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3) 후백제의 대외정책
  • (3) 대중국·일본정책
  • 나. 대일본외교

나. 대일본외교

 후백제는 일본과도 외교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였다.196)후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中村榮孝,<後百濟王および高麗太祖の日本通使>(≪日鮮關係史の硏究≫上, 吉川弘文館, 1965) 참조. 그런데 일본과의 외교기록은 국내의 사서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일본측 기록에만 보인다.

 견훤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22년 6월이 처음이었다. 견훤은 사신 輝巖(函)으로 하여금 書狀과 信物을 갖고 대마도에 도착케 하여 일본정부와 통상할 것을 원하였다. 이에 대마도의 島司는 이 사실을 京都에 보고했으나, 경도에서는 견훤이 신라의 신하(陪臣)라 하여 사사로운 외교를 거절하고 다만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다 한다.197)≪扶桑略記≫권 24, 裡書, 延喜 22년 6월 5일
≪本朝文粹≫권 12, 牒 答新羅返牒.
그런데 이 때 견훤이 파견한 사신을 ‘新羅人到來’라고 표현한 것이라든지, 견훤을 ‘新羅 陪臣’이라 한 것이라든지, 견훤에 보내는 서첩을 ‘答新羅返牒’이라 한 것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는 견훤을 신라의 지방관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견훤을 ‘都統甄萱’이라 칭한 것으로 보면 견훤 스스로가 신라의 지방관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은 이미 892년에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이라 하였고 이후 오월과 후당과의 외교에서도 이러한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7년 후인 929년 정월에는 耽羅와 해초를 교역하던 후백제의 상선이 대마도의 下縣郡에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對馬島守 坂上經國은 通社長 岑望通과 檢非違使 秦滋景 등 사절을 파견하여 이들 후백제의 표류민들을 全州에 데려다 주고198)≪扶桑略記≫권 24, 醍瑚天皇 下, 延長 7년 5월 17일. 대마도 사신이 후백제인을 데리고 金州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金州는 全州의 誤記라고 생각된다. 견훤을 만나 島守의 書狀을 전하였다. 비록 京都정부에서는 견훤과의 통상을 거절했지만 대마도에서는 견훤과의 통상을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도수의 사절단은 그 해 3월 25일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귀환하여 견훤을 “全州王 甄萱이 數十州를 격파하여 大王이라고 칭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들 대마도수가 파견한 사절이 견훤을 만난 때는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고 이어 왕건을 公山桐藪에서 대파하여 한창 그 세력이 강성하던 때였다.

 그런데 견훤은 대마도 사신이 돌아간 뒤 바로 같은 해 5월 17일 張彦澄으로 하여금 20인의 사절단을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표류민 송환에 대한 답례와 아울러 경도정부와의 통상을 바라는 書狀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앞서 922년 輝巖을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 후백제와의 통상을 사절하고 이들 견훤의 사신들에게는 식량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199)≪扶桑略記≫권 24, 醍瑚天皇 下, 延長 7년 5월 21일.

 이처럼 견훤은 일본과의 외교에도 노력을 기울여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일본정부와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측의 소극적인 자세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일본과의 외교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견훤의 대외인식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견훤이 일본과 통교를 맺고자 한 것은 정치적·외교적 목적보다는 이들과의 해상무역이 더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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