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3) 선종산문의 성립

가. 가지산문

 迦智山門은 道義에 의해 개창되었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중국에 들어가 馬祖 道一의 제자인 西堂 智藏의 法印을 받아,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陳田寺에 거주하였다. 이 때에는 敎學 불교가 성하여 세상이 경전의 가르침에 젖어 있었다. 無爲한 선종은 허탄하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山林에 은거하고 말았다.

 도의는 법을 廉居에게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億聖寺에 거주하면서 법을 體澄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禪林院의 弘覺선사는 염거의 제자로서 억성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왕실의 부름을 받아 대궐에 들어가서 법문을 강설한 후, 다시 억성사로 나아가 憲康王 6년(880)에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그러므로 억성사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홍각선사의 비가 있는 선림원지였을 것으로 추론되기도 한다.383)權悳永,<新羅 弘覺禪師碑文의 復元 試圖>(≪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641쪽.

 체징은 僖康王 2년(837)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文聖王 2년(840)에 귀국하였다. 처음 그는 武州의 黃壑寺에 머무르다가 憲安王 3년(859)에 왕의 요청으로 寶林寺에 이주하였다. 이 때부터 金彦卿 등 신라 중앙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원 세력이 커져서 迦智山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지산문의 성립에는 왕실이나 중앙 귀족세력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384)李啓杓,<新羅下代의 迦智山門>(≪全南史學≫7, 1993), 287∼291쪽.

 체징의 제자에 逈微·英惠 등이 보이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는 형미이다. 형미는 진성왕 5년(891)에 중국에 들어가 雲居 道膺의 법을 받고 孝恭王 9년(905)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건의 歸依를 받아 같이 開京으로 갔다가 궁예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의의 법맥을 직접 이어 받지는 않았지만, 眞空은 설악산 陳田寺에 들러 도의의 靈塔을 배알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므로 가지산문과 연결된다. 진공은 스승없이 스스로 깨우침을 주장하면서 교학 불교를 부정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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