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1) 북종선의 전래와 남종선의 도입

 신라 하대에 지방호족이 등장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禪宗이 유행하였다. 경전을 부정하면서 佛性을 自己 내에서 찾으려는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 경향을 지녀서, 당시 중앙정부의 거추장스런 간섭을 뿌리치면서 지방의 독자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려던 지방호족의 구미에 어울리었다. 자연 선종은 지방호족 세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대두하였다. 그런데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고려정부는 지방호족 세력을 編制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갔다. 자연 지방호족과 밀착되어 있던 선종에 대한 분석은 중세 고려사회가 성립되어 가는 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신라에 선종이 도입되는 것은 도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전을 숭상하고 불타에 귀의하는 법에만 익숙하여, 無爲한 선종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것을 허황한 것으로 여겨 숭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의는 설악산으로 은둔하였다. 도의가 陳田寺로 나아가 숨게 되는 것은 당시 유행한 교종 불교의 신앙적 분위기 속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되었기 때문이다. 敎學 불교에서는 도의의 선종을「無爲任運」의 종파라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비판은 도의가 처음으로 남종선을 도입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사실 도의 이전에 북종선을 비롯하여 이와 비슷한 禪風은 전해져 있었고, 이들이 특별히 비난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도의 이전에 신라 승려인 恒秀禪師가 海西에 도달하여 여러 곳을 다니다가, 西堂 智藏에게 묻기를 “서당의 법이 만약 東夷로 흘러 간다면 어떤 아름다운 징조가 있는지, 그 妙讖을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363)李桓樞,<毗田盧庵眞空大師普法塔碑文>(李智冠,≪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1, 伽山文庫, 1994), 104쪽.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장은 靑丘의 도의가 禪法을 전파하여 드러낼 것이라 하였다. 곧 항수선사가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지장에게 나아가 선법의 東流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도의 이전에 중국으로 유학간 항수선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가 중국에서 신라로 귀국하였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항수선사는 도의 이전이거나 그 비슷한 시기에 우리 나라 禪僧들이 중국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알려주기에는 충분하다. 그러고 보면 도의 이전에 신라의 승려들이 북종선에 상당히 접했던 점을 유념할 수 있다. 도의보다 시대가 약간 앞서는 神行이나 또는 法朗이 북종선의 도입에 큰 역할을 하였다.

 법랑은 중국에 들어가 선종의 4祖인 道信의 법인을 받았는데, 신행은 그의 문하였거나 아니면 傳法 문인이었다. 그런데 신행의 법문은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도 山門을 開創한 智證대사에게로 이어져 있다. 이 점은 도의가 남종선을 도입하기 이전에 북종선이 상당히 퍼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신행은 경주 출신으로 俗姓은 김씨였으며, 신라 중고시대의 留學僧이었던 安弘의 從曾孫으로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안홍이 당에서 가지고 온≪승만경≫·≪楞伽經≫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364)呂聖九,<信行의 生涯와 思想>(≪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2), 342∼343쪽.

 신행은 30세를 전후하여 출가에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48세(751년)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였으며, 법상종 승려인 運精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중국 선종4조 도신의 제자였던 법랑에게서 북종선을 수학하였다. 그는 경덕왕 15년(756)에 入唐하여 神秀의 法孫인 志空에게서 3년 동안 사사하고는 동왕 18년 경에 귀국하였으며, 혜공왕 15년(779)에 입적하기까지 20년 동안 斷俗寺에 머물면서 북종선을 전하는 데 힘썼다.

 북종선의 사상 경향은 교종 불교와 크게 마찰을 빚었던 것은 아니다. 북종선의 所依 경전인≪능가경≫은 지난날의 사고 방식을 버리고 如來의 法身을 찾으려 했으며, 신행은 도신의 사상적 특징인「守一不移」를 중시하여「安心」과「看心」을 수행 방법으로 제시하였다.365)呂聖九, 위의 글, 352∼355쪽. 이러한 사상 경향은 교학 불교의 사상과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신라 하대사회에 전래되어 있었던 북종선은 교종 불교와 연계되어 있었던 듯하다. 신행이나 그의 제자였던 三輪은 법상종 사상에 익숙해 있어서 유식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였으며, 그외의 북종선 사상은 화엄사상이나 밀교사상과도 연관된다고 했다.366)呂聖九, 위의 글, 360∼365쪽.

 본래 단속사는 경덕왕이 전제주의로의 개혁정치를 단행할 당시, 그 주도 세력으로 王黨派에 속했던 李純·信忠 등이 실각하여 지리산으로 은거하면서 창건한 절이다.367)李基白,<景德王과 斷俗寺·怨歌>(≪韓國思想≫5, 1962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20∼223쪽). 이순이나 신충 등은 비록 개혁정치에서는 물러나와 있었을 지라도 경덕왕과는 밀착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단속사는 지리산 기슭에 세워졌을 지라도 신라 중앙귀족과 연관을 가진 절이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단속사에 신행이 주석하고 있었음은 곧 북종선이 당시 귀족세력으로부터 외면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교종 불교나 중앙귀족 세력과도 친밀할 수 있었던 북종선이 유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道義의 남종선을 수용하는데 반드시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먼저 들어와 있었던 북종선은 뒷날 도의의 남종선이 퍼져나가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도입되는데 능동적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도의 이전에 항수선사의 존재는 북종선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도의의 남종선이 도입되는 것과 연관하여 眞鑒선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도의가 먼저 중국에 가서 道를 구하던 중에, 마침 입당 유학한 慧昭와 우연히 만나 서로 반가워하며 법을 구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였는데, 혜소는 終南山에 들리기도 하고, 혹은 禪 수행을 하면서 3년을 더 머물다가 귀국하였다.368)崔致遠,<雙谿寺眞鑒禪師大空靈塔碑文>(≪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130쪽. 중국에서의 유학 기간 동안에 만난 도의와 혜소는 南宗禪風의 진작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가졌을 것이다. 혜소가 馬祖 道一의 法嗣인 神鑒의 법인을 받아 귀국한 점도 두 사람의 선풍이 가까웠음을 생각하게 한다.

 혜소는 귀국한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禪門을 開創했는데, 그의 선문이 도의의 선풍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알려 줄 만한 직접적인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혜소의 선풍은 뒷날 鳳巖寺의 曦陽山門을 성립시키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려 초기에 찬술되는 靜眞대사 兢讓의 비문에는 지증대사 道憲이 혜소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369)李夢游,<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7쪽. 되어 있기 때문이다. 智證大師碑에는 도헌이 신행의 북종선을 이은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희양산문이 긍양 때에 와서는 혜소로 법맥을 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370)金煐泰,<曦陽山禪派의 成立과 그 法系에 대하여>(≪韓國佛敎學≫4, 1979), 29∼31쪽.
金映遂는 道憲이 신행의 法孫인 慧隱뿐 아니라 慧昭로부터도 법을 받았다고 하여(金暎遂,<曹溪禪宗에 就하여―五敎兩宗의 一派, 朝鮮 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1938, 159쪽), 희양산문이 북종선과 남종선으로부터 모두 법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후 이 설은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데 김영태는 도헌이 혜소로부터 법인을 받은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것은 고려초 남종선이 불교계를 주도하자 북종선에서 남종선계로 법계가 고쳐진 것이라고 하였다.

 희양산문의 성립에 북종선은 물론 혜소의 선맥이 관여하고 있음371)추만호,<선종 법맥 승계의 특징과 북종의 법계 변신>(≪나말려초 선종사상사연구≫, 이론과 실천, 1992), 149쪽.
희양산문은 실제로 고려초 긍양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는 남종선계의 법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법계 변신을 시도하는 것은 남종선 일색인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와 고려 초기의 정치·사회 상황을 감안한 것이며, 실제로 희양산문의 저류에는 북종선의 흐름이 있었다.
은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우리 나라에서 독자의 선문을 성립시키는데 북종선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혜소의 선풍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도의의 남종선은 교학 불교나 먼저 들어와 있었던 북종선으로부터 직접 환영받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비슷한 시기에 도입된 혜소의 남종선이 수용되었던 사회 분위기는 비록 도의로 하여금 설악산의 진전사로 은둔하게 만들었을 지라도, 그 곳에서 상당한 규모의 禪門을 구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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