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1) 대신라정책

(1) 대신라정책

 견훤은 처음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신라왕조의 권위라든가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견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대신라정책은 궁예의 그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궁예는 노골적으로 신라에 적대감을 표명하였다. 신라를 ‘滅都’라 부르게 하고 신라인으로서 귀부해 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했으며, 궁예 자신이 浮石寺에 있는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어 반신라정책을 대내외적으로 표명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견훤과 왕건은 신라에 대해「尊王의 義」를 내세우고 있었다.186)견훤과 왕건 사이에 오고간 외교문서(이 문서는 후삼국간의 대외관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에 의하면, 견훤과 왕건 모두가 다투어 신라에 대해 ‘尊王의 義’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의례적인 修辭만은 아니었다. 견훤은 광주를 점령한 후에도 王이라 칭하지 못하고 다만 ‘新羅西面都統’으로 자칭하고 있었다. 즉 견훤은 자신을 한낱 신라의 지방관임을 내세웠으며 전주로 천도한 900년 이후에도 대외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견훤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고려와 신라를 위협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문서에는 신라 지방관의 지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견훤이 경주를 침공한 목적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려와 결합하여 후백제에 대항하려던 경애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애왕은 朴氏 왕으로서 김씨 왕족들의 도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견훤은 박씨 왕을 제거하고 김씨 왕을 세운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경주침공의 사실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박씨인 경애왕을 제거하고 대신 김씨인 경순왕을 옹립하였다.187)당시 견훤의 군사력이나 고려와의 관계로 보아 신라왕조를 멸망시켜 병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견훤이 경순왕을 옹립하고 후백제로 돌아간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은 견훤의 대신라정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으면서도 신라 왕실의 별다른 반발없이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견훤의 대신라정책이 궁예의 그것처럼 적대적이었다고 해석한 종래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오히려 견훤은 왕건과 마찬가지로 신라에 대해「존왕의 의」를 내세우며 친신라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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