕경의 도시적 분위기는 다분히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말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심각해졌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