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Ⅳ. 사상계의 변동
  • 2. 불교의 변화
  • 4) 유·불·선 3교의 융합
  • (2) 유·불·선 3교의 조화

(2) 유·불·선 3교의 조화

 우리 나라에 道敎 내지 神仙사상은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다. 우선 檀君神話에 桓因의 서자인 桓雄이 太伯山頂에 神市를 건설하여 神政을 펴고 있다. 곧 그것은 단군신화가 도교의 神仙說과 방불한 면을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데 신라 개국신화에서는 신선사상이 보다 더 뚜렷하게 들어 있다. 경주의 서쪽 仙桃山에 聖母祠가 있는데, 그 神母는 중국 帝室의 딸로 이름을 娑蘇라 하였다. 그녀는 일찍이 신선술을 터득해서 海東으로 와 오래 머물다가 끝내는 선도산 신모가 되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朴赫居世와 閼英이 이 신모의 소생이라고 했다.438)≪三國遺事≫권 5, 感通 7, 仙桃聖母隨喜佛事.

 선도산 신모에 관한 신앙은 고려시대에까지 퍼져 있었다. 金富軾이 李資諒의 수행원으로 宋에 들어갔을 때 佑神館에 설치되어 있는 女仙像을 보고는, 그것이 선도산 신모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439)위와 같음. 이렇듯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발생하여 삼국시대는 물론 통일신라나 고려시대 또는 후대에까지 유행하면서 전승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신선사상의 유행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노자의≪道德經≫등의 서적이 流入된 점이다. 효성왕 2년(738)에 唐의 사신인 邢璹은 노자≪도덕경≫등의 서적을 가져와 王에게 바쳤다.440)≪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효성왕 2년 4월.

 신라 하대사회에 신선사상의 전개는 도덕경의 유입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을 지라도, 반드시 그것과 연계하여 유행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라 고유의 土着사상이나 신앙에 근거하였으며, 유교나 불교신앙과 융합하여 유행한 듯하다. 유·불·선 3교가 융합하여 신라 토착의 고유한 정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鸞郞碑의 序文에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그 이름은 風流이다. 敎를 만든 근원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그 핵심은 유·불·선 3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벼슬하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 司寇(孔子)의 가르침이요, 無爲한 일에 처하고 不信의 敎를 행하는 것은 周 柱史(老子)가 으뜸으로 세운 바이며,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일만 수행하는 것은 竺乾 太子(釋迦)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441)≪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37년.

 최치원은 花郞徒의 정신을 본래 신라에 고유하게 있었던 玄妙한 道 즉, 風流道에서 구했는데, 그것의 근원은 仙敎에 있었지만442)車柱環,≪韓國道敎思想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8), 113쪽. 그 추구하는 바는 유·불·선 3교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道義를 연마하고 歌樂으로써 즐기며, 山水를 유람하여 먼 지방도 안가는 데가 없었다는 화랑도의 수련 방식은 선교의 수양에 근원하였지만, 그들이 행하는 정신은 유·불의 교의에 투철하였다. 화랑도의 정신이 비록 신라 하대의 최치원에 의해 유·불·선 3교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을 수도 있지만, 신라의 風流道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풍류도의 전승은 신라 토착사회에 유교와 불교가 유입되어 정착된 후에, 그것을 융합하려는 경향을 용이하게 하였다. 사실 신라 불교신앙 속에는 많은 土着的인 신앙이 가미되어 있다. 그런 경향은 일찍부터 나타났다. 의상이 창건한 洛山寺의 관음은 月水帛을 빠는 여인으로 등장하였으며 성덕왕 당시에 여인으로 化生하여 努肹夫得과 怛怛朴朴을 각각 미륵과 미타의 兩尊으로 성불시킨 관음도 모두 토착의 地母神 신앙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한 관음은 선도산 신모신앙과 연결이 가능하며, 그 설화 속에 등장한 월수백이나 해산 후 아기를 목욕시킨 金液은 여성의 생리와 관련된 仙家의 玄水로 이해되고 있다.443)鄭璟喜,<三國時代 社會와 仙道의 硏究>(≪史學硏究≫40, 1989), 81쪽.

 신라 불교신앙 내에 융합되어 있는 토착신앙은 대체로 선교신앙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법한데, 그것은 선·불 2교를 보다 쉽게 융합할 수 있게 했다. 신라 하대에 오면 선·불 내지 도·불을 같이 이해하려는 경향이 확산되어 갔다. 성덕왕 당시에 重阿湌인 金志誠은 산수를 즐겨 隱士로서의 선가적 삶을 살아 갔지만444)<甘山寺彌勒菩薩造像記>(≪朝鮮金石總覽≫上), 35쪽. 돌아가신 부모와 가족들을 위해 미륵존상과 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 김지성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仙(道)家와 불교사상을 조화하려는 경향은 확산되어 있었다.

 장흥 보림사에서 실제로 가지산문을 성립시킨 체징은 도교의「道」를 선종 불교의 깨달음과 연계시켜 같이 파악하였다.<도덕경>에 “上士는 도를 들으면 숭상하여 받들고, 中士는 도를 들으면 보존한 듯 잃은 듯하며, 下士는 도를 들으면 손바닥을 문지르며 웃으니, 웃지도 아니하면 족히 道라 여길 수 없다”고 하였다.445)金潁,<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위의 책), 61쪽. 그것은 도교와 불교를 같이 이해하려는 것이다.

 신라 하대에 선사들이 사원을 開創하려 할 때에 風水地理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러한 이해의 밑바닥에는 仙敎的 사고가 깊이 베어 있었다. 王建은 圓朗禪師가 月光寺에 머물 것을 요청하면서 “(이 山은) 일찍이 金剛에 기록되어 있으며, 仙記에도 이름이 전하여 오는데,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고 뭉게뭉게 안개가 피어 오르며, 널리 빼어난 정기를 품고 있는 것이… 傳에 갖추어 실려있다. 禪師는 거기에 머물도록 하라”446)金潁,<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224쪽.고 하였다. 나말의 원랑선사 大通은 충주의 月光寺에 주석하였는데, 그 곳은 금강에 기록되었고 仙史에도 이름이 전해옴을 내세웠다.

 月嶽山은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고 뭉게뭉게 안개가 피어오르며, 널리 빼어난 정기를 품고 있다”447)위의 책, 214쪽.는 풍수적인 사상과 함께, 그 옛날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함에 있어서 이 山으로서 모든 재앙을 없게 할 수 있었다는 공로를 기리고 있다.448)위와 같음. 모르긴 하되 월악산이 선사에 기록되는 내용은 바로 이런 면이었다. 대통이 월광사에 주석하는 데에는 선교신앙이 깊게 드리워져 있는 셈이며, 신라 하대에 사원이 건립되는 데에 선교신앙이 작용하고 있었다.449)예를 들면 崇福寺가 건립되는 데에 風水地理的인 사고가 깊이 배어 있는데, 그 곳을 元聖王陵으로 조성한 사실에서 王室의 福山과 佛門의 德海를 조화하려는 신앙이 곁들어 있다.

 또한 진성여왕이 왕위를 계승함에 대해 최치원은 “엎드려 생각건대 大王전하는 형제자매의 德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王家의 계보가 심히 밝고 좋아, 빼어난 坤德을 본받아 천륜을 계승하였다. 진실로 이른바 신기한 구슬을 품고 돌을 다듬어 이지러진 부분을 메우고 착한 일을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寶雨經≫의 부처님 말씀으로 뚜렷하게 授記함과≪大雲經≫의 王偈와의 완연한 부합을 얻게 된 것이다”450)崔致遠,<崇福寺碑文>(≪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新羅篇), 239쪽.라고 하여,≪보우경≫과≪대운경≫의 내용을 들어 칭송하였다. 그런데 그 두 경전은 순수한 불경이라기 보다는 唐의 則天武后가 부처로부터 미리 授記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仙記에 가까운 것이다.

 이미 신라 중대 이래 불교와 유가사상을 함께 아우르려는 경향이 지속되어 왔고, 이와 함께 불교와 도교 내지 仙家사상을 조화하려는 신앙이 퍼져 있었다. 신라 사회에 유·불·선 3교를 융합하려는 사상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 무르익었다. 이미 제시한 화랑도의 정신은 선교에 그 근원을 두었고, 그 내용은 유·불·선 3교를 융합한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3교를 융합하려는 그러한 정신은 유·불이나 또는 불·선과 같은 두 종교의 교류와 융합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풍류도의 3교 융합정신이 최치원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어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은 “孔子는 仁에 의거하여 德을 의지했고 老子는 白을 알면서 黑을 지킴이로다. 二敎가 한갓 天下의 格式이라 자칭하지만, 부처님과 실력을 겨루기 어렵도다. 千萬里 밖 서역을 비추었고, 一千年 후에 東國을 밝힘이로다. 鷄林의 지대는 금오산 곁에 있고 仙과 儒는 옛부터 기록함이 많았다”451)崔致遠,<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95쪽.고 하였다.

 또한 그는 “五常을 방위로 나누어 東方에 配對한 것은 仁이요, 유·불·선 3교에서 각각 이름을 내세웠는데 淸淨한 경지를 나타낸 이가 부처님이다. 仁의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를 지목해서 能仁이라 함은 이를 法받은 것이다. 東夷의 유순한 성품의 바탕이 迦毘羅國의 자비하신 부처님의 敎海를 이르게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고 비가 모래를 모우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물며 동방 제후의 外守者로 우리보다 더 크고 신령스러운 나라가 없음이라. 국민성은 이미 살리기를 근본으로 삼고, 풍속도 또한 서로 양보하는 것을 으뜸으로 한다. 和樂한 태평의 봄이요. 隱隱한 上古의 敎化로다”452)위의 책, 88∼89쪽.라고 하였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유·불·선 3교의 融合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지증대사비의 序에서 유·불 2교가 융합될 수 있음을「仁」의 논리로 설명하였다. 그것은 유교의「인」을 매개로 불교의 자비를 아우르고자 하여, 부처를「能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유·불의 융합 논리는 五常으로 설명되었다. 곧 동방이 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東夷의 유순한 성품이 상고로부터 내려오는 은은한 교화여서 부처의 敎海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유·불·선 3교의 융합 논리는 仙敎的인 바탕 위에 유·불의 2교를 아우르는 것이다.

 또한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의 讚에서 신라에는 이미 유·불의 2교가 융합되어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런 기반 위에 불교가 전래되어 3교가 융합됨을 넌즈시 제시하였다. 여기서의 유·선 2교의 융합은 물론,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을 추구하여 선교가 바탕을 이룬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증대사비의 찬에 나타난 유·불·선 3교의 융합도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선교였음이 분명하다. 3교 융합에서 선교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음은 화랑도정신을 풍류도로 파악하여 그 근원을 선교에서 구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다만 지증대사비의 찬에서는 유·불 2교에 비해 불교의 덕을 더 높여 설명하였다. 이 점은 물론 지증대사를 찬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유·불·선 3교를 융합하려는 주체를 설정하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신라 하대의 3교 융합사상은 그 근원은 선교에 바탕하였지만, 점차로 그 논리가 갖추어지면서 불교의 융합 논리를 중시하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유·불·선 3교의 융합사상은 유·불이나 유·선 또는 선·불 등의 교의가 서로 교섭을 가지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비록 그것이 성립되었을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할거하여 신라국가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을지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가고 있었다. 3교 융합사상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무언가 연결되어 전개되었다. 따라서 유·불·선 3교의 융합사상은 전적으로 신비적인 선교를 가장 중시하려는 혼돈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안에 보다 세련된 융합논리를 갖추면서 전개된 것이다.

<金杜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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