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1) 교학 불교의 전개
  • (2) 법상종

(2) 법상종

 통일 이후 신라 사회에서는 화엄종과 더불어 법상종도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법상종세는 화엄종세를 능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라 하대에 선종이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諸法相의 差別을 그대로 인식하려는 법상종의 교리는 禪宗과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라하대에 법상종 승려들도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특히 선종 승려라 하더라도 桐裏山門과 같은 풍수지리사상을 수용한 선사들은 唯識思想에 정통하였다. 그런가 하면 圓朗禪師 大通은 충주 月光寺에 주석하였는데, 그 절은 법상종의 學僧이었던 道證이 창건하였다.

 신라 중대 이래 법상종은 두 계통의 교단이 성립되어 있었다. 하나는 미륵을 주존으로 하여 아미타를 부존으로 모시는 교단과 또 하나는 미륵을 주존으로 지장을 부존으로 모시는 교단이다.349)文明大,<新羅 法相宗의 成立 問題와 그 美術 (下)>(≪歷史學報≫63, 1974), 158∼160쪽. 전자에 속한 인물로 太賢을 들 수 있고 후자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로 眞表를 들 수 있다. 법상종의 이 두 교단은 신라말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다만 신라말에 전자에 속한 인물을 구체적으로 찾기 어렵기 때문에 법상종 계통의 造像 양식이 미륵·미타의 兩尊에서 미륵·지장의 양존 형식으로 바뀌었으며,350)文明大, 위의 글, 160쪽. 또한 신라말·고려초에 太賢系 법상종 세력은 약해졌으며 眞表系 법상종이 흥하였음은 金南允,<新羅 中代 法相宗의 成立과 信仰>(≪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46쪽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른 법상종의 교단 세력이 바뀌어간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륵·지장의 조상 형식은 진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이거나 아니면 조금 늦은 시기에 白月山 南寺의 양존은 미륵과 미타로 모셔지고 있다. 신라말 이후에 미륵과 미타의 양존을 모시는 법상종 교단이 위축되는 데에는 弓裔가 이 교단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궁예는 왕이 되기 이전에 世達寺의 중이 되어 善宗이라는 법호를 가지고 있었다. 법호를 가졌다는 면에서 보면 궁예는 불교사상에 대해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궁예의 불교관은 심히 왜곡되어 전하고 있다. 왕건이 정변을 일으켜 고려를 건국하면서, 궁예는 부정적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불교관도 미신적으로 윤색되었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으며 머리에는 金幘을 쓰고 몸에는 方袍를 입었으며, 長子를 靑光보살, 次子를 神光보살이라 했다. 또한 그는 경전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다 신빙할 수 없었다. 때로는 단정히 앉아 불경을 강론하니 僧 釋聰이 말하기를 “다 邪說 怪談으로 훈계가 될 수 없다”고 하자, 궁예가 듣고 화를 내어 그를 鐵椎로 쳐죽였다.351)≪三國遺事≫권 1, 王曆 1, 後高麗 弓裔. 그러나 이러한 기록 속에서 그의 불교에 대한 진실한 면을 찾을 수 있다. 궁예는 후삼국시대 한반도의 삼분의 일을 지배한 지도자로서의 力量을 가진 인물이고, 그의 불교 신앙도 그런 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했는데, 차자에게 붙여진 신광보살은 아미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장자를 지칭한 청광보살은 관음이다.352)神光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諸佛의 光明을 뜻하고 또 하나는 미타불이 내는 광명을 의미한다. 그 중 前者는 제약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광보살은 아미타를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靑頸觀自在보살은 관음의 變相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청광보살은 관음으로 불려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궁예는 법상종 중 미륵과 아미타를 모시는 교단에 속해 있었는데, 이 교단에서는 관음을 중요하게 받들었다.353)金杜珍,<高麗初期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1 ;
≪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117쪽).
白月山 南寺는 努肹夫得과 怛怛朴朴이 修道하여 각각 미륵과 미타의 兩尊으로 모셔진 법상종파에 속한 사찰이다. 그런데 이 절의<兩聖成道記>에는 두 사람의 수도가 무르익을 즈음에 관음이 여인으로 현신하여 그들을 시험하고는 각각 미륵과 미타로 成佛하도록 도와주고 있다.354)≪三國遺事≫권 3, 塔像 4,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미륵과 미타를 모시는 太賢系의 법상종파에서는 관음이 중시되어 신앙되었는데, 이 三尊은 곧 궁예의 부자가 스스로 표방한 삼존과 일치한다. 이 점은 궁예의 법상종 신앙이 백월산 계통의 법상종 전통을 이었음을 알려준다.

 궁예로 이어진 법상종파는 관음을 중시하면서 淨土를 희구하는 경향을 가졌다. 이 교단에서 강조한 삼존은 정토3불이기도 하다. 또한 瑜伽에서 받드는 관음은 靑頸大悲王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궁예의 장자가 청광보살로 관념된 것은 바로 청경대비왕의 관념을 표방함이며, 다음 대의 明王으로 등장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355)金杜珍, 앞의 책, 221∼222쪽. 그렇기 때문에 차자가 아닌 장자를 특별히 관음으로 관념하였다.

 미륵과 지장의 양존을 모시는 법상종파도 金山寺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甄萱은 神劍의 亂 이후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금산사는 후백제의 政變에 깊숙이 관여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왕실과는 어느 정도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高城郡의 鉢淵寺나 속리산의 吉祥寺, 공산의 桐華寺도 법상종 사찰로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법상종의 법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또한 진표의 제자로 永深·寶宗·信芳·軆珍·珍海·眞善·釋冲 등이 있었는데, 모두 山門祖가 되었다고 한다.356)≪三國遺事≫권 4, 義解 5, 眞表傳簡. 이로 보면 신라말에 진표계의 법상종 계통의 사찰이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과 지장의 양존을 모시는 법상종파에서는 계율을 중시하였다. 이런 면은 이미 진표의 교학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진표는 처음 지장으로부터 淨戒를 받았으나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懺悔法을 더 닦은 결과, 미륵으로부터≪占察經≫兩卷과 아울러 189개의 證果 簡子를 전수받았다.357)위와 같음. 이 때 그가 받은 것 중에 강조된 것은 189개의 간자 중 제8과 제9의 兩 간자였다. 그것은 미륵의 손가락 뼈로 만들었으나 나머지 간자는 沈檀木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189개의 간자는 인간이 處하게 되는 189개의「因果應報相」을 말하는데, 그 중 제8과 제9는 지금까지 얻었던 모든 계율과 앞으로 얻을 모든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법상종파에서는 계율이 강조될 소지가 있으며 미륵신앙 내에서도 戒가 중요시되고 있다. 미륵의 說法 중 3분의 2 이상이 계율에 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륵이 출현하여 교화하는 전륜성왕의 통치는 혼란해지기 때문에, 계율을 강조하여 대중을 龍華 이상세계로 濟度하고 있다. 인간이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원하거나 미륵보살전에 왕생하기를 원할 때에는 반드시 계를 지녀야 한다. 또한<瑜伽論本事分> 중에 나타나는 菩薩戒의 說主가 미륵으로 나타나 있다. 일반적인 戒本인≪梵網經≫은 出家·在家者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것임에 대해, 유가 보살계는 주로 출가자를 위한 것이며 전자보다 더 엄격한 셈이다.

 진표가 미륵으로부터 받은 간자는 永深을 거쳐 心地에게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심지에게로 전해지는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공산에 거주하던 심지가 속리산에서 영심이 개설한 證果法會에 참석하려 했으나, 법회장 내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지 못하고 정원에서 參禮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간자를 발견한 심지는 두 번이나 영심에게 돌아가 간자를 돌려주었다. 결국 이것은 부처의 뜻이라 하면서 영심은 간자를 심지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진표의 간자는 공산의 동화사에 보관되었다. 심지는 헌덕왕의 왕자였으며, 동화사가 신라말에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생각할 때, 후백제의 수중에 있게 되는 金山寺와 같은 교단이면서도 갈 길을 달리했던 것 같다.

 간자를 중시한 미륵과 지장을 받드는 법상종파에서는 占察法이 중시되었다. 그래서인지 그것은 법상종으로서 보다는 점찰법회라는 새로운 종파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358)金煐泰,<新羅 占察法會와 眞表의 敎學硏究>(≪佛敎學報≫9, 1972), 99쪽. 간자가 점치는 기구이기 때문에 간자를 통해 인간의 운세에 관한 상을 얻어내는 것이므로, 간자를 던져서 상을 얻어내는 것이 相敎로서는 우수한 것이라 하였다.359)≪三國遺事≫권 4, 義解 5, 眞表傳簡. 말하자면 一然은 점찰법도 법상종의 한 예배 형식임을 분명히 한 셈이다. 또한 미륵과 지장 兩尊 중 미륵이 더 殊勝하게 나타나는 한, 그것은 지장이 說主인 점찰경의 내용을 중심 사상으로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점찰법회는 중요하게 경배되었다. 이미 진표계 법상종의 開創祖라 할 수 있는 圓光의 敎學에 占察寶가 등장하고 있으며, 심지에게도 그런 면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진표계의 간자가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과정은 王建이 三韓을 통합하는 緣起설화를 형성시키고 있다. 고려 말기 金寬毅가 찬술한≪王代宗錄≫권 2에 “羅末에 大德 釋冲이 眞表律師의 袈裟 一領과 戒簡 189枚를 태조에게 바쳤다. 지금 桐華寺에 전하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360)≪三國遺事≫권 4, 義解 5, 心地繼祖.고 했다. 석충은 분명 진표계 법상종에 속했던 승려로 이해될 수 있는데, 어쩌면 궁예에게 죽임을 당하는 석총과 동일인인 듯하다.

 궁예가 지은 經論은 2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요망하고 邪說이며 怪談으로 치부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전은 궁예의 불교사상의 깊이를 알려주는 것으로 아마 미륵과 미타를 모시는 법상종파의 입장에서 저술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비판한 석총은 화엄종을 비롯한 타종파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진표계 법상종파의 승려였음이 분명하다. 혹은 석총이 진표계 법상종파에 속한 석충이라면, 궁예의 불교신앙은 진표계 법상종으로부터 반발을 받고 있었다고 하겠다.

 신라말에 법상종 내의 양 교단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는가를 분명히 하기는 힘들다. 다만 미륵과 미타를 모시는 교단은 고려초에 그 법맥이 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지만, 미륵과 지장을 모시는 교단은 고려초에 仁州 李氏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현종 이후 크게 성행하였다.361)金杜珍, 앞의 책, 113∼115쪽. 고려 초기에 활동한 寬雄이나 融哲 등은 모두 진표계 법상종에 속한 승려였으며, 융철의 제자인 鼎賢이 고려초에 법상종 승려로서 國師에 封해졌으며, 관웅의 제자인 海麟이 그 뒤를 이어 智光國師로 봉해졌다.

 궁예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고려초에 미륵과 미타를 모시는 태현계 법상종파가 위축되어 쇠잔하여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반대로 금산사를 중심으로 진표계의 법상종파는 크게 떨치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궁예의 미륵신앙을 진표계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362)金惠婉,<新羅下代의 彌勒信仰>(≪成大史林≫8, 1992), 22∼28쪽. 진표가 설악산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한 기록이 이러한 추론을 이끌어 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려초에 진표계 법상종이 성행했음을 알려주기에는 충분하다. 慧德王師 韶顯은 물론, 그의 스승인 智光國師 해린이나 그보다 약간 시대가 앞서는 정현 등은 모두 진표계 법상종 승려로서 仁州李氏와 연결하여 교세를 크게 떨치고 있었다. 다만 소현이 海東六祖를 설정하고 아울러 태현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태현이 해동6조 속에 반드시 들어 있었는지는 더 추구되어야 하겠지만, 법상종 내에서의 위치로 보아 진표계가 아니더라도 언급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신라말에 두 교단의 세력이 각각 법맥을 계승시키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으며, 그 사이에 은근한 대립과 갈등이 충분히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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