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1. 유교사상의 변화
  • 3) 유교사상의 변화

3) 유교사상의 변화

 통일신라는 무열왕계 왕권의 확립으로 유교사상의 구체적 정착이 마련되었고, 유교가 전제왕권의 정치이념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함으로써 한국유학사에 새로운 계기가 이룩되었다. 신라말에 이르러 도당유학이 진척됨에 따라 숙위학생들이 다수 배출됨으로써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력위주의 풍조가 유행하여 신라사회 발전에 큰 계기를 이루었다.

 나말의 유교사상의 변화는 유교정치이념을 추구하면서 아울러 불교·풍수사상·도교 등과의 융합에 따른 사상계의 움직임이다. 나말 유교사상의 변화를 반영한 인물은 孤雲 崔致遠이다. 그는≪桂苑筆耕集≫등의 문집과<四山碑銘>등 禪師들의 碑銘을 남겼다. 그는 景文王 8년(868)에 입당 수학한 후 경문왕 14년에 裵瓚(예부시랑)의 고시하에 賓貢及第하였다. 이어 宣州溧水縣尉와 承務郞侍御史內供奉을 거쳐 黃巢亂 때 高騈의 從事官으로<檄黃巢書>를 쓴 바 있었다. 그는 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한 후 富城郡(현재 서산군)太守로서 賀正使로 발탁된 바 있으나 신분적 한계로 인한 정치적 불만에서 진성왕 8년(894)에 時務策 10여 조를 바친 후 별다른 정치활동이 없었다. 때를 잘못 만나 자신의 뜻과 실력을 펴지 못하여 산림과 강변을 소요하며 自傷不遇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결국 海印寺에 은거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승려와 道士들과 벗하며 일생을 마쳤다.

 최치원이 당으로 유학을 떠난 목적은 단순히 과거합격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2세의 소년을 떠나 보낼 때 “10년 안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한 부친의 절규 속에서 골품제에 대한 한맺힌 불만이 엿보이고 있다.323)≪三國史記≫권 46, 列傳 6, 崔致遠. 이러한 사실은 薛罽頭의 다음과 같은 말에도 잘 드러나 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먼저 骨品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한계를 넘지 못한다. 나는 멀리 中華國에 가서 불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고 관복에 劍佩를 갖추고 천자 곁에 출입하였으면 원이 없겠다(≪三國史記≫권 47, 列傳 7, 薛罽頭).

 최치원도 이러한 신분적 극복을 위한 도전이었다 하겠다. 적어도 그를 학문의 길로 가게 한 부친의 뜻은 설계두의 경우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 수련과정에서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목도하였으며 신라의 정치적 모순을 깨닫게 되면서 당시 유행하던 詞章學의 입장에 머물 수는 없었다.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학문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평생에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 출세의 길에 경쟁하지 않고 다만 유교의 도를 따랐다.… 孔夫子의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학문에 전념한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오직 道가 장차 없어지는 것을 근심할 뿐 어찌 사람들이 나를 쉽게 알아주지 않았음을 말하겠는가(崔致遠,≪桂苑筆耕集≫권 17, 再融啓).

 최치원은 유학의 본질 이해 위에서 출세만을 위한 학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道의 존폐’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道學的 성격은 당시 신라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위로 빈번한 왕위계승전과 진골귀족의 횡포, 지방에 할거한 호족들의 무모한 도전, 그리고 草賊·赤袴賊의 반란을 통한 농민층의 동요 등은 유교의 중심사상인「인간」에 대한 자각을 더욱 강하게 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반골품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가 반신라적인 인물은 아니었다.324)李在云,<崔致遠의 政治思想硏究>(≪史學硏究≫50, 1995), 105쪽. 신라 왕실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과 왕권에 대한 옹호는 그를 반호족적 입장으로 만들었으며, 그는 문한직에로의 참여나 국사편찬을 통해 유교정치 구현을 꾀한 것이다. 결국 그는 반신라적 인물이 아니라 호국과 구국을 위한 정치사상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이 으뜸으로 삼는 것은 도이다.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힐 수는 있는 것이므로, 도는 사람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도가 존중되면 사람은 자연히 귀하게 된다(≪孤雲先生文集≫권 1, 善安住院壁記).

 그는 仁道에 의한 ‘인간이 하늘을 근원으로 하여 도를 실천하는 존재’임을 시사하면서 나말의 사회모순을 인도주의로 극복하기 위해 ‘大同의 敎化’를 내세우고 있다. 특히 그는 ‘도는 인간에게 있다’는<中庸>의 정신에서 사람의 내면적인 自己同一性인 도를 바탕으로 ‘인간에게는 국경이 없다’는 평등과 대동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325)崔一凡,<孤雲崔致遠의 思想硏究>(≪道原柳承國博士華甲紀念論文集 東方思想論攷≫, 1983), 306∼307쪽. 그러므로<賀殺黃巢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征은 있으되 戰은 없어야 하는 것이 실로 王道에 부합하는 것이다.…영원히 干戈(무기)를 녹여 농기를 만듬이 마땅할지어다(崔致遠,≪桂苑筆耕集≫권 1, 賀殺黃巢表).

 즉, 평화사상과 왕도정치를 지향하여 平和·恤民·勸農 등으로 그 기저를 이루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326)申瀅植, 앞의 책(1984), 452쪽.

 신라말에 이르러 유교사상은 불교·풍수사상 등 여러 종교와 갈등을 일으키기 보다는 서로 융합되어 있었다.327)崔英成,≪崔致遠의 思想硏究≫(아세아문화사, 1990), 63쪽. 최치원은 불교와 유교가 서로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 ‘詩를 쓸 때 표현(글)이 그 뜻(志)을 해하지 않는 것’처럼 양자는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如來와 周公·孔子는 출발은 비록 다르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으로 서로 이치를 같이하는 것이다. 양자를 겸수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沈約이 이르기를 공자는 단서를 열었으며 석가는 그 극치를 다하였으니 그 위대함을 아는 자(양자를 겸수한 자)라야 비로소 至道(극치)를 말할 수 있다(崔致遠,<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19, 67쪽).

 유교를 발단(시초)으로, 불교를 극치(끝맺음)로 보아 양자간의 조화를 통한 하나로 간주한 것이다.328)崔一凡, 앞의 글, 308쪽. 따라서 그는 孔子와 子貢과의 관계를 釋迦와 迦葉과의 그것과 비유하면서 ‘무언 속의 마음의 일치’를 제시하였다.329)崔致遠,<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67쪽). 그러므로 유교의 인도주의나 불교의 득도과정은 방법상의 차이뿐이라는 주장이다.

① 3畏는 3歸와 비교되며, 5常은 5戒와 같은 것이다. 왕도를 실천하는 것이 佛心에 부합되는 것이다(崔致遠,<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朝鮮金石總覽≫上, 79쪽).

② 人心은 곧 佛心이며 부처의 뜻과 유교의 仁은 통하는 법이다(崔致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88쪽).

 유교와 불교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는 최치원의 주장은 나말의 유교사상이 변해가는 과정을 엿보게 한다.

 나말의 유교는 불교 외에도 老莊思想 및 道敎의 영향을 받았고, 선종의 새로운 지적 훈련을 받는 등 그 정신세계의 변동은 결국 3교의 습합된 觀念形態라는 지적을 간과할 수 없다.330)金哲埈,<新羅 貴族社會의 基盤>(≪人文科學≫7, 서울大, 1962), 270∼271쪽. 최치원이 말년에 해인사에서 도교관계 인물과 교류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도교와의 관련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최치원의 도교와의 관계는 인간을 벗어난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인간 내면 속에 있는 우주의 본체와 통할 수 있는 경건한 자세로서 인간의 완성이라는 도덕적 종교관에 있는 것이다.331)崔一凡, 앞의 글, 314쪽. 이러한 나말의 유교와 도교의 만남은 문성왕 때의 金夷魚와 金可紀의 경우에도 엿볼 수 있다. 즉 김가기는 神仙之術에 몰입되었다는 사실 외에도332)申瀅植,<宿衛學生考>(≪韓國史論文選集≫2, 1976), 339쪽.<全唐詩>에 그가 도교에 빠져 終南山에서 道服을 입고 수행을 하였다는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333)≪太平廣記≫권 35, 金可紀.

 이와 같이 나말의 유교사상은 당시 혼란한 사회상을 치유하고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는 방도로써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도덕정치의 회복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그 방편으로 3교의 접목을 통한 인간성의 회생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나말의 유교사상은 고려초에 이르러 나말에 이루지 못한 과거제도 실시나 국사 편찬을 가능하게 한 사상적 분위기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申瀅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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