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1) 후백제의 성립
  •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1) 견훤의 출신과 군사적 기반

 신라말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옛 백제 지역을 지배했던 인물은 甄萱이다. 그러나 견훤의 출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가난한 농민출신’이나 ‘농민의 아들’ 혹은 농민출신으로 농민반란군을 규합하여 성장한 인물’ 등으로 인식되어 왔다.167)다음과 같은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는 견훤을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서술하고 있다.
韓㳓劤,≪韓國通史≫(乙酉文化社, 1970), 124쪽.
邊太燮,≪韓國史通論≫(三英社, 1986), 148쪽.
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36쪽.
한편 李基白,≪韓國史新論≫(一潮閣, 1976)에서도 ‘가난한 농민출신’이라 하였으나 최근에 나온 新修版(1991)에서는 ‘호족출신’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견훤의 출신에 대해서는 申虎澈,≪後百濟 甄萱政權硏究≫(一潮閣, 1993)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아울러 이 글은 주로 이 책을 참고하여 서술하였으므로 구체적인 전거의 제시나 논증과정은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견훤이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후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견훤의 신분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견훤 아버지의 출신과 사회적 지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두 견훤전에 의하면 견훤의 아버지 阿慈介는 尙州 加恩縣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농업으로 생활을 영위하다 후에 沙弗城을 중심으로「將軍」이 되었다고 한다. 가은현은 지금의 聞慶郡 加恩邑이고 사불성은 지금의 尙州邑 일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아자개는 처음에 가은현에서 농사를 짓다가 점차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신라 9州의 하나였던 상주를 중심으로 장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자개가 농사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가난한 농민층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농민출신이 갑자기「장군」혹은「城主」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토착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농민층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주변의 촌민들을 규합하여 장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말 지방의 토착세력이 성을 쌓거나 혹은 기존의 성을 중심으로 스스로 성주나 장군으로 칭하면서 반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해 가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주의 장군으로 성장한 아자개의 사회적 지위는 다음의 두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① 갑오년에 尙州賊帥 阿字蓋가 사신을 보내 來附하였다. 왕이 의식을 갖추어 맞이하도록 명하니 毬廷에서 의식을 연습하고자 문무관이 다 班列에 나아갔는데…(≪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9월).

② 阿慈介의 第1妻는 上院夫人이고 제2처는 南院夫人이다. 5子 1女를 낳았는데 그 長子는 尙父 萱이요, 2子는 將軍 能哀, 3子는 將軍 龍盖, 4子는 寶盖, 5子는 將軍 小盖이고 1女는 大主刀金이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①에 의하면 상주적수 아자개가 왕건 즉위 직후인 918년 7월에 고려에 내부하였고, 이 때 고려에서는 문무의 관리들을 모아 빈객으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즉 아자개가 귀부하려 하자 고려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표시한 것이다. 이것은 아자개가 독자세력을 거느린 호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에서 아자개가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등 2명의 처를 두고 있었고, 그 아들을 모두 장군이라고 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68)沙伐城 將軍 阿慈介와 尙州賊帥 阿字蓋가 동일인물이 아니라 同名異人이라거나(安鼎福,≪東史綱目≫附卷上上), 또는 阿字蓋와 견훤과는 父子之間도 아니며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金庠基,<甄萱의 家鄕에 대하여>,≪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199쪽). 그러나 阿慈介와 阿字蓋는 동일인물이 분명하다.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同名異人의 세력가가 2명 있었다는 것은 우연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아울러 기록에 따라 ① 阿慈介(≪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및 ≪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 ② 阿玆蓋(≪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명왕 2년), ③ 阿字蓋(≪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④ 阿字介(≪東史綱目≫ 附卷上上)로 각각 차이가 있으나 이들 모두 견훤의 아버지에 대한 異記에 불과하다.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阿慈介로 통칭하였다. 한편 아자개는 李氏姓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169)≪三國遺事≫권 2, 紀異 2, 後百濟 甄萱傳에 의하면 아자개는 본래 ‘李’씨였으나 후에 견훤이 ‘甄’으로 성을 고쳤다고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점만 보더라도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가난한 농민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견훤은 선대부터 이미 부농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父 아자개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한편으로는 이씨로 稱姓하면서 주변 촌민들의 지지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일족 및 주변 인물 등을 중심으로 사병적 성격의 군사세력을 규합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880년대 후반에 와서 사불성을 근거지로 하여 장군을 자칭할 만큼 일대 호족세력으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견훤 자신은 이미 가난한 농민출신이 아니라 상주지방의 豪族出身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견훤은 그 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을까. 상주호족이 된 아자개의 장남인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기까지는 두 가지의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 하나는 견훤이 신라의 중앙군(京軍)이 되어 경주에 진출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중앙군의 자격으로 서남해의 防戍軍으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방수군의 裨將으로 출세하였다는 사실이다.

 견훤이 신라의 중앙군으로 경주에 들어가게 된 것은 대체로 880년대의 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견훤은 景文王 7년(867)에 태어났으므로170)견훤의 出生에 대해서는≪三國遺事≫ 견훤전에 ‘咸通八年 丁亥生’이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아자개가 장군을 자칭하던 때인 885년부터 888년까지는 견훤의 나이 20세 전후에 해당한다. 바로 이 시기에 견훤은 중앙군으로서 入京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중앙군이 된 견훤은 곧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나아가 비장이라는 독립된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 곳에서 견훤은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견훤은 항상 전장에 나가 ‘枕戈待敵’ 하는 등, 그 용기가 士卒보다 앞서 있었으며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라에 대한 견훤의 태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불과 한달 만에 무려 ‘5천의 무리’를 모았다고 한다. 이 ‘5천의 무리’는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이 된 핵심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5천에 달하는 군사는 어떤 성격을 가진 병력이었을까. 그리고 견훤은 어떻게 하여 그처럼 단기간에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첫째, 견훤이 모았다고 한 ‘5천의 무리’ 속에는 견훤이 서남해 방수군의 비장으로 있을 때 그와 함께 ‘침과대적’하던 견훤 휘하의 병사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는 신라 중앙군으로서 서남해에 파견된 후 주변의 군인들에게 남다른 용기를 보였고 인심을 얻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방수군이야말로 견훤을 따라 武珍州(光州)에 들어갔던 주된 병력이었을 것이다. 둘째, 서남해 일원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海島출신의 인물들도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견훤이 방수군으로 파견된 후 열심히 노력하여 비장이 된 곳은 바로 해상활동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 일대의 해상세력들은 자연 견훤의 세력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후백제의 성립 초기부터 서해안 일대의 요충지역이 견훤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던 점과 중국과의 외교에서 궁예나 왕건에 비해 견훤이 월등 앞서 있었던 점으로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 견훤의 초기 군사적 배경 중에는 상주 출신의 견훤 先代의 사병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숫자는 비록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견훤 휘하의 방수군들과 마찬가지로 견훤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핵심세력이었을 것이다. 끝으로 무진주 일대의 토착세력들도 견훤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견훤이 처음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에 들어가자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호응했다고 한 사람들은 바로 이 일대의 주민 등 토착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이미 농민 반란군에 끼어「초적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견훤군에 포함되기도 했을 것이고, 이 일대의 호족세력들도 점차 견훤의 군사적 기반으로 병합되어 갔을 것이다. 무진주 일대의 호족세력들은 이 곳이 점령된 후에 견훤군에 포함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므로 견훤의 군사적 기반 중에는 맨 나중에 결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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