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3) 미륵신앙
  •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1) 미륵의 출현과 말법신앙

 석가가 현세불이라면 미륵은 來世佛이다. 석가를 이어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에 대한 신앙은≪彌勒上生經≫·≪彌勒下生經≫·≪彌勒成佛經≫에서 집중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세 경전이 전하는 미륵신앙은 실제 긴 기간을 거치면서 여러 개의 많은 설화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미륵신앙은 轉輪聖王의 治世와 얽혀 있다.

 阿逸多와 미륵이 부처 앞에서 수도하여 후에 아일다는 전륜성왕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는 이웃 국가를 정벌하고는 그 땅을 佛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살기좋은 이상세계가 된다. 이 때 미륵이 化生하여 전륜성왕의 불법통치를 돕는다. 곧 미륵의 출현은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고 그의 出家를 이끄는 것이지만, 그러한 이상세계가 도래하기까지 이 사회는 매우 혼탁해져 있게 된다. 미륵이 출현하기 이전의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사회는 극도로 혼란한 것이다.

 미륵 출현 이전 전륜성왕의 통치가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미륵하생경≫에 잠깐 언급되어 있지만,≪長阿含經≫등 小乘 경전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407)≪長阿含經≫권 2, 轉輪聖王修行經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전륜성왕의 輪寶가 바뀌어 가면서 그에 따라 백성들이 빈궁하여 절도를 일으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살인과 전쟁·죄악·배신이 난무하면서 자연 인간의 수명까지 단축되는 극도의 혼란을 맞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 출현한 미륵은 엄격한 戒律을 강조하고408)金三龍,<百濟彌勒信仰의 性格과 그 歷史的 展開>(≪韓國彌勒信仰의 硏究≫, 同和出版公社, 1983), 101쪽. 그것으로써 인간을 제도함으로써 현실사회에 이상세계를 도래시킨다고 한다. 미륵신앙은 혼탁한 末法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이상세계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실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미래에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바로 이상세계가 되기 위해서, 미륵신앙은 사회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상 경향을 지녔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은 시대에 따라서 그것의 모든 내용이 표출되어 강조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모습이 당시의 사회 상황과 연관되어 중요시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사회에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무왕이 龍華山 아래에 彌勒寺를 창건한 것은 그 땅에 미륵불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409)위와 같음. 현실사회가 이상세계로 고쳐지기 위해서는 당대 사회의 혼란과 그것을 개혁하려는 사상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백제 미륵신앙에서는 현실사회의 혼란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혼란을 제도하려는 계율을 강조하고 있다.410)金杜珍,<百濟의 彌勒信仰과 戒律>(≪百濟硏究叢書≫3,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3), 72∼74쪽.

 백제 미륵사상의 전통을 이은 진표에게서도 이런 면은 비슷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미륵불로부터 직접 계율을 받고자 열망하였다. 다만 이상세계의 건립을 꿈꾸면서 계율을 강조하는 미륵신앙은 비록 혼란한 사회의 개혁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러한 사상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백제 미륵신앙 속에서 사회개혁 사상은 수면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것이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개혁 사상은 신라 하대에 오면서 점점 부각될 수 있었다. 당시에 末法사상이 크게 퍼져 있었던 것은 미륵신앙의 사회개혁 사상과 연관될 수 있다. 진성여왕은 角干 魏弘에게≪三代目≫이란 향가집을 편찬하게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上代·中代·下代의 3대 중 하대에 살아간다는 말법의식을 나타내고 있다.411)이러한 시대의식은 최치원이 智證大師碑에서 신라불교사를 시대 구분하여 헌덕왕대 이후 자신이 사는 시기를 제3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말법의식은 신라 하대 禪師들의 碑文 속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선사들의 행적은 비록 말법시대에 태어났지만, 애써 중생을 제도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말법시대를 의식하면서 교종 불교를 개혁하려던 선종 승려들이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는 경우가 자주 나타나 있다. 우선 북종선을 전한 神行禪師는 스스로 隱居하여 禪修行을 닦았던 곳인 단속사에 대해서 摩訶迦葉이 미륵을 기다린 곳으로 비유하였다.412)金獻貞,<斷俗寺神行禪師碑>(≪朝鮮金石總覽≫上), 115쪽. 이러한 비유는 신행이 주석하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쩌면 신행은 가섭이 미륵을 기다리듯이 미륵불의 출현을 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봉암사의 지증대사는 미륵불로 칭송되기도 했다. 곧 경문왕 4년(864)에 端儀長翁主는 지증대사를 當來佛이 하생한 것으로 공경하였다.413)崔致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위의 책), 92쪽.

 그외에 해주의 廣照寺에서 수미산문을 개창한 利嚴이나 光陽 玉龍寺의 慶甫 등도 자기들이 住錫할 곳을 鷄足山으로 비유하면서 미륵이 출현해 줄 것을 기약하였다.414)金惠婉, 앞의 글, 18∼19쪽. 이들 선사들의 탑비에 나타난 미륵신앙은 마하가섭이 계족산에서 석가모니의 법의를 받고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는 경전의 내용과 관련되어 선사들을 마하가섭에 비유하였고,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며 그들의 역할을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중개자로서 강조한 것이다.415)金惠婉, 위의 글, 20쪽.

 이러한 것은 말법시대와 관련하여 구세주로서의 미륵신앙이 신라 하대의 선사들에게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416)위와 같음.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이상세계의 건설은 신라 하대의 사회 혼란을 지적하면서 사회개혁 사상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신라 하대의 미륵신앙이 이상세계의 건설과 연고되어 유행했음은 調信의 경우에 나타나 있다. 조신은 世逵寺의 승려로서 그 절에 딸린 莊舍가 溟州의 木奈李郡에 있어서 그 곳의 知莊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太守인 金昕公의 딸을 연모하여 觀音 앞에서 그녀와 인연을 맺어줄 것을 빌었는데, 꿈에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 조신은 40여 년을 그녀와 생활하면서 인생의 고락을 다 경험하고는 마지막에 서로 헤어짐으로써 꿈을 깬다.

 조신은 꿈에서 인생의 갖가지 幸苦를 맞보았다. 그 중 15세된 자식이 죽자 蟹縣嶺에 그를 묻었는데, 뒤에 그 곳을 파니 돌 미륵이 나왔다. 그리하여 私財를 기울여 淨土寺를 창건하였으며, 그 후에는 그가 간 곳을 모른다고 했다.417)≪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물론 죽은 자의 輪廻還生을 위해 무덤 앞에 돌 미륵상을 안치하는 신앙은 이미 신라 중대에도 유행하고 있었다.418)≪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條에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 一軀安於塚前”이라 하여, 竹旨嶺에 거처하였던 居士가 죽어 자신의 아들인 죽지랑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述宗公은 거사를 장사지내고 그 무덤 앞에 돌 미륵상을 안치하였다. 그렇지만 신라 중대의 미륵신앙에서와는 달리 조신은 정토사를 창건하여 淨土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조신은 현실사회에서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미륵정토를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미타와 미륵·관음은 淨土三佛이라 하는데, 실제로 관음은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조신이 받든 관음불도 정토와 얽힌 것으로, 미륵의 이상세계를 현실사회에 구현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당대 사회의 혼란상이나 사회개혁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신라 국가체제를 부정하고 그것을 뒤흔들려는 기운이 팽배해지면서, 미륵신앙은 현실사회를 개혁하려는 경향을 뚜렷하게 지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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