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Ⅲ. 후삼국의 정립
  • 3. 태봉
  • 4) 태봉의 몰락
  •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1)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의 추구와 그 지지세력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광평성체제 내에 원봉성과 같은 문한기구가 있었다. 곧 이어 언급하게 될 朴儒와 崔凝을 비롯한 유학자 혹은 문인이라고 할 인물들이 궁예정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궁예가 유학자들을 포섭하였으리라는 점을 알려 준다.281)이들에 대해서는 全基雄,<羅末麗初 地方出身 文士層과 그 役割>(≪釜山史學≫18, 釜山史學會, 1990) 참조. 아마도 궁예는 유교를 왕권강화의 한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다 아는 바와 같이 궁예는 미륵불임을 자칭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을 각각 靑光菩薩과 神光菩薩로 삼았다.282)≪三國史記≫권 50, 列傳 10, 弓裔. 이하 이 절과 관련된 사료들은 주로 이 열전을 비롯하여≪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즉위전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위의 자료들은 전거 제시없이 이용하려고 한다. 궁예는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神格化하였다. 이는 미륵신앙이 궁예의 왕권전제화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음을 단적으로 말하여 준다.

 미륵불은 轉輪聖王이 세상을 다스릴 때 하생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궁예가 국왕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그는 전륜성왕이자 동시에 미륵불이었던 셈이며283)金杜珍, 앞의 책(1983), 130∼131 쪽 참조., 그는 이제 세속에 있어서의 통치자로서의 권위와 종교에 있어서의 신으로서의 권위를 오로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궁예가 미륵신앙에 기초를 둔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284)李基白은 이를 “불교신앙에 기초한 觀念的 專制主義 경향”이라고 한 바 있다(李基白, 앞의 글, 1975, 19쪽, 주 10).

 궁예는 항상 말하기를 자신이 彌勒觀心法을 터득하여 부인의 음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를 적발하여 잔혹하게 처벌하였다고 전한다. 불교의 계법에서 음사를 금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궁예의 미륵신앙이 진표의 미륵신앙에 기초하였다는 점이나 진표가 계율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점 따위를 고려하면 궁예는 백성들에게 계율의 준수를 요구하였다고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계율이 속세의 율령과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궁예가 계율을 강조한 사실의 또다른 측면은 엄격한 율령통치의 추구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요컨대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가 세속적으로는 율령에 의한 法家的 지배를, 종교적으로는 계율의 엄수를 표방하였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그런데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의 혐의를 씌워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 때 궁예가 왕건의 모반을 밝혀낼 수 있다고 내세웠던 것은 미륵관심법이었다. 이를 통해 궁예의 미륵관심법이 부인의 음사만이 아니라 모반의 적발과 처벌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내세웠던 중요한 목적이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세력의 출현을 억제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미륵관심법을 통한 지배층에 대한 궁예의 통제와 감시의 강화는 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하여 내봉성에 사정 기능을 더하고, 신변 경호는 물론 군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하여 내군을 새로 설치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였던 광평성체제의 변화와 서로 짝하는 면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궁예가 추구하였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는 반궁예세력의 억압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있었을 진골귀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의 회복을 일찍부터 꿈꾸어 왔던 궁예였고 보면 그는 권력을 남과 나눈다거나 하는 일에 아무래도 인색하였을 것이다.285)洪承基, 앞의 글, 72∼73쪽. 이와 아울러 후백제나 신라와의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법도 하다. 이상이 궁예가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였던 배경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러나 그런 설명만으로는 그가 추구하였던 전제주의가 하필 정교일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던 까닭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궁예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를 바탕으로 그가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 반면 궁예의 전제주의가 정교일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권강화가 여의치 못한 면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위에서의 논의대로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통해 반궁예세력을 억압하려고 하였다면 그 중 후자가 보다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호족연합정권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궁예의 노력이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그는 자신을 신격화함으로써 그에 대응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286)이와 관련하여서는 李基白, 앞의 글(1975), 19쪽 참조.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던 세력으로서는 우선 궁예의 미륵신앙을 지지하였던 승려들을 꼽을 수 있겠다. 가령 궁예가 행차할 때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는 승려들이 그들이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미 살펴본 바 있는 허월을 떠올릴 수 있다. 명주의 중소호족 출신으로 굴산문 개청계에 속한 승려였던 그는 궁예가 명주에서 자립할 때 협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태봉이 무너질 무렵에는 궁정 안의 사원이었던 내원에 머무르고 있을 정도로 궁예의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그가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사상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뒷받침하였으리라는 점에는 별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울러 궁예의 총애를 받았다는 宗侃287)종간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임술조 및≪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6월조 참조.도 주목된다. 그는 어려서 승려가 되었던 인물로서 이 점 궁예와 유사하여 흥미롭다. 종간이 이미 세달사 시절부터 궁예의 추종자였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되기도 한다. 그러하지는 않았더라도 종간과 궁예의 관계는 두 사람 모두 승려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밀접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종간이 승려였었고, 궁예의 심복이었다면 그 역시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뒷받침하였을 것으로 여겨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단 종간이 허월과 달리 蘇判이라는 고위 관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유의된다. 두 사람을 비교할 때 허월이 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 궁예의 정교일치적 전제주의를 지지하였다면 종간은 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전문적인 군인 출신들을 들 수 있다. 먼저 내군장군 은부를 그 예로 생각할 수 있다.288)은부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임술 및≪高麗史節要≫권 1, 태조 원년 6월조 참조. 그는 종간과 더불어 궁예의 심복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그런데 은부는 어려서 죄인이 되었다고 한다. 범죄에 연루되었던 이상 그 이후의 그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그리 높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은부가 장군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은부는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伊昕巖도 은부와 함께 취급할 수 있다.289)이흔암에 대해서는≪高麗史≫권 127, 列傳 40, 伊昕岩傳 참조. 그는 왕건이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반할 마음을 품고 임지를 무단히 벗어나 철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따라서 그도 궁예에게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었다. 이흔암은 왕건에 못지 않은 군지휘관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지만 弓馬를 業으로하였고 다른 재주나 식견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은부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군인 출신이었음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 이흔암도 궁예에 대한 충성심과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출세하였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태조 왕건은 이흔암을 처벌하였지만 그의 黨與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흔암이 궁예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왕건에 버금가는 고위 지휘관이었다면 그를 추종하였던 인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는 달리 전하는 바가 없지만, 대체로 이흔암과 비슷한 인물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즉 다수의 전문적인 군인들이나 그 출신 장교들이 이흔암을 매개로 하여 궁예에게 충성을 바쳤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흔암이 모반을 꾀하였던 것도 이들을 배경으로 하였을 것이다.

 끝으로 淸州勢力의 동향도 주목된다. 궁예가 904년 청주의 人戶를 철원으로 사민하였던 것을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그들은 궁예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290)이 점은 이미 李基白, 앞의 책(1968), 44쪽에서 지적된 바이며, 그 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궁예가 전제주의를 추구하면서 청주인들을 그 기반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한 전론이 발표된 바 있다(洪承基,<弓裔王의 專制的 王權의 追求>,≪許善道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가령 왕건 즉위 직후부터 청주세력의 모반이나 반왕건적인 움직임이 빈발하였거니와291)≪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傳 附 堅金·권 127, 列傳 40, 桓宣吉 및 권 1, 世家 1, 태조 원년 10월 신유조 등을 참조., 이는 크게 보아 청주세력이 여전히 궁예의 지지세력이었음을 일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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