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2. 호족세력의 대두
  • 4) 촌주 출신의 호족

4) 촌주 출신의 호족

 村主는 촌락에서 村政을 담당하는 在地勢力의 대표자였다. 촌주는 우선 村落文書 작성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 촌락문서에 의거하여 촌주는 촌락 단위의 租·調 수취, 力役 동원에 관여하였다. 여기서 역역의 동원은 국가의 공공사업뿐만 아니라 촌락문서에 나오는 麻田·官謨畓의 공동경작에도 해당되었다. 그 이외에도 촌주는 비상시에 촌락을 방위하기 위하여 村民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다.114)李鍾旭,<新羅帳籍을 통하여 본 統一新羅時代의 村落支配體制>(≪歷史學報≫86, 1980), 36∼41쪽.
金周成,<新羅下代의 地方官司와 村主>(≪韓國史硏究≫41, 1983), 70∼71쪽.
이와 같이 촌주는 촌락문서 작성, 租·調 수취, 역역 동원, 촌락 방위 등 촌정 전체를 담당하였다. 결국 촌주는 촌락에서 對民關係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촌주는 촌락의 촌정을 담당하면서 이와 동시에 郡·縣司에 참여하여 吏職者와 더불어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15)李鍾旭, 위의 글, 48쪽.
金周成, 위의 글, 70쪽.
1개의 군·현사에 참여하는 촌주는 3, 4 명이었는데, 上(제1)·제2·제3촌주로 구별되었다. 이렇게 촌주를 구별한 기준은 촌주의 세력기반이 되는 촌락의 규모(경제력·군사력)나 촌주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이들 촌주는 眞村主로서 5두품의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116)李鍾旭, 위의 글, 31∼33쪽.

 이러한 촌주의 임무와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촌주는 국가로부터 村主位畓을 지급받았다. 신라 촌락문서에 기록된 것을 보면 沙害漸村 출신의 촌주는 19結 70負의 촌주위답을 지급받았다. 이는 사해점촌의 烟受有畓 총 면적 94결 2부 4束의 약 1/5이다. 사해점촌의 10개 일반 촌민의 孔烟이 소유하고 있는 평균 연수유전·답 면적은 13결 64부 3속이었다. 그러니까 촌주위답은 일반 촌민의 평균 연수유전·답의 약 1.4배에 해당한다. 또한 촌주는 일반 촌민들보다 훨씬 많은 노비와 우마를 소유하여 경작에 이용하였다. 이처럼 촌주는 일반 촌민들보다는 우월한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으로 인하여 촌주는 해당 촌락에서 상당한 경제적 실력자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촌주가 租·調 수취와 역역 동원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아울러 고려할 때 사실로 믿어진다. 또한 촌주는 군·현의 행정기구인 군·현사에도 참여하였으므로 지방사회에서 세력기반을 확대하여 정치적·군사적 실력자로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촌주는 신라 하대에 그 지위가 높아졌다. 흥덕왕 9년(834)에 반포된 규정에 의하면 진촌주·次村主는 각각 5두품·4두품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규정은 흥덕왕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련의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거치면서 골품체제가 동요하게 되자 그대로 준수되지 않은 것 같다. 문성왕 18년(856)의<竅興寺鍾銘>을 보면 현령 아래에 상촌주·제2촌주·제3촌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각각 三重沙干·沙干·及干의 관등을 지니고 있다. 3중사간·사간·급간은 6두품 이상만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촌주는 골품체제의 동요와 함께 지방사회에서 그 지위나 실력을 높여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진성여왕대 이후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촌주는 그가 가진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실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지방세력, 즉 호족으로 등장하였다.

 촌주 출신의 호족은 촌주의 세력기반이 촌정의 담당이나 군현 행정에의 참여에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군현 정도의 지역이나 그보다 작은 지역을 지배하는 존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군·현을 城으로 부르기도 한 것을 염두에 둘 때, 郡·縣城을 근거지로 하면서 城主라고 불려지는 호족들 중에는 촌주 출신이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말에 지방의 호족들 중에서 촌주 출신으로 유추되는 몇 가지 예가 나온다. 왕건의 선대인 康忠·龍建은 松嶽郡의 上沙粲·沙粲을 칭하고 있다. 이 상사찬·사찬은 상촌주나 제2촌주의 관등이었으나 고려초에 촌주의 직명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으므로117)신라말·고려초에 上沙粲·沙粲은 上村主·第二村主의 직명으로 사용되었다(金光洙,<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韓國史硏究≫23, 1979, 126∼130쪽). 왕건의 선대는 송악군의 촌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왕건의 선대를 촌주로 단정하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왜냐하면 상사찬·사찬이 촌주의 직명으로 사용된 사례가 금석문에 나타나는 시기는 940년대이므로118)금석문에서 사찬이 촌주의 직명으로 사용된 사례는<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태조 24년 ; 941)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강충이나 용건의 시기에도 상사찬·사찬이 촌주의 직명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건의 선대는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당시 지방세력이 잠칭하던 職名 중의 하나인 상사찬·사찬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119)당시 지방세력이 상사찬·사찬뿐만 아니라 一吉干·阿干 등의 관등이나 大監·侍郞·郞中 등의 관직을 자기의 직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金光洙, 앞의 글, 1979, 123∼124쪽·130쪽). 아무튼 촌주가 호족이 되었다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사례는 지금까지 별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鄭淸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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