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2. 호족세력의 대두
  •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1)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

 落鄕貴族은 본래는 중앙귀족이었으나 낙향하여 지방에 거주하면서 토착세력이 된 귀족을 지칭한다. 낙향귀족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국가의 徙民에 의한 낙향귀족이다. 중앙귀족으로서 지방에 사민되었다면 그들은 당시 경주에서는 몰락한 귀족으로서 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민되어 지방에 거주한 만큼 그들을 낙향귀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王京에 거주하는 중앙귀족이 제반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왕경의 중앙귀족이 지방으로 사민된 것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고대국가의 성립기에 정복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면서 주요 지역에 小京이 설치되고 그 곳에 王京人을 집단적으로 사민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즉 智證王 15년(514)에 阿尸村에 소경을 설치하고 6部와 南地의 人戶를 이주시켰다. 眞興王 18년(557)에 國原小京(忠州)을 설치하고 다음해 2월에는 귀족의 자제와 六部의 豪民을 국원소경에 이주케 하였다. 善德女王 8년(639)에는 何瑟羅州(江陵)에 北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중앙귀족의 사민이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삼국통일 이후였다. 이는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文武王 14년(674)에 六徒의 眞骨로 5京과 9州에 出居케 함으로 해서 따로 官名을 일컫게 하였으니, 그 官等은 京位에 준하게 하였다(≪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外位).

 문무왕 14년(674)은 삼국통일 직후로 唐軍을 축출하기 위한 전투가 한창인 시기이다. 이 사료에는 경주 6부의 진골귀족만을 출거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때에도 물론 진흥왕대에 국원소경을 설치할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족의 자제와 6부의 호민이 두루 사민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6두품귀족과 그 이하의 두품 신분층도 사민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새로 편입된 영토의 주요 지역에 경주 6부의 진골귀족이나 6두품귀족 등을 사민시켜 지방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새로 영토로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포함한 전국토는 새로운 지방통치조직으로 편제되었다. 문무왕 18년·20년에 北原小京·金官小京이 각각 설치되고 神文王 5년(685)에 西原小京·南原小京이 설치되어 5小京이 성립되었다. 9州도 신문왕 5년에 설치되었다.081)9州 5小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藤田亮策,<新羅九州五京攷>(≪朝鮮學報≫5, 1953).
林炳泰,<新羅小京考>(≪歷史學報≫35·36, 1967).
李仁哲,<統一新羅期의 地方統治體系>(≪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이러한 9주 5소경제의 성립으로 중앙귀족의 지방 진출은 보다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5소경과 9주의 治所에는 경주에서 이주해 온 중앙귀족이 다수 존재하였다.

 소경은 말 그대로 작은 왕경이었다. 그러므로 소경은 왕경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축소시켜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소경은 準王京으로 대우받았다. 그래서 소경에 이주하여 살았던 중앙귀족은 위의 문무왕 14년의 外位에 관한 사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왕경의 6部人과 마찬가지로 京位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소경의 귀족이 왕경의 6부인과 동등한 자격을 가졌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국가의 사민 조치에 의하여 小京人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오히려 왕경의 6부인보다는 낮은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소경인은 왕경인에 비하여 출세의 제약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082)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Ⅰ(古代篇)(一潮閣, 1982), 335쪽. 그렇지만 소경의 귀족은 지방사회에서는 일반 지방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이었다. 9주의 치소에 이주하여 살았던 귀족들도 소경의 귀족들과 마찬가지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진골귀족의 分枝化와 자기도태 과정에서 몰락한 낙향귀족이다. 이 경우가 보다 전형적인 낙향귀족이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이에 따라 왕실 및 진골귀족 집단은 여러 家系로 분지화되고 있었다.083)李基東,<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85, 1980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178∼180쪽). 이들 가계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로서 기능하였다. 진골귀족의 증가는 또한 자체 내의 도태작용을 수반하였다. 그런데 진골귀족들은 독립된 가계를 중심으로 권력투쟁을 전개하여 패배한 가계를 몰락시키는 것 이외에는 진골귀족을 자체적으로 도태시킬 원리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진골귀족의 분지화 경향과 자기도태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촉진되어 갔다. 이에 따라 신라 하대에는 진골귀족의 각 가계를 중심으로 왕위를 둘러싼 정권쟁탈전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왕위쟁탈전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가계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계의 중앙귀족은 자신의 연고지(田莊)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거주하면서 지방세력이 되었다. 왕의 피살과 수많은 반란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되는 가운데 중앙귀족으로서 몰락하여 자신의 세력근거지로 낙향하는 자는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왕위쟁탈전이 특히 치열했던 僖康王·閔哀王·神武王대에 이르러 낙향귀족은 거의 전국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084)金杜珍,<統一新羅의 歷史와 思想>(≪傳統과 思想≫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62쪽.

 한편 권력에서 소외된 진골귀족 가계의 구성원 중에서 지방관으로 나가 있던 자는 그대로 지방에 머물러 거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방관으로 나가 있다가 낙향한 귀족의 가계는 이미 몰락하여 경주에서는 거주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하대에 중앙귀족이 낙향하여 거주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는데 이는 신라말의 禪師들의 碑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선사들은 그들의 가계를 鷄林冠族·鷄林宗枝·鷄林聖枝·鷄林人·京師人·東溟冠族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에는 다소 粉飾된 것도 없지 않지만 그들이 경주의 진골귀족 출신이거나 6두품 출신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無染의 선대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진골귀족에서 몰락하여 6두품으로 강등되어 藍浦에 낙향하였다. 利嚴의 선대는 경주에서 流落하여 熊川으로, 다시 富城·蘇泰(현 瑞山郡)로 낙향하였으며, 慧徹의 祖는 朔州 善谷縣으로 낙향하였다. 麗嚴과 開淸의 선대는 관직을 따라 지방에 나갔다가 그대로 머물러 거주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의 선대 가계는 대체로 중앙귀족 출신으로서 몰락하여 지방으로 낙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의 사민 조치에 의해서였건 진골귀족의 자기도태 현상에 의해서였건 신라 하대에 이르러 낙향귀족은 5소경과 9주의 치소를 중심으로 한 지방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이러한 낙향귀족은 그 곳 지방사회에 정착하여 거주하면서 토착적 기반을 마련하고 재지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신라말의 혼란기에 이르러 호족으로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5소경과 9주의 치소는 신라말·고려초에는 대체로 유력한 호족의 거점으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淸州(서원소경)·忠州(중원소경)와 溟州이다.

 낙향귀족이 호족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후대의 기록이지만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豪武를 써서 州縣을 制覇하고는 고려 통합초에 歸服하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진압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억지로 所在地의 戶長으로 삼아 억제하였다(≪掾曹龜鑑≫권 1, 吏職名目解, 戶長).

 이처럼 신라말에 각지에 거처하는 중앙귀족의 후예, 즉 낙향귀족이 豪武를 써서 주현을 제패하고 호족이 되었던 것은 쉽게 인정될 수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러한 사실은 소경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청주·충주의 호족이나 주의 치소 지역이었던 명주의 김주원계 호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주는 신라말·고려초에 여러 호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청주호족에 대해서는 다른 호족에 비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085)金光洙,<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韓國史硏究≫7, 1972).
金甲童,<高麗建國期의 淸州勢力과 王建>(≪韓國史硏究≫48, 1985).
朴敬子,<淸州豪族의 吏族化>(≪원우론총≫4, 淑明女大, 1986).
鄭淸柱,<弓裔와 豪族勢力>(≪全北史學≫10, 全北大, 1986 ;≪新羅末高麗初 豪族硏究≫, 一潮閣, 1996).
金周成,<高麗初 淸州地方의 豪族>(≪韓國史硏究≫61·62, 1988).
安永根,<羅末麗初 淸州勢力의 動向>(≪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2).
申虎澈,<後三國 建國勢力과 淸州 地方勢力>(≪湖西文化硏究≫11, 忠北大, 1993).
그 이유는 청주호족에 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청주지역에 유력한 호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의 동향이 신라말·고려초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여 준다. 청주호족의 존재 양상은<龍頭寺幢竿記>(광종 13년 ; 96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금석문에 의하면 당시 청주지역에는 金氏를 비롯하여 孫氏·慶氏·韓氏 등의 호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김씨 일족은 청주호족의 대표적 존재였다. 이들은 용두사의 檀越勢力으로서 당간 건립을 주도한 집단이다. 이 당간은 金芮宗이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나 죽게 되자 從兄 金希一 등이 완성하였다. 즉 김예종가와 종형 김희일가가 힘을 합하여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김예종과 김희일 이외에도 金守□·金釋希·金寬謙이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김예종과 김희일은 堂大等이고 김수□·김석희·김관겸은 大等이다. 당대등·대등은 成宗 2년(983)의 鄕吏職 개편에서 戶長·副戶長으로 개칭되는 직명으로 당시 지방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뜻한다. 실제로 이들 청주 김씨는 ‘檀越兼令’의 임무를 맡았고, ‘遂令鑄成’이라고 표현된 바와 같이「令」(명령)에 의하여 그 지방의 관직에 있던 자들을 동원하여 당간을 건립했던 것이다. 이러한 청주 김씨는 청주지역의 최고 지배자집단이었다.

 청주 김씨 일족은 궁예·왕건대에 上京從仕한 계열과 在地勢力化한 계열로 분화되었다. 태조 즉위 직후의 인사조치에서 白書省卿에 임명된 金言規나 태조대에 守司徒·三重大匡이었다는 金勤謙은 전자에 속하고, 용두사 당간을 건립한 김예종·김희일 등은 후자에 속한다. 한편 청주에서는 金兢律이 그의 두 딸을 혜종·정종에게 納妃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김긍률도 청주 김씨의 한 가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긍률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배경에는 청주 김씨의 탄탄한 族的 기반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청주 김씨는 청주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다. 이는 당간기의 撰者가 청주 김씨를 ‘州里豪家 鄕閭冠族’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청주호족은 가장 전형적인 호족이었다.

 그렇다면 청주 김씨 일족은 언제부터 청주지방에 거주하였을까. 이들 일족의 姓氏가 新羅宗姓인 김씨이고 청주가 서원소경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청주 김씨 일족은 서원소경의 설치와 함께 경주로부터 사민된 진골귀족의 후예로 생각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들은 청주에 이주해 와서도 여전히 지배층으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定住하여 재지화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청주 김씨는 청주지방에서 首位의 성씨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은 신라말에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을 때 청주지방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주 김씨는 소경에 거주하는 낙향귀족이 호족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청주에는 6두품 출신의 호족으로 여겨지는 孫氏 일족이 있었다. 손씨는 원래 경주의 6두품으로서 서원소경이 설치될 때 사민되어 온 성씨로 생각된다.

 충주도 낙향귀족이 호족세력으로 등장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충주호족의 존재 양상은<淨土寺法鏡大師碑>의 陰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음기에는 法鏡大師 玄暉의 제자로서 비의 건립에 참여한 道官·俗官의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086)蔡尙植,<淨土寺址 法鏡大師碑 陰記의 分析>(≪韓國史硏究≫36, 1982).

 이들 인물의 성씨를 살펴보면 충주지방의 대표적인 성씨는 劉氏·金氏·朴氏·崔氏·張氏로 나타난다. 이들 성씨가 충주지방을 지배하는 유력한 호족들이었다고 이해된다. 이 가운데 유씨 집단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즉 劉兢達은 왕건의 제3비인 神明順成王后의 아버지로서 그의 딸을 고려 건국 후 제일 먼저 왕비로 納妃할 정도로 크게 활약한 호족이었다. 그리고 劉權說은 태조대에 侍中의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들 성씨 중에서 박씨와 김씨는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씨·최씨·장씨는 6두품 출신의 호족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阿粲을 사용한 성씨에 최씨·장씨가 보이고 奈麻를 사용하는 성씨에 최씨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찬은 6두품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고, 최씨와 장씨는 경주의 6두품 성씨이기 때문이다. 유씨의 출신도 최씨·장씨와 비슷했을 것이다.087)金壽泰,<高麗初 忠州地方의 豪族―忠州劉氏를 중심으로―>(≪忠淸文化硏究≫1, 韓南大, 1989), 13쪽.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신라말·고려초에 충주지방에서 활약한 호족들은 경주에서 중원소경으로 사민되어 내려온 중앙귀족, 즉 낙향귀족 출신의 호족으로 생각된다.

 金海는 金官小京이 위치했던 곳이다. 이 곳의 호족인 金仁匡도 소경의 관리나 舊加耶王族인 新金氏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김인광은 낙향귀족 출신이거나 그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088)崔柄憲,<新羅末 金海地方의 豪族勢力과 禪宗>(≪韓國史論≫4, 서울大, 1978), 403∼405쪽. 또한 김해에서는 忠至 匝干이 金官高城을 攻取하여 城主將軍이 되었다. 잡간이 제3관등으로서 진골의 관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는 낙향한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으로 생각된다.

 명주는 주의 치소로서 낙향귀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지역이다. 이 곳에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김주원계 후손들이 호족으로 등장하여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였다. 김주원은 중앙에서의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하여 자신의 연고지인 명주로 퇴거하여 지방세력이 되었다. 그는 명주는 물론 襄陽·三陟·平海·蔚珍 등 嶺東 일대에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하였는데 이러한 세력권은 물론 그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

 명주에서는 金順式(王順式)이 신라말에 溟州將軍 혹은 知溟州軍州事로서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등장하여 명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089)金杜珍,<新羅下代 崛山門의 形成과 그 思想>(≪省谷論叢≫17, 1986).
金甲童,<溟州勢力>(≪羅末麗初의 豪族과 社會變動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0).
그는 崛山門 朗圓大師 開淸의 단월이었다. 그는 궁예세력이었는데 왕건 즉위 후에도 오랫동안 불복하다가 태조 11년(928)에 이르러 귀부하였다. 김순식은 대체로 김주원의 후손으로 이해되고 있으며,090)鄭淸柱, 앞의 책, 81쪽. 그러나 金順式이 金周元의 직계가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金貞淑,<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白山學報≫28, 1984, 189∼191쪽). 그가 호족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김주원계의 세력기반에 힘입은 바가 컸을 것이다. 이러한 김순식은 낙향한 진골귀족 출신의 대표적인 호족이다. 명주에는 또한 王乂라는 호족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김주원의 직계후손으로 王姓을 하사받았는데, 그의 딸은 왕건에게 납비되어 大溟州院夫人이 되었다. 이와 같이 김주원계 후손으로 구성된 명주호족은 낙향한 진골귀족 출신의 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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