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2) 대고려정책

(2) 대고려정책

 견훤의 대고려정책은 시기에 따라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왕건이 즉위하기 전까지이고, 둘째는 918년 고려 건국 직후부터 920년대 중반까지이며, 셋째는 920년대 후반 이후 936년 멸망할 때까지이다.

 첫째 시기인 고려 건국 이전에는 주로 서남해안 일대에서 견훤과 왕건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나주의 해상세력이 일찍부터 왕건과 결합하여 후백제에 이반했기 때문에 서남해안 일대가 후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고려 건국 직후 국내의 정치문제로 혼란해진 틈을 타서 후백제가 한 때 이 일대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930년 이후에는 후백제의 내분과 후백제군의 전력 약화로 인해 다시 나주 지방의 해상세력들은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시기인 고려 건국 직후부터 920년대 중반까지 후백제의 대고려정책은 대체로 친선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건국 초기까지만 해도 견훤의 왕건에 대한 태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견훤은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一吉湌 閔閤을 고려에 보내 즉위를 축하해 주었고, 이어 920년 9월에는 아찬 功達을 보내 孔雀扇과 지리산 竹箭을 선물로 보내는 등 고려와의 친선외교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견훤이 당시 군사적으로 크게 우세하였으면서도 오히려 고려와 友好관계를 맺고자 노력한 것은 신라와의 관계를 의식한 의도된 행동이었다. 즉 견훤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준 바로 다음달에 신라를 침공했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측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고려에 대한 화친정책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924년 8월에는 왕건에게 聰馬를 선물하고, 다음해 10월에는 후백제와 고려간에 왕족을 인질로 교환하기까지 했다. 고려에서는 왕건의 동생인 王信이,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外甥 眞虎가 각각 인질로 보내졌다.

 그러나 세번째 시기인 926년 이후에는 그 동안 비록 표면적이나마 유지되던 고려와의 우호관계는 깨지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두 나라간에 교환된 인질의 죽음이었다. 926년 고려에 보냈던 진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그 동안의 친선외교는 완전히 끝이 났다. 견훤은 고려측의 인질인 왕신을 죽이고 고려와 본격적으로 대결하게 되었다.188)吳越王이 견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卿(견훤)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동안 화호를 통하고 서로 隣盟을 맺었다는 것을 들었는데 근래 볼모들이 다 죽으니 드디어 화친의 舊好를 잃고 서로 地境을 침략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으므로…”라고 하였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가 우호관계를 깨고 대결하게 된 중요 이유가 볼모들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이 고려와 전면전을 벌인 초기에는 후백제측이 크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곧 내분으로 혼란해진데다 고창전투에서의 패배로 급격히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지방의 호족세력이 점차 견훤으로부터 이반하여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자 더욱 불리해졌음은 이미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930년 이후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오히려 고려가 후백제를 압박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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