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2. 후백제
  • 4) 후백제의 몰락
  •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2) 신검정권과 그 멸망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추대했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신검이 추구했던 정치개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 후 境內에 내렸다고 하는 그의 교서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교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대체로 신검 자신이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변명 내지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신검이 왕위에 오른 후 새로운 정치질서를 위해「유신정치(維新之政)」를 실시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다. 즉 정치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유신정치의 내용에는 경내의 죄수들을「大赦」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왜 이 때 교서를 발표하여 유신정치를 표방하고 죄수들을 사면하였을까. 신검의 죄수에 대한 사면이 왕의 즉위년에 일반적으로 시행되던 의례적인 조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교서의 공포와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조치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신검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견훤을 따르던 세력과 금강을 추대했던 정치세력들의 반발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귀부한 사건을 들 수 있다. 견훤의 고려 귀부는 신검정권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을 것이다. 견훤의 고려 귀부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도 물론 큰 것이겠지만, 이를 계기로 금강을 추대했던 반신검계세력들이 신검정권에 반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일찍부터 견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지방 호족세력들의 반발도 신검정권을 불안하게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昇州의 호족세력으로서 일찍부터 견훤의 사위가 되었던 朴英規의 고려 귀부를 들 수 있다. 박영규가 고려에 귀부한 것은 신검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부인에게 한 말 중,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만약 우리 임금을 버리고 賊子를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義士를 대하겠는가”라고 한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나주지역의 호족들도 신검정권에 반발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주는 신검정변 이전 6, 7년 동안은 후백제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정변 직후에 고려의 유금필에 의해 장악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신라 왕실의 태도 또한 신검정권을 불안하게 하였다. 견훤이 고려에 귀부하자 경순왕 또한 왕건에게 귀부하기 위해 侍郞 金封休를 보내 상황을 타진하고 있었다.203)≪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9년 10월. 이처럼 견훤의 고려 귀부와 신라 왕실 또한 고려에 기울게 되자, 이로 인한 금강 추대세력 및 지방 호족세력들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어 신검은 이들 반대세력들을 회유하기 위해 ‘유신정치’를 표방하고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신검정권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신검은 교서를 발표한 지 2개월 후인 936년 정월에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方物을 바쳤다고 한다.204)≪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淸泰 3년 정월.
≪舊五代史≫권 7, 天福 원년 정월.
신검이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후백제의 정권교체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지위를 공인받음으로써 국내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외교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신검정권은 내적으로는 유신정치를 표방하여 정치개혁을 단행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외교를 추진하였지만 사태는 극히 불리하였다. 경순왕은 이미 935년 11월 고려에 귀부하였고, 다음해 정월에는 승주의 호족이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도 왕건에 귀부하고 말았다. 이 때 이미 대세가 왕건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936년 9월 고려의 왕건은 귀부해온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정복전을 시작하였다. 고려측의 병력은 8만 7천 5백 명으로 통상병력에 비해 엄청난 규모로서 全軍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신검정권에서도 전력을 다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미 견훤과 박영규가 고려군에 가세한 상황에서 신검군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후백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申虎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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