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2) 선종의 흥륭
  • (4) 선종사상의 경향

(4) 선종사상의 경향

 나말여초 선종사상의 경향은 진성여왕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고 있다. 진성여왕 이전의 그것은 개인주의적이었고, 왕실과 지방호족의 쌍방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선종은 왕실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측면에서 교학적 경향을 완전 부정하지 않았다. 도의는 화엄의 4종 法界와 55善知識의 行布法門 외에 따로 祖師禪道를 설하였는데, 화엄의 4종 법계를 손안에 든 법계라 하고 55선지식의 행포법문을 水中의 물거품이라 하였다. 그의 法孫인 體澄은「性」과「相」이 다르지 않음과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남을 설하였다.

 도의와 비슷한 시기의 홍척은 北宗禪的인 경향을 지녔다. 그는 “靜하였을 때에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에 골짜기가 應한다. 無爲의 이익됨은 다투지 않고 이긴다”401)崔致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90쪽.고 하였다. 곧 홍척의 禪風은 무위하여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운찬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남종선을 받아왔다 하더라도,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희양산문을 연 道憲은 다른 산문들과는 달리 태사공의 문구를 인용하는 등 유학에 밝았고, 六異와 六是를 제창하였다. 6이는 禪僧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데, 탄생·금기·出家 및 律戒와 훈계 등을 받을 때의 특이함을 말한다. 6시는 佛事의 당연성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왕실의 청을 거절하면서 단월 세력과 연결되는 면과 사원 경제의 당연성을 말한다.

 진성여왕 이후가 되면 선종사상은 祖師禪의 優位를 주장해 가는 경향을 지녔다.≪禪門寶藏錄≫에는 낭혜의 선사상인<無舌土論>이 전한다.「有舌土」가 불토인 應機門으로 敎門이라면,「無舌土」는 祖土인 正傳門으로 禪門이다. 敎學은 마치 百官이 모두 그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여 일이 처리되는 것에 비유된다면, 禪學은 天子가 말없이 廟堂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어도 천하가 안정되는 것에 비유되었다. 그것은 교문보다도 선문이 우월하다는 것이다.402)물론 禪과 敎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교종불교가 성행한 분위기 속에서 선종이 들어와 정립되는 과정에, 교종의 교리와 비교하여 선종의 우위를 내세우려 했다. 그것이 祖師禪의 건립이다. 일단 선종산문이 건립된 이후 불교계는 교와 선의 교섭문제를 정리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다.

 굴산문을 개창한 梵日은 평상의 마음이 바로 道理라 하였는데,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그 뒤 眞歸祖師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祖師禪이라 하였다. 곧 如來禪보다 우월한 것이 조사선이었다.403)진귀조사설은≪海東寶藏錄≫ 속에 전하는 내용을 고려 후기의 天頉이 다시 인용한 것이다. 진귀조사설에서와 같이 강하게 祖師를 강조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특별히 梵日의 사상으로 인용된 것은 그의 사상경향이 조사선을 수립하려는 성격을 가졌음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선과 교를 비교하여 선을 우월하게 보려는 이러한 선종사상 경향은 선사들이 왕실보다 지방호족 쪽으로 기울어지는 분위기와 연관되어 있다.404)金杜珍, 앞의 글(1973), 40쪽.

 후삼국 정립기가 되면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면보다「外化」에 비중이 두어졌고, 따라서 지방의 대호족들이 주위의 군소 지방세력을 포섭 동화해 감을 합리화하였다.405)金杜珍,<了悟禪師 順之의 禪思想―그의 三遍成佛論을 中心으로―>(≪歷史學報≫65, 1975), 35∼51쪽. 그것은「一心」을 중심으로 하여「외화」함을 주장했다. 범일의 제자 행적이「일심」을 강조하려는 것도 이러한 선사상의 경향과 관련이 있다. 그는 “一心을 보존하라”든가 “한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심희의 제자인 찬유도 일심을 강조하여 “同一한 眞性이 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의 경향은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 敎禪一致의 사상을 가능하게 하였다. 왕건의 先代 세력과 결연된 순지는 四對八相·兩對四相·四對五相 등 相論과 三遍成佛論·三遍實際論 등의 사상을 남겼다. 3편성불을 논하면서 頓悟와 漸修를 통한 성불을 주장했는데, 순지는 그 경지가 모두 같다고 함으로써 교선일치의 사상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어 그는 頓證實際에서「內證外化」사상을, 廻漸證實際에서 교선일치 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406)金杜珍,<了悟禪師 順之의 相論>(≪韓國史論≫2, 서울大, 1975), 109∼111쪽. 고려초의 교선일치 사상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경향과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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